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1~1884)
위당 신헌은 조선 후기의 무관임. 대원군 시기 국방정책의 뼈대를 건설한 개혁가이자 군사사상가이면서 개항을 진두지휘한 인물이기도 함
1811년에 태어났고, 다산 정약용의 집안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음. 그리고 또다른 실학자였던 추사 김정.희의 수제자임.
그 외에도 많은 이들과 교우했음.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들 때 도와주기도 했고 정약용의 친구였던 승려 초의선사, 개화파의 아버지 박규수와도 교우함.
그 덕에 신헌은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학문에 눈을 뜨게 되었음.
신헌은 효명세자의 집권기인 1820년대부터 안동김씨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중앙정치계에 등장함. 조선 개혁을 진두지휘하던 효명세자의 친위세력이었음
하지만 효명세자가 요절하고, 다시 헌종이 요절하면서 반 안동김씨 세력이 숙청될 때 실각, 한동안 유배 생활을 해야 했음. 이때부터 박규수랑 안면을 텄음
그러다 철종 말기인 1857년 유배에서 풀려나 대원군 시기부터 주요 인물로 부상함. 여기에는 김정.희와 대원군 역시 학맥이 이어진다는 점이 작용함
그리고 이때부터 신헌은 각종 개혁론을 펴기 시작함. 여기는 군갤이니 그 중에서 국방정책에 초점을 맞춰 소개하겠음
(정약용의 민보의)
(신헌의 민보집설)
1860년 제2차 아편전쟁의 소식이 전해지며 조선 사회는 충격을 받았고, 신헌도 마찬가지였음.
당시 삼도수군통제사로 통영에 있던 그는 이양선이 진짜로 나라를 조지겠구나 싶어서 대비책을 마련할 필요를 절감함.
임술민란이 터진 1862년부터 병인양요가 끝난 1867년 사이에 신헌은 민보방위에 관한 문헌들을 수집하면서 여러 차례 상소문을 올리기 시작함
요는 6개의 개혁안이었음
1. 경병단조: 서울 군병의 훈련
2. 장선향포: 지방 포군의 선발
3. 권설민보: 민보 설치 권장
4. 북연제병: 북쪽변경 군제 정비
5. 독수내정: 내정의 정비
6. 심료이변: 오랑캐의 변란 살피기
해설하자면 아래와 같음
1) 철저한 대민통제와 삼정의 개혁
당시는 민란이 마구 발생하던 시기였음. 그래서 신헌은 철저한 호구 조사 내용을 카드화하여 관청에 보관하고 오가작통제와 처벌을 마련해, 민란을 막고자 함.
다만 당근을 주어야 한다는 것도 지적함. 백성들의 민란의 근본적 원인은 환곡 폐단이었으니 이걸 과감하게 개혁해야 한다는 것임
신헌은 원래 환곡을 유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1866년 병인양요 이후 생각을 전환함. 민보 설치를 위해서는 민의 관에 대한 신뢰가 회복되어야 했음. 그게 안 되면 민병들은 정부로 총부리를 돌릴 것임.
신헌은 백성들이 충의를 통해 결집하는 지배사족들과 달리 먹고사니즘이나 혈육 같은 본능적 삶의 의지를 더 중시하는 존재라고 파악했음. 그 인간적 욕망을 긍정하고 토대에서 사회안정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말함
신헌은 평등을 강조했음. 양반들에게도 군역과 호부를 부과하고 이걸 법으로 강제하자는 것임. 이로써 상민층의 경제적 부담을 덜고 사족의 특권을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함
2) 민보 설치
민보라 함은 향촌의 유리한 거점에 설치한 방어 구조물을 의미했고, 군을 동원할 수 없는 지역에서 민 스스로가 방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임
이는 일종의 게릴라 총력전법이자, 외침에 대응하기 위해 백성들을 동원하고 민란을 방지하기 위해 군사적 편제에 묶어놓는 것이기도 함.
이는 위에서 말한 백성들의 인간적 욕망에 기반한 방위체계이기도 함. 특히 토호들은 자신들의 것을 지키려 하는 경향이 강하므로 민보 설치에 적극적일 것이라는 논리였음.
