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웨이는 '직업인으로서의 군인'이라는 면모를 강하게 드러냈다. 대한민국의 입장에서 가장 아쉬웠던 점은 그가 '미국의 합법적인 정부가 내린 합법적인 명령'에만 유독 집착하고. 그 이상의 싸움에는 전혀 나서지 않으려 했던 점이다.
개성 확보를 위한 전제
개성에 대해 새삼 설명을 늘어놓는다면 군소리가 될 것이다. 이곳은 1950년 6월25일 북한의 김일성이 기습적으로 남침을 벌이기 전 엄연한 대한민국의 땅이었다. 그곳을 지키고 있던 부대도 국군 1사단이었다. 나는 당시 1사단장이었으나 전쟁이 벌어지기 10여일 전 시흥의 보병학교에서 지휘관 교육을 받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따라서 김일성 군대의 공격이 펼쳐질 당시에는 서울에서 시흥으로 출퇴근을 하던 교육생의 신분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곳을 잘 알았다. 전쟁이 발발하기 두 달 여 전인 1950년 4월 23일 1사단장으로 부임해 그곳의 지형을 살핀 뒤 나름대로 참호를 파서 주(主)저항선을 설정하는 작업에 몰두했기 때문이었다.
국군 1사단이 맡았던 전선은 너무 넓었다. 개성의 북방으로 90㎞에 이르는 전면(前面)을 담당해야 했다. 1만 여명이 조금 넘는 사단 병력으로 지키기에는 턱없이 넓었다. 따라서 나는 그 때 임진강 유역의 파평산을 주저항선으로 설정해 그곳에 긴 참호 진지를 구축했다. 만약 전쟁이 벌어지면 개성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김일성의 군대는 그런 약점을 잘 알고 남침을 벌여왔다. 그들은 개성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철도의 폐선(廢線)을 복구해 기습적으로 열차에 병력을 태워 시내로 순식간에 몰아닥쳤다. 개성은 전선 전면이 너무 넓은 까닭에 적의 침투가 매우 용이했던 까닭이다.
그 개성을 대한민국이 강력하게 확보하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하나 있었다. 우선 개성의 서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예성강을 손에 넣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우선 이곳을 방어 전선으로 설정해 진지를 확보한 다음, 개성 북방 4~5㎞에 있는 송악산 일대의 산악 지형에 방어선을 구축하면 개성을 지킬 수 있다.
이 예성강에 관한 논의가 있었던 때는 1951년 7월이었다. 나는 당시 한국의 휴전회담 첫 대표 자격으로 개성의 내봉장(來鳳莊)이란 곳에서 벌어지는 회담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회담을 공개적으로 반대하면서도, 이 예성강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매우 예민하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나는 이 문제를 리지웨이와 논의한 적이 있다. 그는 당시 앞서 벌어진 중공군 춘계 공세를 막아낸 뒤 승진해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있었다. 휴전회담이 벌어지면서 그는 현장에 자주 왔다. 그는 총사령관의 신분 때문에 개성으로 가지는 않았다. 대신 우리 대표진이 머물고 있던 지금의 판문점 남쪽 자유마을을 자주 찾았다.
나는 리지웨이에게 “개성을 모두 내준다면 서울의 한강은 죽은 강으로 변한다. 반드시 예성강까지 진출해 개성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럴 때마다 리지웨이의 답은 한결 같았다. 그는 “나는 그런 제안을 반대한다. 교량과 보급의 문제 등이 있어서 예성강까지 진출하는 것은 절대 반대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미국 의중에는 없었던 예성강
이 문제에 관해서 나는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사전에 지시를 받은 적이 없다. 우리 군대의 전략적 입장에서 볼 때 개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군사적으로 먼저 예성강에 진출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의중은 내가 휴전회담 대표로 있다가 떠난 뒤 후임으로 회담에 나섰던 이형근 장군을 통해서 미국 측에 전해졌다.
