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京大学日本史学研究室紀要
陸軍による海戦情報入手とその後の意志決定 : ミッドウェー・レイテ沖両海戦, 井上 陽介著



도쿄대학 일본사학연구실, 2010년 03월 21일, 육군에 의한 해전 정보 입수와 그 후의 의사결정 : 미드웨이, 레이테만 해전

이노우에 요스케 저술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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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두



본고는 태평양 해전에서 일본해군이 항모 4척을 격침 당하는등 대타격을 받아, 공동작전을 실시하고 있었던 육군의 작전에 다대한 영향을 끼친 미드웨이, 레이테만 두 해전을 고찰해본다.


두 해전에 있어서 해군에서 육군으로 정보를 전달한데에 관해 이미 적지 않은 선행연구가 존재한다. 노무라 미노루著 [태평양 해전에서의 '군부독재' ]*1 에서 '육군에게는 해군의 정보가 전달되지 않고, 해군에게는 육군의 정보가 전달되지 않는 실정이었다' 고 지적했다. 미드웨이 해전에 대해서는 토베 료이치著 [역설의 군대]*2 에서 '육군당국자는 패전의 사실을 전달 받아도 패전의 규모와 실태는 전달 받을 수 없었다고하며 아군의 패전 상황을 제대로 알 지 못하면 효과적인 전쟁지도도 불가능했다' 며 해전의 구체적인 내용이 전달되지 않았다고 기술했다. 한편, 레이테만 해전에 대해서는 아리스에 세이조著 [정치와 군사와 인사]*3 에서는 '특히 육해군간의 상호불연락이 비도결전작전의 대변경, 레이테만 해전, 레이테섬 결전 실패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고 하며, 타카야마 노부타케著 [참모본부작전과]*4 도 '해군이 (중략) 적항모는 전멸했다고 통보하여 육군의 작전이 틀리게 만들고 비도 결전을 참패로 끝나게 만들었다' 고 기술했다.


아리스에와 타카야마는 두 사람 모두 구육군군인 출신이었다. 즉, 해군이 육군에 정보를 전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육군의 작전이 실패했다는 견해가 일종의 통설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나는 당시 작전지도를 실시한 입장인 육군상층부의 회상에 이러한 견해가 나타나지 않는 것에 의문을 가졌다. 그래서 육군에서 작전지도등의 실무를 담당했던 참모본부 작전부장의 일기를 중심으로 사료를 읽어보겠다.


이하, 해군에서 육군으로 정보를 어떻게 전달했는지의 실체와 육군에 의한 정보통제의 방침 두가지 부분을 검토한다. 첫번째는 태평양 전쟁 개전 이전부터 해군 입장에서 바라볼때 '육군의 동원, 물자의 불법탈취*5' 가 있었기 때문에 육해군간의 대립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경향이 보였지만, 그것이 공동작전을 실시할 때 정보의 공유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만들었는가이다.


두번째로는 육군중추는 알고 있던 정보를 어느정도 예하의 군인에게 전달했는가이다. 예를들어 해군에게서 육군중추로 정보가 제공되었다고해도 육군중추가 정보통제를 실시하면 예하의 군인은 정보를 얻지 못하고 해군이 육군이 정보를 전달하지 않았다고 오해할 가능성이 높다. 육군내부의 정보통제는 어떠했을까. 그리고 본고 마지막 부분에 연표와 조직도, 각 해전시의 주요 관직 재임자표를 게제하였음.






Ⅱ. 군령부의 정보 입수


해전 정보는 군령부로부터 참모본부로 전달되기 때문에 군령부가 어떻게 정보를 얻었는가를 살펴보고, 군령부가 참모본부로 전달한 정보를 확인해보겠다. 현지로부터 군령부로 전달되지 않으면 참모본부로 전달 될 리가 없기 때문이다. 먼저 군령부가 입수한 정보의 정확성과 그 즉시성을 살펴보겠다.




