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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링크 글에서 관련 내용 가져온 것
1937년 8월 23부터 9월 5일사이에 벌어진 일본군의 상해 적전상륙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서도 성공했다는 세계 전사상 보기 드문 성과를 올립니다. 일단 이 시기를 제 1 기...뭐 편의상 적전상륙 - 오송 크리크 돌파전이라고 하죠, 하지만 상륙한 이후에도 상해 시를 둘러싸고는 엄청난 수의 토치카로 무장된 중국군의 방어선 젝트 라인이 일본군의 눈앞에 있었습니다.
제 1 기가 적전상륙부터 오송 크리크 돌파전이고, 이후 제 2 기 공세는 9월 5일부터 약 10월 10일까지의 약 한달간.... 요 제 2 기 작전이 젝트 라인 돌파전이라볼 수 있습니다.
이때는 참모본부에서 새로 참모들이 일본군에 합류해와 작전을 가다듬는 등 희생을 줄이고자 하는 일본군에선 보기 드문(!) 행동이 나오기도 했고...뭐 하튼 이게 효과가 있었던지 10월 10일에는 제 2차 총공세를 발동, 일본군은 거의 대부분이 젝트 라인을 돌파해 12일까지 중국군 전진호의 종심은 붕괴했습니다. 그리고 10월 26일에는 중국군 방위선의 마지막 요충지인 대장진이 함락되게 되죠. 그리고 아시다시피 이날 이후로 중국군은 난징 방면으로의 무질서한 패주로 빠지게 되어 전선은 완전히 붕괴되었지요.
< 젝트 라인 돌파전 >
폰 젝트가 직접 설계해 통칭 젝트 라인, 혹은 차이니즈 힌덴부르크 라인으로도 불리우던 이 복합 방어진지를 돌파하게 한 참모본부의 입안작전은 분대단위로의 침투였습니다. 당시 2차 총공세에 선봉으로 투입된 제 101 사단은 사실 이른바 특설 사단으로, 도쿄 출신자를 모은 예비역 위주의 사단이었습니다. 당연하지만 이 시기엔 주력인 제 3 사단과 같은 갑종사단(현역 완편사단)은 재편성 중(...) 그러므로 이 제 101 사단이 공세의 선봉에 서게 된 것이었는데 이들의 공격방식은 오송에서의 3사단과는 달랐습니다.
당시, 이들 101사단에는 사전 명령에 의해 제 1 차 세계대전시의 밀집 중장비를 버리고 (당시 일본군뿐만 아니라 전 세계 거의 모든 육군의 표준 군장) 분산/경장비로, 일반 사병들은 군장조차 짊어지지 않고 이른바 간단한 경장비에 탄대와 구급 의료용 도구, 이틀분의 휴대식량을 넣은 간단한 잡낭만을 허리에 찬 상태였죠. 그렇다면 왜 갑자기 참모본부의 참모진이 합류한 상태에서 이런 변경점이 시행되었나?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당시 일본군 참모들이 파악한 중국군의 진지 구축은 독일식인 종심방어로 막강한 화력과 밀도를 자랑했지만 그 방어선의 깊이는 의외로 얇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이 결점을 커버하기 위해선 전략예비대의 적절한 서포트가 반드시 필요했지만 중국군의 총전략 예비대는 300km나 떨어진 난징에 있었기에 교통선이 나빴고 또한 철도마저 양자강가에 주로 밀집되어 있는 등......... 방어내선이 방위상의 관점에서 설계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참모본부의 참모들은 간파했던 것이죠.
*종심방어 (defense in depth) - 적의 전진을 저지 와해시키고 반격을 준비할 목적으로 연속된 선이나 요새에 의거하여 계획한 방어체계
이에 따라 참모진은 공세 발동시, 병력을 전선에 투입할때의 방식을 상해 적전상륙시 막대한 피해를 낸 밀집 돌격대형에서 산형(산개) 분대 돌격법으로 부대투입 방식을 바꿨는데, 이것이 주효해 이후 상해 전역에서는 끝까지 일본군의 전진 스피드가 중국군의 예비대 투입을 상회할수 있었습니다. 이때문에 중국군의 전략 예비대는 그때까지도 총병력 40만 이상의 대병력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효과적으로 전장에 도착할 수 없었으며 일례로 당시 중국군 상해 방위군의 소수의 정예사단은 기계화되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로사정이 나빴기에 상해-난징간 300 km를 투입할 때는 20시간이나 필요로 했습니다.
