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전쟁 동안 가족들을 찾아보려 시도하셨나요? 델랴티츠키라는 성은 대단히 희귀했을텐데요.
1944년 중순까지 저는 그런 시도를 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우크라이나에 동생 4명이 있었지만 저는 정확한 주소도 몰랐고 독일군 점령지역이라 알아볼 수도 없었습니다. 1944년 병사들 일부가 탈환한 지역에 사는 가족들에 대해 알아봐달라고 지역위원회에 청원을 냈습니다.
저도 니콜라예프 시 행정위원회에 청원했지만 답장은 없었습니다. 사령부에서 근무하던 로자 플라토노바는 저를 도와주기로 했고, 대규모 소개가 이루어진 바르나울, 노보시비르슼, 부루구슬란, 쿠이비셰프, 스베들로프스크, 심지어 카자흐스탄까지 편지를 보냈습니다.
자세한 상황은 40년 뒤 칼리닌그라드에서의 참전용사 모임에서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제가 쾨니히스베르크 근처에서 전사했다고 어머니에게 보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돌아가는 상황을 몰랐습니다. 1945년 가을 병원에서는 장애인이 된 저를 어딘가로 보내야 했습니다. 그들은 제 고향인 니콜라예프로 저를 보냈고, 다행히 거기 계시던 어머니를 만났습니다.
사촌이던 표트르 르보비치 델랴티츠키는 북방함대 수병으로 2번 부상당했으며 전쟁 후에 무르만스크에서 살았습니다.
사촌 페트르는 보병으로 2번 부상당했지만 살아남았습니다.
대전차포 소대장 미하일 르보비치 델랴티츠키는 3번 부상당했습니다.
전차병 알렉산드르 다비도비치 델랴티츠키는 1942년 전사했습니다.
야코프 다비도비치 델랴티츠키는 1943년 드네프르 도하 도중 전사했습니다.
벨라 델랴티츠카야는 의무병으로 스탈린그라드에서 전사했습니다.
블라디미르 델랴티츠키는 장갑수송차량 차장으로 살아남았습니다.
보리스 델랴티츠키는 1941년 모스크바에서 전사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오랫동안 살아왔습니다.
사촌 그리고리 날레보는 포병으로 전선에서 다리를 잃었습니다. 그의 동생 야샤는 1943년 봄 전투기가 격추되어 전사했습니다.
많은 친척들을 잃었습니다...
1941년, 14세에 나이를 속이고 소련군에 입대했던 델랴티츠키 페트르 아르놀도비치의 인터뷰 내용 중
본인 포함 독소전에 참전한 11명 중 5명 전사, 4명 전쟁 중 부상 (모두 2번 이상), 1명 무사히 전역
아르놀도비치는 1941년 리브네-루츠크 전투부터, 모스크바, 1942년 르제프, 보로네시, 스탈린그라드, 1943년 쿠르스크, 1944년 벨라루스, 1945년 동프로이센 전투에 참전함.
전쟁 중 총 4번의 부상을 입었고, 마지막으로 당한 부상은 1945년 4월 동프로이센 전투 중 포격으로 인해 파편 6개가 머리에 박혔지만 생존함.
Q: 마지막 전투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나요?
1945년 4월 우리 여단은 쾨니히스베르크를 지나 바다로 진격했습니다. 스투드베커조차 진흙탕에 빠지면 나올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거의 차량화 자산이 남아있지 않았고 우리는 전차 뒤를 따라 걸어다니고 있었습니다. 진흙은 허리까지 빠졌습니다.
포격이 시작되었고 장례팀은 진흙 속에 빠진 시체들을 끌어내느라 고생했습니다. 저는 정신을 잃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의무대대에 있었습니다. 파편 6개가 머리에 박혔고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습니다.저는 Po-2에 실려 후방의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고리키까지는 응급열차를 타고 도착했습니다. 의사들은 제 붕대를 갈아주며 ‘뇌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보라고’라고 말했습니다.
다리와 왼팔은 움직이지 않았고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저는 숟가락질을 하고 다시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을에는 살점을 떼어내 머리의 상처에 덮는 수술을 했습니다. 저는 퇴원해 집으로 보내졌지만,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죽고 싶어졌습니다.
누가 이렇게 된 저를 원하겠습니까? 누군가의 인생에 짐으로 살아야 할까요? 이렇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Q: 그 뒤로는 어떻게 생활하셨나요?
오데사까지 혼자 갔습니다. 부목을 짚고 루자노브카로, 니콜라예프로 가는데 도중에 차가 하나 섰습니다. 술에 취한 수병 둘이 타고 있었는데, 저는 그들에게 태워달라고 했습니다. ‘1000루블을 주면, 태워주지’ 전역하기 전에 저는 중사 6개월 봉급을 받았고, 달에 375루블씩이었으니 지불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저를 니콜라예프로 들어가는 다리 앞에서 내려주었습니다. 저는 트럭에서 내렸고, 길 너머에서 한 여자가 걸어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엄마!” 어머니는 듣지 못하셨고 저는 다시 “엄마!” 그녀는 이쪽으로 뛰어오려고 멈칫거렸지만 너무 충격이 컸는지 움직이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서로 끌어안고 눈물을 터뜨렸습니다. 우리 집은 남아있었고 가족들의 생사도 알 수 있었습니다. 전쟁 첫날 폭격으로 집이 무너지면서 1살짜리 여동생 밀라와 4살짜리 남동생 슈리크는 죽었습니다.
독일군이 들어왔고 어머니는 크라스노다르를 거쳐 스베들로프스크까지 도망치셨다가 1944년 말에야 니콜라예프로 돌아오셨습니다. 아버지는 북극권에서 복무중이셨고 대좌까지 진급하셨습니다.
장애연금은 고작 달에 120루블이었고, 그 정도면 3일을 버틸 수 있었습니다. 1947년에 저는 오데사 전자기술대학 무전공학과에 들어갔고 졸업한 다음 박사학위까지 땄습니다. 어쨌든 당신은 전쟁 후의 생활에 대해 물어보러 온 것은 아니니,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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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독소전
기사양반은 뭔 한달치 생활비를 요구하네 - dc App
무섭고 슬프다
무섭지만 몸도 가누기 힘들 정도로 부상당해도 대학 졸업해서 박사학위까지 딴거는 더 대단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