(1) 미드웨이 해전


미드웨이 해전은 6월 5, 6일에 아카기, 소류, 히류, 카가 4척의 항모가 침몰하고 모가미는 대파, 똑같이 대파한 미쿠마는 일본측에서 최후를 누구도 목격하지 못한 상태로 7일에 침몰했다. 이러한 정보를 군령부는 어느정도 입수하고 있었던 것일까. 당시 군령부원(제1부 제1과)과 대본영 해군부 참모였던 타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친왕의 일기*6 와 군령부원(제1부 제2과) 카네오카 토모지로 중좌의 일기*7 에 적힌 피해를 종합하면 표1(차항)과 같이 된다. [타카마츠노미야 일기] 에 의하면 제1항공함대등에서의 무선통신으로 거의 즉시 정보를 전달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미드웨이 해전에서 군령부는 피해 함정에 관한 정보를 정확히 얻었다고 할 수 있다.




(2) 레이테만 해전


이어서 레이테만 해전에 대해서 살펴보겠다. 레이테만 해전의 피해를 종합하면 표2(186항)과 같다. 하지만 번잡해지므로 전함, 항공모함, 순양함의 피해로 한정했다.




① 나카자와 타스쿠 군령부 제1부장의 노트


군령부가 얻은 정보의 전부에 대해 직접 아는 것은 사료의 제약상 어렵지만, 먼저 당시 군령부 제1부장이었던 나카자와 타스쿠가 남긴 [나카자와 군령부 제1부장 노트 전황 제6] 를 읽어보고 종합한 것이 표2 이다. 불충하지만 항모 4척의 침몰을 제외하면 침몰한 한정에 관해서는 모든 피해가 보고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표2 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치토세와 타마가 낙오한 것등 항모한 피해 정보도 들어가있다. 하지만 이 노트에는 항모 4척 침몰은 기록되어있지 않다. 거시서 항모 4척 침몰에 관한 정보를 상주서에서 확인해보도록한다.




② 상주서


당시 내대신 키도 코우이치의 전후 회상에 의하면 '통수부는 전황에 대해서 가령 최악의 것이라도 하나도 감추지 않고 지체 없이 천황에게 알렸다' 고 한다. 대본영 해군부에 의한 상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


상주일시*11


23일1030 - 아오바 항행불능

24일0900 - 타카오, 어제 피뢰 키미카와마루[해군화물선] 침몰

25일0900 - 무사시 제2전대[야마시로, 후소, 모가미], 와카바 침몰

           모가미 대파염상

           야마토, 나가토, 야하기, 키요시모 피해 묘코 피뢰

26일0815 - 스즈야, 아키즈키 침몰 모가미 총원퇴거

           제1유격부대별동대[제2전대, 야마구모, 미치시오, 아사구모] (시구레 이외) 침몰

           초카이, 치쿠마, 쿠마노 상당한 피해 치쿠마, 초카이 낙오(노와키, 후지나미가 호위)

