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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콧 장군이 이끌었던 미군의 진격로.


스콧 장군이 베라 크루스에서 가지고 있던 병력은 1만 2천보다 적었다. 행정부가 스콧 장군에게 약속했던 병력은, 최소한 스콧 장군의 주장으로는 그보다 훨씬 컸으며, 그리고 스콧 장군은 항상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었다. 1만 2천의 군대는, 적국의 영토 안쪽으로 260마일을 돌파하여, 그 당시 인구가 10만을 크게 넘어갔던 도시였던 적의 수도를 포위하기에는 한참 작은 군대였다. 게다가 그때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경로는 모두 방어하기 쉬운 산길을 지나갔다. 사실 당시 존재하던 베라 크루스에서 멕시코 시티로 가는 길 중 군대가 택할 수 있는 것은 단 두개 뿐이었다. 하나는 할라파와 페로테를 거쳤고, 다른 하나는 코르도바와 오리자바를 거쳤는데, 두 길은 산맥을 넘고 나면 멕시코 시티로 이어지는 대평원에서 만나게 되어 있었다.


  매년 초반마다 도시에 창궐하는, 적응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매우 치명적인 황열병, 또는 보미토를 피하려면, 군이 최대한 빨리 베라 크루스를 벗어나도록 하는 것도 아주 중요했다. 그러나 북쪽에서 오기로 예정된 수송수단은 너무 느리게 도착하고 있었다. 내륙으로 65마일 거리이며, 해안가의 황열병이 존재하지 않는 할라파로 군에게 보급을 하려면, 충분한 수송수단을 갖추는 것은 반드시 필요했다. 그 지점부터는 땅이 비옥했기에, 스콧 장군이 이끄는 크기의 군이라면 평생 자급자족이 가능할 것이었다. 아픈 사람, 약한 사람, 점령한 도시와 요새의 주둔군을 제외하자, 이동하는 대열의 크기는 이제 1만 명이 되지 않았다. 이 부대는 총 3개 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각각 트위그스, 패터슨, 워스 장군이 이끌었다. 보미토를 피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해서 사단 하나를 움직이기에 충분한 수송수단이 갖춰지자마자 진격이 개시될 정도였다. 4월 8일, 트위그스 장군의 사단이 할라파로 향했다. 곧바로 패터슨 장군이 사단을 이끌고 뒤따랐다. 워스 장군은 휘하 병사들을 위한 6일 분의 식량, 필수적인 탄약, 야영지와 주둔군 장비를 싣기에 충분한 수송수단이 갖춰지는 대로 뒤를 따라가기로 했다. 이 사단이 베라 크루스를 떠날 즈음, 날짜는 4월 13일이 되어 있었다.


-율리시스 S. 그랜트 회고록 제10장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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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은 약 3월 말 베라크루스를 점령한 이후, 계획대로 멕시코시티를 향해 진격할 준비를 시작합니다. 그렇지만 베라크루스에서 멕시코시티로 향하는 경로는, 무조건 멕시코의 시에라 마드레 오리엔탈 산맥을 넘어가야 했고, 미군이 택한 경로를 따라가면 그 뒤에도 포포카테페틀과 이스타시와틀 화산 인근에 위치한 리오 프리오 산을 넘어야 멕시코시티에 다다를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그랜트 회고록의 언급에 따르면, 덥고 습했던 베라크루스 일대에는 황열병이 풍토병으로 자리잡고 있어서, 병사들이 황열병에 걸려 진격이 불가능해지는 상황을 피하려면 빠르게 베라크루스 일대를 벗어나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힘든 병력 상륙을, 그보다 기술이 부족했던 19세기에 빠르게 진행하기란 어려운 법. 미군은 그리하여 약 2주가 지나 4월 13일 경이 되어서야 전 병력이 베라크루스에서 출발하게 됩니다.


