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멕전쟁) 미군의 멕시코 심장부 침공(2): 세로 고르도 ~ 푸에블라
안녕 군갤
담글이 이 정보글 시리즈 마지막이야
조금이나마 재밌게 봤다면 조켔고
관심이 생겼다면 보닌 블로그 한번만 참고해조...
그나저나 전쟁얘기라 그런지 군갤이 제일관심많았던거가틈ㅎㅎ
나중에 2부 번역하면서 남북전쟁 파트도 번역 나오면 가져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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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멕전쟁 당시의 멕시코시티 지도. 미군의 진격로를 붉은 색으로 강조한 버전입니다.
푸에블라에서 멕시코 시티까지 우리 군대가 따라간 경로는 리오 프리오 산을 지났는데, 그 산을 지나는 도로는, 제일 높은 곳에서는 바다보다 약 1만 1천 피트 높은 높이에 있었다. 그런 만큼 이 산을 지나가는 산길은 쉽게 방어할 수도 있는 곳이었지만, 방어는 없었고, 선두의 사단은 푸에블라를 나선 지 3일 만에 그 산의 정상에 도달했다. 멕시코 시티는 리오 프리오 서쪽의 평야, 서쪽으로 6마일 더 나가면 또다른 산을 등지며, 북쪽과 남쪽으로는 그보다 가까운 거리에 다른 산들이 있는 평야에 위치하고 있었다. 리오 프리오 서쪽의 기지와 멕시코 시티 사이에는 3개의 호수가 있었는데, 도로 왼쪽으로 찰코 호수와 소치밀코 호수가, 오른쪽으로 텍스코코 호수가 있어, 멕시코 시티의 동쪽 끝까지 이어져 있었다. 찰코와 텍스코코는 도시로 향하는 도로가 놓인, 좁고 가느다란 육지로 분리되어 있었다. 소치밀코도 도로의 왼쪽에 위치했으나, 도로와 상당한 거리가 있었고, 찰코 호수와 좁은 수로로 연결되어 있었다. 도로의 우측에는 엘 페뇬이라 불리는 높은 돌 언덕이 있어서, 평평하고 낮은 땅에 홀로 높이 솟은 채 호수를 가르고 있었다. 이 언덕은 아랫 부분과 꼭대기에 방어시설이 구축되어, 직접 공격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율리시스 S. 그랜트 회고록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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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시티로의 진입
페로테에 이어 푸에블라까지 진격한 미군은, 곧장 서쪽으로 직진해 멕시코시티 동쪽에 있는 리오 프리오(정확히는 여러 리오 프리오 산 중 리오 프리오 데 후아레즈, Rio Frio de Juarez)를 넘어 멕시코시티 외곽으로 접근합니다. 여기서도 멕시코군이 방어를 시도한다면 미군이 쉽게 넘어갈 수 없었겠지만, 이번엔 아예 멕시코군의 방어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미군은 금새 산의 정상을 넘어 멕시코시티 일대의 호수(오늘날에는 거의 사라져 지도에서 보기도 힘들지만, 멕시코시티 일대의 호수는 사실 20세기 초까지도 남아 있었습니다)가 보이는 지점에 도달합니다.
리오 프리오 산에선 온데간데 없던 멕시코군도 마침내 보이기 시작해, 멕시코시티 동쪽의 일명 '엘 페뇬(자세한 명칭은 페뇬 데 로스 바뇨스, Peñón de los Baños)'에 방어시설을 구축한 것이 미군 눈에 들어옵니다. 미군이 진입한 지점에서 멕시코시티로 곧장 진입하려면 이곳에 진을 친 멕시코군을 뚫고 지나가야 하지만, 돌산에 틀어박혀 있어 멕시코군을 쉽게 돌파하기는 어려운 상황. 때문에 스콧 장군은 멕시코군을 정면 돌파하는 대신, 정찰대가 찾아낸 우회로를 타고 멕시코시티 남쪽에서 진입하기로 결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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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장군의 군대는 찰코 호수의 동쪽 끝 근처에 있는 아요틀라와 다른 지점 몇가지 지점에 빠르게 집중되었다. 정찰은 엘 페뇬에서 총을 쏘면 닿을 거리까지 진행되었고, 공병들은 찰코 호수 남쪽을 통해 우회하여 도시의 측면, 남쪽과 남서쪽에서 진입할 수 있는 길을 찾아 보았다. 이후 호수 둘레에 길이 하나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고, 8월 18일, 병력은 산 아우구스틴 틀랄팜, 멕시코 수도의 플라자에서 남쪽으로 약 11 마일 떨어진 마을에 입성했다. 산 아우구스틴 틀랄팜과 수도 사이에는 샌 안토니오의 대농장과 추루부스코라는 마을이 있고, 이 두 곳의 남서쪽에는 콘트레라스라는 곳이 있다. 이 네 곳은 아우구스틴 틀랄팜을 제외하면 모두 방비가 된 데다가 강력한 주둔군도 자리잡고 있었다. 