           치토세, 타마 낙오 즈이카쿠 통신불능 장관은 오오요도로 이함 아부쿠마 손상

27일0900 - 노시로, 아부쿠마, 키누, 우라나미 침몰 쿠마노 일시항행불능 오키나미 손상 경미

28일0830 - 즈이카쿠, 즈이호, 치토세, 치요다, 아키즈키 침몰 타마 피뢰



야마다 아키라씨의 [쇼와천황의 군사사상과 전략] *12 에도 비슷한 표가 게제되어있지만, 실제로는 기록되어있지 않은 10월23일 '아타고 침몰, 마야 굉침' 이 기재되어있는등 틀린 부분이 보인다. 따라서 야마다 아키라씨가 주장하는 '실제로 침몰했음에도 불구하고 천황의 보고에 언급되지 않은 것은 구축함 2척뿐이다'*13 는 것은 절대로 아니며 '천황으로의 상주는 함정의 손실에 대한 속보라는 점에서 거의 정확했다' 라는 지적에는 의문이 남는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전함, 순양함, 구축함에 관한 침몰, 항행불능, 낙오 및 항공모함의 피해에 대해서는 오자와부대 소속의 함선도 포함하여 그 대부분이 당일 또는 다음날 군령부가 정보를 입수하여 상주한데 반해 25일의 항공모함 4척의 침몰에 관해서만은 상주된 것이 28일로 3일이나 차이가 있는 점이다. 이 이유에 대해서 [전사총서] 에서는 군령부가 레이테만 해전에 출격한 항모 4척의 침몰을 안 것은 27일 정오에 오자와 중장이 아마미오시마에 귀항*14 한 이후였기 때문이라고했다.*15


그렇기 때문에 27일 9시의 [전황에 관한 설명] 에서 항모 4척 침몰에 관해 언급하지 않고 다음날 28일 8시30분에 처음 상주 된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군령부로 정보전달이 27일 정오 이후로 늦어지게 된 것일까.




③ 항모 4척 침몰 정보 전달 지연


오자와 부대의 1척인 휴우가의 함장이었던 노무라 타메요시가 저술한 [비도만 해전중의 일지] 10월25일 항에는 '오늘 아침 즈이카쿠에 있었던 장관기는 지금 오오요도에 있으며 당당했던 항모 4척은 이제 없다' 고 기술되어있어 오자와 부대의 1척이었던 휴우가는 항모 4척이 침몰했다는 정보를 이미 25일에 입수한 것을 알 수 있다. 제1기동부대 장관 겸 제3기동부대 사령장관이었던 오자와 지사부로 중장은 오오요도로 옮겨간 장본인이기에 오자와가 항모 4척이 침몰한 것을 당일 알고있었던 것도 확실하다. 그렇다면 어째서 군령부로 정보 전달이 되지 않았던 것일까.


당시 북동방면함대 참모 겸 제12항공함대참모 제5함대참모 북방군참모였던 후타 키쿠이치 대좌의 일기 25일항에는 '오늘 동부대[오자와의 기동부대]로부터 전투에 관한 어떠한 전보도 없었다. 아침 일찍 적기의 접촉을 받았따는 것과*17 이후 기함을 오오요도로 변경하였다는 것을 알려왔을 뿐이다' 라고 기록되어있어 항모 4척이 침몰한 25일, 적어도 후지타가 일기를 작성한 시각까지는 '아침에 적기와 접촉한 것과 기함을 오오요도로 변경한 것' 외에 전투에 관한 전보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당시 전함 야마토의 암호사였던 코지마 키요후미가 25일의 상황으로서 전후에 기록한 '그때까지 소식이 없던 오자와 함대로부터 한통의 전보가 달아왔다. 12시가 지난때였다. '기함을 오오요도로 이양, 계속 교전중*19' 이라는 문장이었다.


하지만 당시 연합함대 사령장관이었던 토요다 소에무의 일기 [토요다 소에무 해군대장 일지] 의 10월25일항에는 'KdMB 항모 전멸(즈이카쿠, 즈이호, 치요다, 치토세)*20' 이라고 기록되어있다. 후술하듯 당시 토요다는 히요시에 있었던 연합함대사령부에 근무하고 있었다. 일기란 것은 보통 당일 쓰는 것이지만 나중에 정리해서 썼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료에서도 히요시의 연합함대사령부에 항모 4척 침몰의 정보가 들어온 날짜를 확인해보겠다. 당시 임시 연합함대사령부 근무였던 이치키자키 히데마루가 기술한 [대동아전쟁중의 일기발췌 및 해설] 에서 26일의 일기를 참조해본다.


