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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글 보충하는 내용임.

주요 출처는 1978년에 나온 논문 '1880년대 기기국, 기기창의 설치'임. 한자가 많아서 읽기 존나 빡세네


1. 대원군과 고종 초기
1862년 임술민란과 1866년의 병인양요 이후 대원군은 무기 마련에 나섰음.

조총을 비롯한 전통 화기 생산 외에도 일본을 통해 총을 수입하려고도 했고, 서구식 무기의 제작에 직접 손을 대기도 함.

대표적인 게 프랑스 대포를 모방한 대중소포 트리오고, 수뢰포 생산과 목탄증기선 건조도 시도했음. 여기에는 1840년대에 들어온 해국도지가 길잡이 역할을 함.

하지만 난학자들을 실무진으로 두고 굴러간 사쓰마 번주 시마즈 가문의 슈세이칸 사업과 달리 대원군의 서구식 무기생산은 서구 과학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에 실패로 돌아감.

1870년대부터는 개화당의 박규수가 청에 사신으로 가 청의 양무운동을 보고했고, 오경석 역시 증기선을 제조하고 석탄과 철을 채굴하자는 부국강병론을 주장함

핵심은 서구에 맞선 국방론이었음. 이 움직임은 개항 이후 조사시찰단이 일본을 다녀와 그 발전상을 둘러보고 나서 본격적인 개화움직임으로 이어짐.


2. 청일 유학과 기기창 건설
청나라가 조선 장악을 위해서 계획된 기기창 규모를 줄여버렸다는 것은 저번에 설명했음. 근데 이 논문을 보니 심지어 축력 기반으로 축소하려던 모양임.

거기다 유학생 경비부족 문제까지 겹쳐버리면서 기기창은 2만냥 어치의 소수의 제작기기를 구입하고 중국 기계공을 도입하는 계획으로 틀어져버림.

다행히 이 계획은 조선정부에 보고되어 변경된 모양임. 1882년 6월 10일 조선은 퍼거션캡 제작기, 증기기관, 크레인 등의 소형기계를 구입했지만 하필 이때 터진 임오군란으로 잠시 계획이 또 연기됨.

그래서 난이 끝나고 나서야 영선사는 장비들을 인수해 돌아올 수 있던듯. 슈미트라는 독일인 기술자, 1차로 인수할 5천냥 어치 기계들(퍼거션캡 기계, 기중기, 증기기관, 전기기구, 화학기구) 등의 조선행이 결정되었음.

그 결과 1883년이 되어서야 근대적 기계 총 62종과 53종의 근대 학문 서적, 4인의 초빙된 기술자들이 전부 인천으로 들어올 수 있었음. 이 중 증기기관은 크루프제로 추정된다는듯

이를 바탕으로 1883년 4월부터 기기창 건설이 시작되었고 1887년 10월 29일 완성됨. 건설이 늦어진 이유는 우선 갑신정변으로 인한 정치 혼란임

하지만 보다 정확히는 정변을 진압하고 조선을 감시하려 들어온 위안스카이가 조선의 개화운동을 철저히 탄압했기 때문임. 급진개화파의 대두를 경계한 청은 공장건설을 방해함.

조선정부 역시 자체제작보다 싸게 먹히는 해외무기도입에 보다 관심을 보였고,

그 결과 기기창은 대규모 조병창이 아닌 자그마한 공장으로 남게 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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