콘트레라스가 위치한 곳은, 옆에 산이 솟아 있는 산기슭 근처로, 어지럽게 쌓인 화산암들이 샌 안토니오까지 뻗어 있는 곳이었다. 때문에 남쪽에서 이 곳으로 진입하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내가 배속되었던 여단 — 즉 워스 장군의 사단에 속한, 갈란드 휘하의 여단 — 은, 산 아우구스틴 틀랄팜에서 2마일 또는 3마일 떨어져, 추루부스코와 멕시코 시티로 가는 길에 놓인 샌 안토니오의 방면을 지키도록 보내졌다. 샌 안토니오가 자리잡은 곳은 계곡 안으로 완전히 들어와 있었고, 땅은 호수의 수면보다 약간 높을 뿐이었으며, 남서쪽 방면을 제외하면 물로 채워진 깊은 배수로로 막혀 있었다. 남서쪽으로는 페드레갈 — 즉 앞에서 말했던 화산암 지대 — 이 있어서, 기병이나 포병은 지나갈 수가 없고, 보병도 적과 대면한다면 지나가기 힘들었다. (중략)
만약 남서쪽으로 3마일 정도 떨어진 콘트레라스가 우리 손에 들어온다면, 병력은 거기서 도시와 우리 사이에 적이 차지하고 있는 지점 모두를, 적의 오른쪽 방향으로 우회할 수 있을 테였다. 그리하여 스콧 장군은 추가적인 명령이 있을 때까지 공격하지 말고 적의 정면을 지키고 있을 것을 명령했다.
-율리시스 S. 그랜트 회고록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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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트레라스 전투를 그린 당대의 판화.
콘트레라스 전투
미군은 위 지도의 왼쪽 아래에 있는 산 아우구스틴 틀랄팜에 입성한 이후, 그곳의 바로 북쪽에 있던 샌 안토니오의 멕시코군과 대치하면서, 산 아우구스틴 틀랄팜 북서쪽의 콘트레라스를 통해 멕시코군을 우회할 계획을 세웁니다. 스콧 장군은 샌 안토니오 방면의 멕시코군을 확실히 묶어놓을 수 있도록, 그랜트 당시 소위가 소속되어 있던 갈란드 여단을 보낸 뒤, 공병대로 정찰을 수행한 다음 공격을 준비하기 시작합니다.
콘트레라스 또한 주변의 지형 탓에 공격하기가 어려웠고, 특정 방향에서는 거의 진입 자체가 불가능했으나, 이전의 세로 고르도 전투처럼 미군 공병대가 탁월하게 임무를 수행하며 미군은 콘트레라스에 돌입합니다. 콘트레라스 전투 역시 미군의 승리로 끝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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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8일, 우리가 산 아우구스틴 틀랄팜에 입성하던 바로 그 날, 우리 갈란드 여단은 샌 안토니오에서 전진 배치된 방어시설의 사정거리에 그대로 들어오는 위치를 확보했지만, 병력은 방어 목적이 아니라 다른 목적으로 지어진 인공 둑으로 보호되었다. 그 뒤 스콧 장군은 즉각 공병대에 콘트레라스 인근의 방어시설들을 정찰할 것을 명령했고, 19일에는 그 방어시설들을 차지하고 있는 적군을 강습할 수 있는 위치로 병력 이동이 개시되었다. 북쪽과 북동쪽의 페드레갈과, 남쪽의 산 때문에, 적 방어시설의 양쪽 측면을 통과하는 것은, 방어시설이 정확히 두 천연 장애물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힘들었는데, 그럼에도 19일 낮에서 저녁 동안 도로가 완성되어, 병력은 적의 북쪽과 서쪽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 전투는 세로 고르도 전투처럼, 공병대의 장교들이 탁월한 성과를 보여준 전투였다. 사실 두 경우 모두, 처음에는 힘들어 보였던 임무가 실제로는 임무를 수행한 병사들에게 있어 평범한 곳에서 했을 때보다 더 쉬운 임무가 된 경우였다. 각 지점이 가졌던 바로 그 이점들은, 공병들의 능력 덕분에 강습 부대의 방어물이 되준 동시에, 이들이 마지막 공격을 위해 자리잡았던 위치를 안전하게 해 주었다. 멕시코 분지에서 스콧 장군과 함께 있던 병력들은, 산 아우구스틴 틀랄팜의 퀴트먼 장군의 사단 일부와 샌 안토니오의 (워스 사단 소속) 갈란드 여단을 제외하면, 모두 콘트레라스 전투에 참여했거나, 사령관의 명령을 따라 전투에 참가한 병력을 돕기 위해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강습은 20일 아침 시작되었고, 진격 명령이 내려진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아 콘트레라스는 우리 손에 들어왔다. 동시에 수많은 포로와 무기 및 다른 물건들 또한 우리 차지가 되었다. 이 마지막 강습 중에는 라일리 장군이 이끄는 여단이 자기 자리에서 제일 눈에 띄는 성과를 보였지만, 자원병과 정규병을 가리지 않고 모두들 훌륭하게 싸웠다.