'1YB[유격부대]는 귀환하자마자 공습으로 피해를 입었지만 재빨리 위기를 탈출한다. 잠시후 상황을 알 수 없었던 1KDF[기동함대]는 역시 미KdB[기동부대]의 공습으로 항모 4척 기타를 잃었다. 결국 수상작전은 참고한 실패로 끝난 형태다. 적KdB는 과연 몇척 존재하는지, 대만 항공전의 전과를 생각하면 실로 이해하기 힘들다.*21' 레이테만 해전에 참가한 일본의 기동부대는 오자와 지사부로가 이끄는 함대 이외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여기서 언급된 1KDF가 오자와 부대를 지칭하는 것은 확실하다. 즉 대만 항공전의 전과에 대해서 의문이 있다는 것을 전달 받지 못한 이치키자키이긴 했지만 항모 4척 침몰에 관한 정보는 26일에 이미 얻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치키자키는 어디에서 정보를 얻은 것일까. 이를 검토하기 위해 당시 이치키자키가 있었던 장소를 찾아본다. 일기의 10월20일항에는 '토요다 장관 일행은 20일만에 대만에서 귀환하여 통신시설이 완비되지 않은 곳에서 지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을 것을 결국 깨닫게 된 것 같다' 라는 기술이 있다. 이 기술로부터 이치키자키가 연합함대사령장관 토요다 소에무와 만났거나 적어도 토요다의 이야기를 들은 셈이 된다.


상주서에 '연합함대사령장관은 오늘[20일] 제1작전지령소에 귀환'*22 이라 적혀있고, 토요다의 회상에는 '대만의 항공함대사령부는 통신첩보기관이 불충분하여 적측은 물론 아군의 상황도 알 수 없었다' 고 적혀있으므로 20일에 토요다가 귀환한 곳은 히요시이며 내용도 이치키자키가 일기에 적은 것과 일치한다. 따라서 이치키자키는 20일에 토요다의 이야기를 히요시에서 들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치키자키가 26일 당시 있었던 장소도 히요시의 연합함대사령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를 통해 '미KdB[기동부대] 의 공습으로 항모 4척 기타를 잃었다' 는 정보는 히요시의 연합함대사령부에서 얻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상으로 25일 늦어도 26일에는 히요시의 연합함대사령부에 항모 4척 침몰의 정보가 전달되어 토요다에게 보고되었던 것은 확실하다. 한편 먼저 말했듯이 군령부에 항모 4척 침몰의 정보가 들어온 것은 27일 정오 이후인 것에서 연합함대사령부는 하루 이상 정보를 군령부에 전달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④소괄 - 레이테만 해전에 있어서도 함정의 피해 정보는 신속하고 상당히 정확하게 군령부에게 전달되었다. 하지만 항모 4척 침몰에 관해서만 연합함대사령부는 하루 이상 군령부에 전달하지 않은 것이다.





(3) 두 해전의 비교


미드웨이 해전에 있어서 군령부는 피해를 입은 함에 관한 정보를 정확하게 얻고 있었다. 한편 레이테만 해전에선 대부분의 정보를 당일 또는 다음날엔 군령부가 입수했지만 25일에 침몰한 항모 4척에 관해서만 26일이 되어서 전달되었다. 25일, 늦어도 26일에는 히요시의 연합함대사령부에 항모 4척 침몰 정보가 전달되어 토요다 사령장관에게 보고된 것도 확실함에 따라 연합함대사령부는 하루 이상 항모 침몰 정보를 군령부에 전달하지 않은 것이 된다. 하지만 여기서는 정확한 피해 정보를 빠른 단계에 군령부로 집약된 것에 주목하고 싶다.







Ⅲ. 육군의 정보 입수


레이테만 해전에서의 항모 4척을 제외하면, 해전에서의 함정 피해 상황은 두 해전 모두 신속하고 정확하게 군령부로 전달 된 것을 확인하였다. 위를 전제로 해군에서 육군으로의 정보 전달 및 육군의 정보통제에 대해 검토해본다.