출발한 미군의 목적지는 베라크루스 북서쪽의 도시, 할라파였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베라크루스 공성전을 진행하던 당시, (부에나 비스타에서 패배하긴 했지만) 산타 안나가 멕시코군을 끌고 내려왔던 상태. 할라파로 향하던 미군은 할라파 동쪽, 세로 고르도(또는 시에라 고르도)에서 산타 안나가 이끄는 멕시코군을 마주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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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 고르도 전투를 그린 판화.



세로 고르도는 할라파 동쪽으로 약 12마일에서 15마일 거리에 있는 곳으로, 산맥의 가장 높은 돌출부 중 하나다. 산타 안나가 이 장소를 선택한 것은, 침공해오는 군대를 상대하기에 제일 쉬운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코르테스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도로는 산맥의 산비탈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나 있었고, 도로가 도는 곳마다 대포가 지키고 있었다. 도로의 양쪽은 깊은 골이었거나, 산이 높게 벽처럼 나 있었다. 도로를 따라가 정면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우회 기동도 똑같이 불가능해 보였다. 지휘하던 사령관이 전장에 도착한 이후, 정면을 공격하지 않고도 적의 방어시설 후면에 다다를 수 있는 길을 찾거나 만들기 위해 정찰대가 보내졌다. 이 정찰은 공병대의 P. G. T. 보레가드, 아이작 I. 스티븐스, Z. B. 타워, G. W. 스미스, 조지 B. 매클렐런, J. G. 포스터 중·소위의 도움을 받아 로버트 E. 리 대위가 지휘하는 아래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모두 우리나라의 통일을 지키기 위한 거대한 충돌 와중, 어느 쪽이었건 높은 계급과 명성을 얻었던 장교들이다. 정찰이 끝나자, 산을 깎고 도로를 만드는 일이 4월 17일까지 이어졌다. 이것은 산타 안나 또는 그의 군대가 알아차리는 일 없이, 그가 이런 일이 불가능할 것이라 생각했던 곳에서 이뤄졌다. 바로 같은 날, 스콧 장군은 18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율리시스 S. 그랜트 회고록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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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라파로 향하는 세로 고르도 일대 또한 똑같이 산맥이 형성되어 있어, 진을 치고 있는 산타 안나의 군대를 상대로 정면 공격을 감행한다면 손 쓸 도리도 없이 패배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윈필드 스콧 장군이 이후 도착하여 내린 결정은, 바로 공병대를 투입하여 우회로를 낼 만한 곳을 찾아 경로를 개척하는 것.


바로 여기서 남북전쟁을 아는 분들이라면 친숙할 이름이 몇몇 등장하는데, 우회로를 찾을 정찰대를 지휘한 사람은 남북전쟁에서 남군의 총사령관에도 오른 로버트 E. 리(당시 대위)였고, 그 휘하에는 남북전쟁 초반 북군 총사령관을 맡았던 조지 B. 매클렐런, 섬터 요새 포격으로 남북전쟁의 첫 포성을 울린 P.G.T 보레가드(또는 보우리가드)와 같이 남북전쟁에서 상당한 요직과 계급을 맡았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쟁에서 양군의 총사령관을 맡았던 사람 둘, 남북전쟁을 시작한 사람 하나가, 같은 임무를 맡고 뛰었던 것이죠!


