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갖 사람이 모이는 군대답게 대한제국군에도 여러 사건사고가 있었다.




1899년 4월 30일

평양 진위대에서 징발한 병사와 친위3대의 병사들이 술주정으로 치고 받다가 칼까지 들고 난동부림

위관급들은 면직되고, 영관급들은 근신 처리



1899년 6월 23일

시위대 2대대장 김명제(金明濟)가 황제랑 대화할 때 쓸데없이 말 많이 한다고 하여 다른 신하들이 면직 후 징계할 것 요구


1901년 3월 22일

친위제1연대 제1대대 참교(하사) 김광식(金光植)

왕이 경연하는 보문각에 들어가 창문을 부숨

직속상관인 연대장서리 장화식(張華植), 대대장 양성환(梁性煥), 중대장 최낙주(崔洛周), 소대장 조승호(趙承鎬), 순찰 책임자인 중대장서리 박문병(朴文秉) 등 장교 5명 파면

이후 조승호는 태 100대, 최낙주는 80대, 양성환은 50대, 장화식은 20대

조승호는 사병의 승진이나 징계권한이 중대장에게 있기 때문에, 소대장에게 책임 묻기 어렵다는 반론에도, 김광식의 휴가를 승인해줬단 이유로 중대장에게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책임을 물게 됨

당직을 섰던 박문병은 처벌 안 받은 것으로 보임


황제의 권위와 직결된 문제라서, 물리적 사건 규모에 비해 처벌 수위가 엄청 높았던 걸로 보임


1901년 8월 15일

대대장 전우기(全佑基)가 군량미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조금씩 떼먹음

면직하고 육군 법원에서 처리하라고 함


1902년 1월 10일

무관학교 학도들이 집에 가서 일이나 하는 게 도움되겠다며 수업 거부하고 집단 이탈하는 사건이 일어나 학도대장과 위관급 교관 등이 면직 처리됨


이를 보고한 원수부 검사국 총장도 자신에게 처벌을 요구하여 1개월 감봉


1903년 2월 8일

참령 이용구(李容九)가 병사들 급료를 늦게 지급

참령 권섭(權攝) 김유현(金有鉉)이 탐관오리로 지목받음

중대장인 이민직(李敏稷)이 대대장 행세를 하면서 불법을 행사


1904년 11월 28일

북관 진위(鎭衛) 5연대(聯隊) 제2대대장 심횡택(沈宖澤), 제3대대장 김명환(金命煥)이 군수물자 분실하고 미보고 했다고 징계하라고 건의 들어옴


1904년 12월 31일

대안문에서 당직을 서던 병사들이 일본 헌병과 시비가 붙어 돌을 던짐

당시 일본의 눈치를 안 볼 수 없는 입장이라 육군법원에 보냈는데 후속 조치는 못 찾음


1905년 6월 1일

참령 홍진길(洪眞吉), 소대장 전영록(全英祿)이 민간인을 때리고 영창에 가둠

참령 박선빈(朴善斌)이 부대 막사 수리비를 유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