(1) 미드웨이 해전



① 참모본부작전과


먼저 해군로부터 가장 빨리 정보를 전달 받은 케이스로 참모본부작전과를 들 수 있다(이하 표1을 참조할 것). 항모 4척이 침몰한 6월6일 당일 군령부는 오후 참모본부작전과[핫토리 타쿠시로] 외부원의 방문을 요청하여 전황에 관해 설명을 실시했다*24. 작전과장과 동반한 이모토 쿠마오 중좌는 그 날 일지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6일 정오전 군령부 작전과로부터 참모본부 작전과장 이하 작전참모의 방문을 요청 받아 즉시 향했다. 작전실에 들어가자 토미오카 작전과장 이하 침통한 표정으로 모여있었다. 야마모토 중좌가 미드웨이의 전황을 설명하고 우리 기동부대의 정예항모 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 4척이 전부 침몰하여 베테랑 조종사도 거의 다 잃었다고 밝히며 연합함대는 전장을 이탈하여 미드웨이 서방 약 1천해리에 집결중이라는 것이었다. 예상 이상의 대패에 경악했다.'*25 즉, 작전과장 일행은 군령부에 초대 받아 항모 4척 침몰을 알려진 것이었다.




② 참모본부 제1부장으로의 미드웨이 패전 제1보


작전과장 일행이 군령부에서 전달 받은 정보는 6일중으로 참모본부 제1부장 타나카 신이치 중장으로 보고 되었다. 타나카의 회상에는 '6월6일 미드웨이 패전의 제1보 도착'*26 이라 적혀있다. 이 보고를 받고 타나카는 일지의 6일항에


1) A[알류샨] 방면의 수습을 어찌할 것인가

2) M[미드웨이] 방면의 수습을 어찌할 것인가

3) FS[피지, 사모아] 수습을 어찌할 것인가

4) 포와[하와이] 단념, 참수함기지 파괴 단념


개개의 호위에 한층 더 힘을 쓸 것*27 이라고 적었다. 어느것도 미드웨이 패전의 사후처리를 고려한 것이다.





③ 군령부의 통보


다음날 6일에는 군령부로부터 육군중추로 다음 내용이 통보되었다. '최정예 일본항모 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 4척이 미태평양함대 함재기의 공격을 받아 모두 침몰하였다. 연합함대의 함재기로 미드웨이 섬의 미국기지를 강습하여 미기지공군과 전투를 전개하였으나 결국 미드웨이 기지를 파괴하지 못했다. 미드웨이 기지 공격을 위해 이함한 우리 함재기는 돌아올 함을 잃고 어떤 자는 해상에 표착하였다. 우리 함정은 이를 구조하였지만 정세는 파국적으로 비극이다. 중순 모가미는 적기지를 향해 용감히 포격을 실시하였으나 결국 대파되어 속도를 잃고 반전 퇴각중이다.*28'


이를 통해 군령부는 육군에 대해 6월7일 항모 4척 소실 및 순양함 1척 대파를 전달한 것을 알 수 있다. 순양함 미쿠마의 침몰은 7일 총언퇴함후 누구도 보지 못한 상황하의 일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순양함 1척 대파라는 내용은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정보가 정리된 6월12일 육해군 양통수부장 회의에서 군령부는 육군에게 '손해는 항모 4척 순양함 1척은 연락 없음, 모가미는 12리로 감속'*29 이라고 전달하였다. 이 항모 4척에 대해서 타나카는 일지의 6월5일항 마지막 여백에 '아카기, 카가, 소류, 히류 침몰'*30 이라고 크게 적어놓았다. 이 기재가 6일 미드웨이 패전 제1보때 적어진 것인지, 7일에 적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미드웨이 패전후 빠른 단계에 타나카에게 항모 4척 침몰이 전달된 것은 확실하다, 또한 7일에는 잔존 항모에 대해서도 군령부로부터 '정식- 즈이카쿠 쇼카쿠 쇼호 류죠 특설-준요 외 1척 올해내로 따로 2척'*31 이라고 전달 받았다.


