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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강하려 했었네.

1903년은 한국을 두고 러일의 대립이 극심해지던 때였는데, 정부 내에서는 이에 대해 의견이 갈렸음.

이근택 계열은 일본에 맞서 러시아와의 밀월을 추진했던 반면 의정부 관료들은 러시아의 남진을 경계하던 편. 반대로 내장원경 이용익은 스위스식 무장중립론을 제시함.

이를 위해 이용익은 징병제 실시를 강하게 지지했음. 이 와중에 일본 함대가 한국으로 향하고 고쿠라의 12사단이 전시동원훈련을 개시하자 고종, 이근택과 이용익은 엄청난 위기감을 느꼈다 함.

이용익은 태생이 보부상 출신이라 당시 상무영과 상무사 쪽에 세력이 강했나본데 징병제 논의가 진척되지 않는 상황에서 급하게 군사력 증강을 추진하면서 우선 보부상들을 끌어들였음.

이때 보부상 대빵 길영수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6만의 보부상단을 40개의 대대로 개편해서 자금을 준비하며 고종에게 관련 허가를 요청했다함

이근택은 이근택대로 부랴부랴 러시아와의 군사동맹을 타전하고 군부대신 자격으로 베베르 주한러시아공사와 밀약 체결을 서두르고 러시아 해군을 통해 해군사관 양성을 추진했음.



출처
1903~1904년 대한제국의 대러시아 대응론과 정책의 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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