또한 제공권의 우위에 의해 중국군의 움직임도 꽤 면밀히 파악되고 있었기에 일본군의 침투방법도 이전의 전투에선 예를 찾아볼수 없을만큼 특이한 것이었습니다. 일본군 포병의 공세 예비 사격은 적 방위선의 전면이 아니라 후방의 물자창고 및 예비대의 밀집지점부터 시작하고 있었는데, 이후의 준비 사격(보병 엄호사격)이 선봉대가 목표로 하는 전면의 적에게 집중되었으며 그 사거리를 축차 전진시키는 방식이었습니다. - 즉 통상적인 포격지원과는 순서가 역 -
이런 사격법은 상세한 적정 파악과 더불어 포병의 대단한 숙련도를 요구했지만 사실 이후 태평양 전쟁시에도 일본육군 포병대의 질은 꽤 우수한쪽에 속했기에 중국군은 철퇴하는 순간까지도 항상 머리위에 포탄이 작렬한다는 착각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준비포격의 최대 장점은 중국군에 있어서는 공격 개시라고 생각하는 순간에 이미 일본군은 침투하고 있다는 기습 효과를 발휘했죠. 이 결과 앞서 함락시킨 대장진의 중심부는 오히려 거의 포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후 참모본부의 발표는 상해 전면에서만 중국군 전사자는 8만명을 넘는다고 발표(드물게 반대로(?)나타난 경우인데 곧이어 국민당 정부는 상해 방위군 전사 25만명(!)을 발표했습니다. 이것은 중국군의 철퇴가 도보로 행해져 이후의 일본군에게 추적/포착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뭐, 젝트 라인과 오송 크리크를 맹신한 중국군은 당연 철퇴 방법에 대해선 사전에 고려하고 있지 않았을 것이겠지요..........이 숫자는 사실상 전멸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중국군의 방어작전은 전선부대의 전투서열을 그대로 반으로 나누어 절반을 로컬의 예비대로 배치, 종심방어선을 유지한채 공세 방어로 임한다는 작전이었는데 이 계획에 따라 중국군은 난징-상해간에 75만명 53개 사단을 집중시켰습니다. 하지만 중국군의 전략예비대 편성은 타격병력에 역점이 놓여져 교통선의 유지를 위한 병력에는 별다른 배려가 이뤄지지 않았으며 또한 사단 편제가 세계 표준과는 너무 달라 보충병이 자주 독자 행동에 빠지는 등 병력운용에 결함이 있었습니다. 또한 포병이나 병참병, 통신병, 공병, 위생병, 수색대등이 사단에 속하지 않고 군(중국군 편제상은 로군, 흔히 말하는 팔로군도 이런 분류법의 하나죠.) 직할로 여겨졌기 때문에 병참이나 특수 군사행동(가교 등)에도 결함을 드러냈습니다.
이때문에 중국군은 임시 조치로 민간인을 징발한 치중부대를 편성했지만 전술한대로 방어선이 돌파/포착되었기 때문에 전장화된 이 지역에선 수만명이 군인 또는 군속으로 오인되어 사망했는데 오송 크리크에도 상당수의 민간인 사체가 뒤섞인것은 이때문이라는 설도 있습니다.(일본측 주장) 사실 이것은 제 1차 상해사변 때 중국군 제 19로군이 이런 민간인 지원자를 더한 것과 같은 수단을 취한 것이지만 이후에는 더욱 참혹한 결과가 되어 버린 것이었지요....뭐, 하튼 전선의 33만 병력이 붕괴하자 남경, 소주(蘇州)-강음(江陰)선에 전개되어 있던 중국군은 총예비대를 포함해 완패로 몰린다는 것은 참모본부의 판단대로 현실이 되었습니다.
여담인데 병참병에게 특화된 훈련이 필요하고, 특히 포탄이나 포의 수송에는 전문지식이 필요합니다. 중국군 사단의 충족인원이 1만명 안팎인 것은 이들 주특기병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공산군도 마찬가지였고 훗날의 한국전쟁시 항미원조 인민지원군으로 편성된 중공군의 경우엔 1개 사단 3,000명을 밑도는 경우도 있어서 사단 단위로의 기동에는 치명적 결함을 드러냈죠.
< 일본군의 침투전술 >
이 상해에서 벌어진 전투는 결코 소규모의 전투가 아니었습니다. 전선에 투입된 병력 총수는 양군 합쳐 백만명에 가까운 숫자였고 공격군의 병력이 더 적었으며, 그 당사자인 일본군은 적지에서 싸웠습니다. 제 1차 대전의 전훈으로 되돌아볼작시면 공격측이 필패인 그런 케이스였죠, 그런데 결과는 역이었습니다.....왜였을까요? 그 이유중 하나라면 이때의 일본군은 브루실로프 전역의 교훈에서 발단한 근대적 침투 전술을 잘 적용해 산형 분대 돌격법을 2차 공세 이후의 공격 운용방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방식은 경기관총을 중심으로한 10명 정도의 분대를 돌격부대의 기본으로 삼아 전선의 다방면을 돌파하는 전법입니다. 이 방식은 사실 나폴레옹 전쟁시부터 발전한 산병전술의 발전형으로 분대의 자유의지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도 특징입니다. 하지만.....당시로써는 낮설었던 이 방식은 분대(=돌격대)에게 대단한 부담이 가는 점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당시 상해-남경간의 전투에서 일본군은 약 2만명 이상의 전사자를 내고 있었고 이것은 앞의 사례에서 봐도 피할 수 없는 손실이었지요. 하지만 잘 구축된 참호 종심진지에 은거한 30만명을 넘는 중국군에 대해 정면 공세로 나왔을 사례에 비해선 가벼운 손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겠지요. 이 전투에 관해선 참모본부에서 파견된 참모조차도 대단한 고전이었다는 평이 대다수인데, 이만큼의 대군을 상대로 승리를 이끌어난 전술로 비춰볼 때 적어도 당시 일본 참모본부의 적전상륙 이후 적정판단과 전술 구사능력은 상당했다고 평가해야 하겠습니다.