이 미드웨이 작전에 육군병력으로서 이치키 지대가 참가했었는데,군령부로부터 '이치키 지대는 어디로 회항 시키는가' 의견을 요구받아 참모본부는 검토 결과 '먼저 와무[괌]섬으로 소치' 하는 것으로 타결을 보았다*33 이는 결과적으로 해군이 육군에 대해 적절한 정보전달 및 사후처리를 지시한 것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④ 육군중추의 상황 판단


한편 미드웨이 해전의 피해를 보고 받은 육군중추의 상황판단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타나카 신이치의 일지를 참조해본다. 일지 6일항에는 '생각하지 못한 대패배, 태평양의 패업 꺼지다' 라고 기재되어있으며 스기야마 하지메 참모총장의 '나가노[군령부총장]의 2년 보장은 깨졌다. 따로 방면을 바꾸지 않으면 안된다' 는 언급과 군령부의 심경을 생각하며 '암울하다' 고 그 분위기를 기록했다.*35 즉, 이 해전이 일본측의 대패인 것을 육군중추는 명확히 이해했다.


이어서 군령부는 육군중추에게 6월9일 '해군작전이 지금 중대한 국면에 빠졌다'*36 11일에는 '잔존 항모 2척으로는 수세로 돌아설 수 밖에 없다'*37 고 술회했다. 이 '잔존 항모 2척' 은 전달 산호해 해전에서 손상을 입어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하지 못한 5항전 즈이카쿠, 쇼카쿠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음날 12일 육해군 양통수부장 회의에서도 '남은 항모는 보잘 것 없음'*38 이라고 다시 한번 육군중추에게 항모 4척 침몰이 남긴 영향을 설명하고 있다. 즉 해군은 육군에게 항모가 침몰한 다음날에 항모 4척 침몰, 순양함 2척 대파, 이 중 1척이 침몰한 것을 언달하고 그것이 남긴 영향도 설명한 것이 확실하다.




⑤ 육군의 정보통제


한편 정보통제에 관해서는 해군*39 해군뿐 아니라 '미드웨이의 진상은 육군에서도 참모본부 작전과와 각 부장, 차장[타나베 시게타케], 총장[스기야마 하지메], 육군성은 군무국장[사토 켄료]*40, 차관[키무라 헤이타로], 대신[토죠 히데키] 이외에는 엄비가 되었다'*41 고 할 정도로 육군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예를들어 전 육군대신으로 당시 지나파견군 총사령관이었던 하타 슌로쿠 대장에게 미드웨이 작전의 결과가 전달된 것은 해전의 1달 이상이 지난 후인 7월8일이지만 그 날의 일지에는 '저번 미드웨이 진공 작전은 미 주력함대를 유인하기 위해 실행되었지만 그들의 주력함은 나오지 않고 되려 우리 주력함 및 항공모함이 하늘과 땅으로부터 적 항공병력의 목표가 되어 결국 유력한 우리 항공모함 2척을 잃은것뿐 아니라 주력함에도 약간의 손상이 있는 것 같다'*43 고 기록되어있으며 대본영발표*44 대로 항모 소실은 2척으로 전달된 것이다. 중국에 파견되어있었다고는 하지만 전 육상에게도 진상을 전달하지 않은 것은 해군의 패퇴라고는 하지만 육군측에서도 엄중히 정보통제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많은 육군군인이 정확히 정보를 전달 받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들은 그 이유를 해군이 육군에게 정보를 전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억측한 것으로 보인다.




⑥ 소괄


군령부는 피해 정보에 관해 즉시 정보를 입수하였으며 항모가 4척 침몰한 것은 다음날 7일 참모본부에 공식적으로 전달 했다. 정보를 받은 육군중추는 '태평양의 패업 꺼지다', '나가노의 2년 보장은 깨졌다' 라는 상황을 정확히 인식했다. 이어서 해군은 항모 4척 침몰이 가져온 영향에 대해서도 육군에 설명했다. 한편 피해의 실태에 관해서는 해군뿐 아니라 육군에서도 엄히 은폐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육군군인이 정확한 정보를 입수하지 못하고 육군이 해군에 정보를 전달하지 않았다는 억측이 유포된 것이다.