그 이론적 바탕은 정약용의 '민보의'임. 차이가 있다면 원래 민보의는 일본의 재침입에 대비한 것이었지만 신헌은 서양도 대비했다는 점,
그리고 주로 내륙과 산지지역에 민보를 구축할 것을 주장한 정약용과 달리 신헌은 해안을 포함한 전국에 벙커링을 하자는 것이었음.
해안방어관은 중국의 위원이 주장한 강방 중심의 해안방어론을 수용한 것임. 위원은 서양 함선을 강을 통해 끌어들여 격파하자는 주장을 했음.
민보집설은 1867년에 채택되어 각 도에 배포되었음.
3) 전통과 신식 군사기술
신헌의 국방론에는 정약용이 수원화성을 건설하며 사용한 축성방법도 대거 반영되었음. 공성포에 맞선 낮은 성곽과 흙으로 보강한 성벽 등.
그리고 신헌은 특히 훈련도감 총병, 그리고 지방의 포수들 중심의 정예 포군 양성을 주장하였음.
하지만 특이할 만한 점으로는 위원의 해방론과 해국도지에서 영향받아 강안을 경비하는 수졸부대를 두자고 했음. 수뢰포를 만든 것도 같은 맥락임.
얼마나 받아들여졌는가?
신헌의 국방론은 그 자체로 오롯이 받아들여지지 못함. 민보 설치는 백성들이 싫어한다는 이유로 빠꾸를 먹었고 환곡 대신 주장한 사창제도 왜곡된 형태로 실현됨.
신헌이 주장한 개혁론은 비단 국방뿐만이 아니라 조선의 오랜 이해관계를 건드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러했음.
서양식 신무기 제조는 서양 기술과 사상을 금기시한 위정척사파의 어양론과 양립할 수 없었기 때문에 중단되었고 말임.
이후의 신헌의 활동
1) 축성
1874년이 되자 신헌은 강화도 일대의 진무사로 파견되어 신미양요로 깨강정이 난 강화도 방어진들을 복구하는 임무를 맡게 됨
신헌은 특히 포대 설치를 중요시했음. 적선에 대한 화포 직사를 위해 낮은 지형에 포대를 설치했음. 그리고 상륙부대 차단을 위해 토성과 해자를 팜
2) 외국과의 수교
여기서부터는 내가 논문을 못 구해서 내용이 소략함.
신헌은 운요호 사건 이후부터는 외교 업무에서도 두각을 나타냈음. 우선 전권대관으로써 일본과의 협상에 나서서 강화도조약을 맺어 개항을 하였음.
이때 신헌의 옆에서 수행한 인물이 초대 개화당의 강위, 그리고 오경석임. 가장 국제정세에 밝은 이 둘의 보조를 받아 신헌은 개항을 선택함
1882년에는 미국과의 수교과정에서도 개화파의 보조를 받아 조선 대표로 나서서 통상조약을 체결했음.
그리고 2년 후, 1884년에 74세의 나이로 고향에서 사망함.
출처
우리역사넷
신헌의 국방론과 해안 포대 건설
丙寅洋擾 전후 申櫶의 대내인식과 개혁론
申櫶(1811~1884)의 內修禦洋論 硏究
申櫶의 國防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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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가래서 오~ 하면서 보고 있었는데 오가작통은 시발 ㅋㅋㅋㅋ 시대적 한계는 어쩔 수 없는듯 - dc App
ㅇㅇ 시대적 한계도 명확히 가진 인물이었음 - dc App
신헌의 또다른 업적은 세계 최초 방탄복인 면재배갑과 세계 최초 기뢰인 수뢰포를 만든 것.
최초까진 아니고 서구에서 활대기뢰니 접촉발화식 원시 통나무 어뢰니 같은게 있긴 했지만 19세기 중엽에 저정도 신속성면 대단한거 맞음
ㅇㅇ 수뢰포 - dc App
다만 신헌은 본인은 전권을 받지 않았다고 회의 당시 언급하긴함.
ㅇㅎ - dc App
조선 최후의 군사사상가, 신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