일본 육군 참모본부는 이 침투전술을 육탄공격이라고 명명했습니다. 가혹한 네이밍이었지만 사실상 그 이름대로 분대 단위에게 개별적인 공격목표의 확인을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도 사실이었죠.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일본 육군의 대륙작전에 대한 평은 민간인 학살 외에도 무차별로 민가를 파괴했다는 비난이 많습니다만 전장인 이상, 적지에서 싸우는 병사에게 있어 시야에 있는 장애물은 구축하는 이외에 어떤 방법이 있는 것일까요?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입니다만 이 전술은 적의 종심방어선상에는 민간인 또는 그 사유재산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전제로 성립되고 있습니다. 어쨌든 소대장, 또는 분대장의 지휘로 전선의 전면에 있는 것을 모두 파괴하면서 갈 수밖에 없는 것이었지요. 시야는 맨눈의 시력과 소총 사정거리로 약 500미터일 것이겠고, 적어도 이 범위에서는 후방의 지휘관도 전방부대에게 제한을 가할 수 없으며 또한 산병전술의 기본인 자유 의지는 이러한 제한을 부과하지 않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물론 이것의 후유증도 심각했습니다. 일본육군의 경우는 중일전쟁이 수렁에 빠지면서 민간인 학살이나 군기 문란행위가 벌어져 아직까지도 세계에 수치가 되고 있으며 1차 세계대전시 독일 육군도 돌격대를 지원자로부터 선발했지만 전후 이 부대의 대원들이 가장 사회와의 부적응을 일으켰거든요. 전후 혼란기 스파르타쿠스단에 대항한 프라이코르프스(Freikorps/자유군단) 등 무장 반공 의용단의 중축을 이루었던 것도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뭔예비대를ㅋㅋㅋㅋ
제공권과 제해권에서 압도적 우위였던 걸 이용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 dc App
해당 우위를 잘 이용한 것도 맞음
저때 당시 중국 해군 전력이나 공군 전력은 진짜 암울한 데 비해 일본군은... - dc App
진짜 중일전쟁의 일본군은 잘 싸운편인데 태평양이랑 만주에서는 ㅋㅋ
그야 아직 쥐어짜낼 무언가가 남아있던 시기니까 일본이 미친샠기라 중일전쟁하고 태평양한거지 일본국력으론 중일전쟁부터가 불가능한상황이였음
침투전술 디테일이 부족해서 아쉽누 뭘 어케 잘해서 요새화된 참호를 돌파했다는건지
국내 커뮤에서는 본문 내용이 그나마 관련 서술이 있는거고
https://www.nids.mod.go.j/p/publication/joint_research/series19/pdf/series19-1-4.pdf
(j/p에서 / 제거) 1차세계 대전 이후 일본육군 보병전술의 변화에 대한건 링크 일본어 논고를 참조하는게 좋을듯.
저것도 일종의 충격보병 운용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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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일본은 러우전 러시아보다는 잘싸운 편이지. 훨씬 넓은 땅도 점령하고 수도도 따고.
넓은땅은 못먹음 도시와 도시사이 아주얇은 철도가 점령지의 사실상 다였다고 봐도 무방함 관리가 아예안되서 - dc App
임무형 전술을 분대까지 적용시킨 셈이네.. 당시 일본군의 전술 역량이 대단하긴 했네.. 물론 상대가 약체였고 제공권을 장악한 점도 도움이 되었겠지만.. 화력 지원은 어땠는지 모르겠네.. 경무장한 분대 단위로 화력 지원없이 미리 구축된 방어진지를 제거하기는 힘들텐데.. 분대 단위의 화력 지원을 어떻게 한 거지? 아니면 화력지원없이 분대 자체의 화력으로만 해결한 건가? 보급은 어떻게 한거지? 병사의 군장에 대한 묘사를 보면 하루 이상의 전투는 힘들어 보이는데.. 설명이 너무 간략해서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네
아쉽게도 국내에서는 해당 내용이 그나마 잘 설명된 축임 ㅋㅋㅋㅋ. 일본군 참전 병사 수기 및 인터뷰나 일본웹에서 검색하면 나오긴 할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