(2) 레이테만 해전



① 해군으로부터의 피해 정보 연락


[전사총서]에서는 해군의 피해가 어느정도 육군에 전달된 것인가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지만, 당시 참모본부 제1부장이었던 사나다 죠이치로의 일기에 의하면 피해에 관해서는 상당히 정확하고 신속히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사나다 죠이치로 소장 일기]*45 의 내용은 표2와 같다. 확실히 메모이기 때문인지 불완전한 점이나 전후 내용에 정합성이 없는점등이 곳곳 지적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거의 정확한 정보가 전달되기까지 시간차도 적은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연합함대사령부가 군령부에 전달하는 것을 주저한 항모 4척 침몰에 관해서도 군령부가 정보를 입수한 27일 당일 육군에 정보가 전달된 것은 주목할 만 하다. 즉, 해군으로부터 육군으로의 정보 전달은 신속하고 정확하게 실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② 해군으로부터 적 잔존 함정의 연락


레이테만 해전에 대해서는 해군으로부터 육군으로 적 잔존 함정에 관한 정보 제공이 있었다. 27일에는 해군으로부터 적 잔존 함정으로서 '정A[정규항모] x 3,  C개[순양함 개조항모] x3, 정도가 거의 손상 없이 남았고, aA[특설항모] x 10 정도가 있으며 (중략) F[적]의 B[전함]은 x 10 내외가 아직 있다'*46 고 전달되었다. 이 숫자는 군령부로부터 검토된 적 잔존 함정 '적 잔존병 정A x 3, CA x 3, aA x 10 이상 B x 10 내외'*47 라는 내용이 일치한 점으로 보아 적 잔존 함정에 관해서도 군령부는 추계 숫자를 거의 그대로 육군에 전달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어서 전과에 관해서도 군령부는 육군에게 26일,

격침 정A x 1, aA x 3~4, B x 1 ,갑C[1등순양함] x 2, 을C[2등순양함] x 1, d x 1

대파 대A(대) x 1 C개A x 1

중파 대A x 2 와스프 x1 A로 추정되는 것 x 1 C x 1

소파 aA x 3~4 B x 2

합계 격침파 21


이라고 대본영발표에 비해 상당히 적게 평가한 숫자를 전달한 것이다. 이 숫자는 군령부에서 전과를 검토하고 낸 숫자로 생각된다. 따라서 27일에 대본영발표뿐 아니라 항모 4척 침몰을 포함해 거의 모든 함선의 피해 정보, 적 잔전 함정에 관한 정보, 대본영발표보다도 상당히 적게 평가된 전과를 전달 받은 것이 된다.




③ 육군중추의 상황판단


①, ②에서 말했듯이 상당히 정확한 정보를 받은 육군중추는 레이테만 해전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했을까. 10월27일에서의 평가는 '종합적으로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조금 더'*49 라는 것으로 패전이라는 의식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즉 육군중추는 해군으로부터 레이테만 해전에 관해서는 거의 정확한 피해 보고 및 적 잔존 함정에 관한 보고를 받았지만, 레이테만 해전의 평가와 결전의 예상을 완전히 틀린 것이라 할 수 있다.




④ 육군의 정보통제


전승 기분 속에서 육군은 27일 '레이테 지상 결전으로' 전환을 지도하고, 전보를 전달했다.*50 현지 군에게 지시한 판단은 가장 단적으로 보이는것이 27일2225에 참모본부 제2과장 핫토리 타쿠시로에게 전달된 전보중 한 문장이다. '적 기동부대가 거의 괴멸적인 타격을 받은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목하에 있는 전세는 대국적으로 우리에게 유리하여 지금은 의심 없이 전 전력을 결승점으로 집중해야한다고 생각한다'*51


즉 육군중추는 해군으로부터 적 잔존 항모수에 관해서 정보를 얻었음에도 현지에는 전달하지 않았다. 미드웨이 해전후와 같이 레이테만 해전후에도 육군중추에 의해 정보통제가 이루어져 결전을 결행하는 방면군에게도 진상을 알리지 않은 것이다. 이 결과 27일 전승 기분속에서 제10방면군은 레이테 지상결전에 돌입하게 된다.