아주 높은 계급에 올랐거나, 엄청난 중요성을 가진 결정을 내렸던 이 세 사람 외에도 또 언급되는, 아이작 I. 스티븐스, Z. B. 타워, G. W. 스미스, J. G. 포스터 4명 모두 남북전쟁에서 최소한 장군 자리에 올랐을 정도였습니다. 남북전쟁에서 높은 계급을 맡았던 사람들이 모두 이 미멕전쟁에서 첫 경험을 쌓았으니, 그만큼 미멕전쟁은 남북전쟁에 큰 영향을 미친 셈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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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은 명령대로 실시되었는데, 아마 이 전투는 멕시코 전쟁, 아니 그 어떤 전쟁을 놓고 보든, 교전 시작 이전에 내려진 명령이 곧 교전 시작 후에 일어난 일과 제일 일치하는 전투였을 것이다. 도로 오른쪽의 골에는 공병들의 지도 아래 도로가 뚫린 채였는데, 골은 경사가 너무 급해서 병사들도 간신히 오르내릴 수 있었다. 동물은 아예 지나갈 수가 없었다. 도로는 밤 중에 적의 이목을 끌지 않으면서 지어졌었다. 도로를 뚫는 것을 지도한 공병들이 앞서자, 그 뒤를 병력들이 따랐다. 대포는 손으로 직접, 급한 경사를 따라 옮겨졌는데, 옮기는 병사들은 대포의 차축 뒤쪽에 튼튼한 밧줄을 감아, 한 번에 한 개씩 내렸다. 밧줄을 쥐고 있는 병사들은 위쪽에서 천천히 포를 내렸고, 대포 앞에 있던 몇몇은 대포가 내려오는 방향을 조절했다. 거꾸로 올라가는 경사에서도, 대포는 똑같은 방법으로, 손으로 옮겨졌다. 이리하여 스콧 장군의 병사들은 들키는 일 없이, 적 방어시설 대부분의 뒤쪽에 정해진 지점에 도달했다. 공격이 개시되자, 방어시설 너머에 있던 멕시코군 예비대는 급하게 퇴각했고, 방어시설을 지키던 병사들은 항복했다. 좌측에선 필로우 장군의 지휘로 무서운 일이 일어나긴 했으나, 이것으로 전방의 적 일부가 발이 묶여 승리에 기여했을 것임은 분명하다. 나는 있었던 모든 전투의 전체적인 내용을 전하는 것은 아니고, 내가 본 일부분을 전하는 것뿐이다. 양측 모두 다른 지점에서 싸우고 손실을 입었던 병력이 존재하지만, 그래도 전투는 여기서 설명한 대로 승리하게 되었다.


-율리시스 S. 그랜트 회고록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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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남북전쟁 올스타 로스터...의 정찰대가 성공적으로 우회로를 개척한 덕에, 미군은 세로 고르도에서 버티고 있던 멕시코군을 성공적으로 우회했고, 사람만 간신히 지나가며 동물은 아예 못 지나가는 험지를 어떻게든 건너가 멕시코군을 패배시킵니다. 그런 험지에서도 심지어 대포를 낑낑대며 옮겨가 쏴댔다고 하니, 미군 정신력이 엄청났던 모양입니다...


세로 고르도에서 그렇게 멕시코군을 패퇴시킨 미군은 계획대로 할라파로 진격합니다. 그렇지만 할라파 일대의 도로도 여전히 방어자 측에 유리한 지형이었기에, 미군은 멕시코군이 재편성하여 또다시 유리한 위치에서 방어를 시도하기 전, 빠르게 이동하여 산맥을 벗어나는 지점근처인 페로테까지 진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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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로 고르도 전투에서 승리한 후, 승리한 우리 군대는 해안가의 황열병이 닿지 않을 정도로 높은 지역인 동시에, 아름답고, 비옥하고, 살기 좋은 지역에 위치한 할라파로 이동했다. 그러나 할라파는 여전히 산맥 속에 자리잡고 있었고, 거기서 대평원으로 가는 길은 길 전체가 방어하기 쉬웠다. 따라서 적에게 재집결하여 우리 앞에서 요새화를 할 시간을 주지 않으면서, 해안가와 멕시코 수도 사이의 큰 고속도로가 산맥을 벗어나는 지점까지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리하여 이 승리의 결과를 확실히 할 수 있도록, 워스 장군의 사단이 선택받아 앞으로 전진했다. 장군의 사단은 산맥에서 도로가 빠져나오는 지점과 멀지 않은, 대평원에 위치한 페로테라는 곳까지 행군했다. 이 마을의 전방에는 페로테 성이라 불리는, 평원에 자리잡은 낮고 강력한 요새가 있었다. 그렇지만 이 요새는 저항하지 않았고, 그렇게 요새는 그 무기와 함께 우리 손에 떨어졌다.