지역 바다를 누빌 수 있었다. 그리고 압도적인 화력으로 미 해군은 적진을 유린할 수 있었다. 공산진영의 주력이었던 중공군은 중동부 전선에 묶여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개성의 상징적인 의미에 매우 집착했던 듯하다. 대통령은 회담에 나선 이형근 대표를 통해 그런 의중을 미국 측에 여러 차례 전달했으나, 돌아오는 답은 모두 같았다고 한다. 리지웨이는 예성강 진출을 아예 생각지도 않았고, 한국 측이 문제를 제기할 때마다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미국의 분위기는 제한적인 전쟁을 펼치다가 휴전을 맺는 방향으로 이미 변해 있었다. 이 문제에 관한 전략적 토의는 미국의 합동참모본부(합참)가 진행한다. 군사적 판단을 내려 미 행정부의 재가를 얻어 집행하는 절차였다. 따라서 합참이 긍정적인 판단을 내리면 예성강까지의 진출이 불가능하지는 않았다. 그 미국의 합참을 이끌었던 사람이 바로 로튼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이었다.
리지웨이는 그런 합참의 결정에 100% 복종하는 스타일의 지휘관이었다. 그가 어떤 어려운 일을 결정할 때마다 입에 올리는 “합법적인 미합중국 정부의 합법적인 명령에 따라…” 식의 사고와 행동은 여기서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는 미국 정부, 나아가 그의 상관이 버티고 있는 미 합참의 의견에 매우 충실하게 따르며, 그 점에서는 한 치의 오차도 보이지 않는 충실한 미국 군대의 장성이었다.
리지웨이는 분명히 뛰어난 지휘관이었다. 그는 한국 전선에 부임한 뒤 전선에 서서 날카로운 판단력과 과감한 공격력을 구사했다. 중공군의 공세에 맥없이 밀려난 유엔군의 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미국 합참은 당시 상황이 너무 비관적이어서 유엔군 철수를 위해 함정을 준비하도록 지시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 전세를 극적으로 반전시키며 지평리 전투를 이끌어낸 주역이 리지웨이다. 중공군 참전으로 다시 서울을 내주고 절망의 분위기에 젖어있던 대한민국의 입장에서도 아주 고마운 존재였다. 그러나 리지웨이는 거기까지였다. 그는 미 합참의 지시에 충실해 매우 제한적인 범위에서 한반도의 전쟁을 관리하는 역할에만 몰두했다.
리지웨이는 4개월 뒤 도쿄의 유엔군 총사령관으로 승진해 자리를 옮겼고, 그 뒤를 이어 미 8군을 맡은 사람이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이었다. 그에 관해서는 나중에 다시 자세히 소개를 하겠지만, 그는 가장 어려운 때의 대한민국에 나타나 한국 군대의 성장에 가장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금강산 확보 계획도 물거품
그가 부임했을 때 나는 삼척에서 국군 1군단을 이끌고 있었다. 중공군 공세가 또 있었고, 밴 플리트는 단호한 지휘력으로 그를 막아냈다. 그 직후였다. 1951년 5월 말 경으로 기억한다. 그가 내게 작전명령서를 하나 보냈다. 국군 1군단으로 하여금 고저(庫底)를 공격토록 하는 내용이었다. 강원도 통천군 고저는 옛 조선 시절 이곳 북쪽에 큰 창고가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동해의 연안 지역에는 주력으로 치부할 수 없는 중공군 병력과 개전 초기 거의 무너져 전투력이 크게 떨어진 북한군만이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동부 전선을 마음껏 북상시켜 적을 압박하는 일이 필요했다. 이 점은 북한군은 물론 중공군 수뇌부도 매우 두려워하던 일이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그런 이유로 전선 북상에 커다란 관심을 보였고, 고저 공격 계획은 그가 나름대로 앞뒤 사정을 세심하게 고려한 뒤 만들었다. 그럼에도 우선 그 앞을 막아섰던 사람이 리지웨이였다. 좀처럼 자신의 상관 이야기를 하지 않는 밴 플리트였지만 고저 공격이 좌절하자 아주 커다란 불만을 쏟아냈다.
나와는 가장 사이가 가까운 미 지휘관이 밴 플리트였다. 그는 나중에 고저 작전이 중도에서 취소됐던 일을 이야기할 때마다 분노를 표출했다. 웨스트포인트 후배이자 당시로서는 유엔군 총사령관으로서 자신의 상관이었던 리지웨이를 향해서였다.
출처: 백선엽의 6.25.징비록-軍은 어떤 존재인가 1권, 백선엽 저, 유광종 정리, 책밭, 2016년, 166~172쪽
개인적으로 리지웨이 싫어하는 이유. 명장은 맞지만 이분 때문에 서울이 너무 최전방이랑 가까워졌음.
리지웨이 이름도 중국스러윤데 중국인임?퓨ㅠㅠㅠㅠㅠㅠ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