⑤ 소괄


레이테만 해전후 해군은 육군중추에 대해 대본영발표와는 별개로 항모 4척 침몰을 포함해 거의 모든 함선의 피해 정보, 적 잔존 함정에 관한 정보뿐 아니라 대본영발표 보다도 상당히 적게 평가한 전과를 전달하였다. 하지만 육군중추는 실제로 결전을 실시하는 방면군에게도 진상을 전달하지 않고 '적 기동부대가 거의 괴멸적인 타격을 받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지금 정세는 우리에게 유리함' 이라는 상황 판단을 전달했다. 결국 방면군은 27일 전승 기분속에서 레이테 지상 결전에 돌입하게 된다.






(3)두 해전의 비교


미드웨이, 레이테만 해전에 있어서 군령부로부터 육군으로 피해 정보 전달은 상당히 신속하고 정확하게 이루어졌다. 때문에 '육군에게 해군의 정보가 들어오지 않았고, 해군에게 육군의 정보가 들어오지 않았다' 는 등의 종래의 설은 틀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러한 이야기가 육군 출신자들 사이에서 돌았던 것일까. 이 이유는 해군뿐 아니라 육군도 해전 결과를 엄하게 비닉한 것 때문이 아닐까. 해군의 정보통제로 인해 정보를 얻지 못한 육군군인은 자신이 소속한 육군이 아니라 해군이 해전의 진상은 은폐한 것이라 오해한 것일 것이다.



한편 미드웨이 해전후는 '나가노의 2년 보장은 깨졌다' 고 술회한 스기야마 총장으로 대표되듯이 육군중추는 패전의 의미를 적절히 파악하고 있었던데 반해 레이테만 해전후에는 해군으로부터 정보를 받았음에도 '종합적으로는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조금 더' 라는등의 육군중추에게서 패전의 의식은 볼 수 없다. 이것이 영향을 준 것인지 양 해전후의 육군의 대응은 전혀 다르다. 즉, 미드웨이 해전후에는 이치키 지대의 괌 퇴피를 타결한데 반해 레이테만 해전후에는 대본영발표뿐 아니라 항모 4척 침몰을 포함해 거의 모든 함선의 피해 정보, 적 잔존 함정에 관한 정보 및 대본영발표 보다도 적게 평가된 전과를 전달 받은 10월27일, 육군중추는 해군으로부터의 정보를 현지에 전달하지 않고 반대로 '전황은 우리에게 유리하다' 며 전보를 전달하고 레이테 지상 결전을 지도해버린 것이다.





Ⅳ. 끝으로


해군이 피해 정보를 육군에게 전달한 것에 대해 조사한 결과, 통설과는 달리 거의 완전한 정보전달이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즉 '육군에게 해군의 정보가 전달되지 않고, 해군에게 육군의 정보가 전달 되지 않는다' 는 설은 명확히 부정된 것이다. 육군의 작전이 실패한 것에 대한 이유로서 해군으로부터의 정보가 전달 되지 않았다던가, 육해군간 연락이 불충분했기 때문이라는 육군 출신자의 경험담도 명확히 부정되엇다.


그렇다면 어째서 해군이 정확한 정보를 육군에 전달하지 않았다고 육군의 중견 장교는 생각한 것인가. 그것에 대해서도 육군 상층부는 해군으로부터의 정보를 강력히 통제하여 육군군인에게 정확한 정보 제공을 실시하지 않았던 것이 판명되었다. 즉 육군군인이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한 이유는 실제로 육군상층부에 의한 정보통제에 의한 것이었지만, 이것을 해군에 의한 정보통제의 결과라고 생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