-율리시스 S. 그랜트 회고록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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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향한 페로테에는 요새가 존재했지만, 산타 안나의 군대가 없는 상황에서 미군을 상대로 버티는 것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저항 없이 미군에게 항복합니다. 미군은 페로테를 점령한 이후에는 멕시코시티 동쪽의 두 화산과, 방금 미군이 넘어온 산맥 사이의 분지 지역에 위치한 도시, 푸에블라로 진격합니다.


참고로 이 시점에서, 미군은 어떤 일 때문에 베라크루스에서 출발할 당시 약 1만 명 정도였던 병력이, 그 절반인 5천으로 줄어버리는데, 이는 윈필드 스콧 장군이 자원병들을 모두 미리 제대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랜트의 서술에 따르면, (총력전이었기에 국가가 원하는 만큼 군에 남아야 했던 남북전쟁 또는 그 이후의 전쟁과는 다르게) 미멕전쟁의 미군 병사들 중 자원병으로서 참가한 병력은, (보통 1년 정도인) 복무기간을 채우면 전쟁 중에도 전선을 떠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페로테를 점령한 시점에서 이 자원병 병사들의 복무기간이 끝나가고 있었고, 이들이 복무를 완전히 마칠 때까지 묶어둔다면 자원병들은 (앞에서 언급한) 황열병이 유행하는 시기에 베라크루스를 거쳐 돌아가야 했습니다. 때문에 윈필드 스콧 장군은 이들을 미리 제대시키기로 결정했고, 이들을 제외한 5천의 병력만이 멕시코에 남게 됩니다.


이렇게 멕시코에 남은 미군은 푸에블라를 점령한 이후, 약 3개월 동안 푸에블라에서 머무르다, 8월 초반 마침내 증원이 도착하자 최종 목적지인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를 향해 진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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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초, 워스 장군은 자기 사단과 함께 페로테를 떠나 푸에블라로 진군했다. 도로는 넓었고, 지역은 도로가 지나가는, 남쪽에서 시작되는 툭 튀어나온 몇몇 산들을 지나는 산길 부분을 제외하면, 탁 트인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은 부대는 2개로 나뉘어 1일 간격을 두고 움직였다. 행군 중에는 특별한 일은 없었는데, 아모조크 - 푸에블라의 동쪽으로 느긋하게 하루 행군하면 닿을 거리에 있는 곳 - 에 있을 동안, 우리 우측으로 2천에서 3천 명 병력의 적 기병대가 1마일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발견되었던 일이 전부였다. 이들을 상대하러 1개에서 2개 정도의 포대와 둘에서 세 개 보병 연대가 보내졌고, 적은 얼마 안 가 사라졌다. 우리는 5월 15일 푸에블라 시에 입성했다. (중략)


행정부가 요청한 대로 병력을 모집하는 데 의회의 허가를 받는 것은, 오랜 시간이 걸렸다. 1846년부터 1847년까지의 회기 초반, 이미 의회에는 전쟁에 투입할 10개 연대를 추가로 창설하여 정규군에 배속하는 것을 인가하는 법안이 상정됐었으나, 실제로 통과되어 법이 된 것은 2월 중반이 넘어서였다. 그런 다음에도 장교들을 임명하고, 병사를 모집하고, 연대를 무장시킨 다음, 이들 전부를 멕시코까지 수송해야 했다. 스콧 장군이 진격하기에 충분할 만큼의 증원을 받았을 때는 이미 8월이었다. 이때도 1만 명을 넘지 못했던 스콧 장군의 대열은, 각각 트위그스, 워스, 필로우, 퀴트먼 장군의 지휘를 받는 4개의 사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니 장군이 지휘하는 기병대도 있었는데, 기병대는 제1, 제2, 제3용기병연대의 분견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진격은 트위그스 장군의 사단을 선두로 8월 7일 시작되었다. 나머지 3개 사단은 각각 1일 치의 간격을 두고 이를 따랐다. 공격을 당할 경우 빠르게 병력을 집중시킬 수 있도록 행군은 짧게짧게 이뤄졌다.


-율리시스 S. 그랜트 회고록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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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군갤에 올린 것 말고도 다른 미리보기가 여럿 있슴니다

보고 싶으신 분은 블로그 참조하시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