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를 수당을 물리칠 정도로 강성한 나라, 또 조선을 그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로 여기고 있었던 중국인들의 인식은 때로 엉뚱한 오해를 낳기도 했다. 즉 앞에서 이미 보았듯이 많은 조선인들이 요동 지역을 고구려의 고토로 여기고 있었거니와 명의 지식인 가운데는 조선인들이 혹시라도 ‘고토 회복’을 시도하지나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실제로 鄭道專은 조선 건국 직후부터 요동에 대한 영토적 야심을 드러낸 바 있었다. 그 때문에 명 태조는 여러 차례 表箋 문제 등을 빌미로 조선 조정에 정도전을 압송하라고 요구했는가 하면 요동에 대한 조선의 영토적 야심을 차단하고 조선을 ‘길들이기’ 위해 고압적인 태도와 함께 ‘조선 정벌’을 운운하기도 했다. 영락제가 즉위한 이후 명이 요동에 대한 지배, 그리고 그곳에 거주하던 여진에 대한 초무에 성공하면서 조선의 ‘고토 회복’에 대한 열망은 현실적으로 실현이 어려워졌지만 그것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비록 드러 내놓고 “요동을 수복하자”고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요동을 고구려의 고토로 여기는 인식은 조선 사람들에게 면면히 이어졌다. 1598년 선조실록의 史臣은 요동을 고구려의 옛 땅으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조선을 ‘本鄕’으로 여기고 있다는 내용을 기록한 바 있다. 조승훈이 선조와 만난 자리에서 자신이 ‘조선과는 한 집안 사람’이라고 친근감을 표시하자, 사신은 바로 위와 같은 내용을 사평으로 남겼던 것이다.


 조선인들의 의식 속에 잠재된 이 같은 태도를 간취했는지 명 또한 ‘조선이 고토를 회복하려 들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완전히 떨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 조선은 명에 사신을 보내 일본의 명 침략 가능성을 보고한 바 있었다. 그러나 당시 요동 지역에서는 조선이 일본과 공모하여 고구려의 고토인 요동을 탈취하려 한다는 풍문이 돌고 있었다. 그 때문에 명 조정은 사실의 여부를 확인한 다음에야 병력을 파견하는 수순에 돌입했다.


 실제 정유재란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던 무렵인 1598년(선조 31) 9월, 명의 贊畫主事 丁應泰는 요동 문제와 관련하여 조선을 誣陷하는 奏本을 神宗에게 올렸다. 정응태는 주본에서, 압록강 夾江에 있는 섬의 관할권을 놓고 조선과 요동 인민 사이에 쟁송이 벌어졌는데 遼東都司가 요동 인민의 편을 들자 조선이 불만을 품고―조선 내에 살고 있는 倭戶들로 하여금 일본군을 끌어들이게 하여―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기 위해 요동을 공격했다고 기술했다.


 정응태의 주장대로라면 임진왜란은, 조선이 고구려의 고토인 요동을 수복하기 위해 일본군을 끌어들여 발생한 것이 되는 셈이다. 정응태는 당시 조선에 들어가 있던 東征 장수들의 공과를 감찰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실제로 총사령관 격인 經略 楊鎬를 탄핵하여 명으로 소환되게 만들었다. 이 때 조선 조정이 신종에게 양호의 유임을 요청하는 등 그를 두둔하자 불만을 품고 위와 같은 주장을 폈다. 그러면서 그는, 조선이 대마도에 무역을 허락한 것, 申叔舟가 남긴 <海東諸國記>에서 일본의 연호는 크게 쓰고 명의 연호는 작게 쓴 것을 조선이 일본과 공모한 증거라고 제시했다.


 조선은 즉시 辨誣使를 북경에 보내 ‘일본과 공모하여 요동의 고토를 회복’ 운운하는 것은 터무니없다고 강조하는 등 정응태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명 조정은 회의를 열어 조선이 대대로 충성을 다했다고 평가하고, 조선의 변무를 받아들임으로써 사건은 종료되었다. 


 결국 정응태의 무고 사건은 명 조정 신료들 사이의 정쟁에 조선 조정이 연루됨으로써 발생한 일종의 ‘해프닝’이었다. 하지만 당시까지도 중국인들 가운데는―정응태의 경우처럼―‘고구려의 고토’인 요동에 대한 조선의 야심과 조선과 일본의 결탁 가능성에 대한 의구심이 여전히 잠재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조선과 일본의 결탁 가능성에 대한 언급은 1623년 인조반정 발생 직후에도 나타났다. 인조반정 발생 소식이 명에 알려진 직후 요동에서는 “仁祖와 反正勢力이 거사를 일으키면서 일본군을 끌어들여 궁궐을 공격했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돌고 있었다.



출처: 한명기, 2006,「조선시대 韓中 지식인의 高句麗 인식 - 고구려의 '强盛'과 조선의 고구려 계승 인식을 중심으로 -」, 『한국문화』 제38권 제38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