-율리시스 S. 그랜트 회고록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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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루부스코 전투를 그린 당대의 판화.
추루부스코 전투
콘트레라스에서 성공적으로 멕시코군을 밀어낸 미군은 계속 진격했고, 워스 사단 휘하의 클라크 여단은 멕시코시티 남쪽의 강가에 위치한 추루부스코의 교두보를 공격합니다. 그랜트가 소속되어 있었던 갈란드 여단도 전진 명령을 받아 추루부스코 공격에 합류하게 됩니다.
추루부스코 전투는 그랜트의 기록에 따르면 미군이 멕시코 분지에서 겪은 전투 중 제일 참혹한 전투였다고 하는데, 실제로 추루부스코는 강가를 건너는 지점에 바로 놓여 있어 멕시코군도 요충지로 삼았을 것이며, 멕시코군의 후퇴를 차단하려던 제임스 쉴즈(당시 자원병 준장, 이후 남북전쟁에서도 자원하여 참전) 장군과 프랭클린 피어스(역시 자원병 준장, 이후 제14대 미국 대통령으로 재임) 장군의 기동도 강을 넘어가야 했기에 큰 피해를 입었던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가능성 있는 추측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추루부스코 전투에는 또다른 특이한 기록이 존재하는데, 바로 산 패트리시오 대대(또는 영미식 발음으로 세인트 패트릭 대대), 즉 멕시코군 소속 미군 탈영병 부대가 미군과 맞서 싸운 마지막 전투라는 것입니다.
산 패트리시오 부대는 보통 가톨릭계 이민자가 그 구성원이었는데, 이들이 미군을 버리고 멕시코군에 합류한 이유는 미국 내의 가톨릭에 대한 차별과 같은 가톨릭권 국가인 멕시코에 대한 동정심 및 공감대 같은 종교적 이유, 미군 내에서의 학대와 부조리한 대우 같은 차별대우를 비롯해 다양한 이유가 제시되지만, 결과적으로 산 패트리시오 대대는 추루부스코 전투를 마지막으로 대부분이 미군에게 포로로 잡힌 뒤 대부분 처형됩니다. 그러나 일부는 살아남아 멕시코 또는 고향에서 계속 살아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멕시코시티 남쪽에서 연이어 멕시코군을 꺾은 미군은 곧장 멕시코시티로 입성할 수도 있었으나, 스콧 장군과 미국 측 협상 대표자였던 니콜라스 P. 트리스트 두 사람의 생각엔, 멕시코시티가 점령되어 멕시코 정부가 뿔뿔이 흩어진다면 협상을 추진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질 테였기에 타쿠바야까지만 전진한 다음 멕시코의 지도자였던 산타 안나와 협상을 시도합니다. 다만 협상을 추진하며 맺어진 휴전이 연속적으로 어겨지면서, 9월 4일 스콧 장군은 휴전 파기를 선언했고 곧이어 전투가 재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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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장군은 이 당시 도시에 입성하지 않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미합중국 측의 대표로서 멕시코와 평화 조약을 협상할 니콜라스 P. 트리스트 씨가 우리 군과 함께하고 있었고, 동시에 트리스트 씨나 스콧 장군, 아마도 사실은 둘 모두, 조약의 체결은 멕시코 정부는 다 흩어지고 수도는 침략자의 손에 들어간 상태보다 멕시코 정부가 수도를 차지한 상태에서 더 가망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의견이 사실이건 아니었건, 일단 우리는 이 당시에는 아직 도시에 입성하지 않았다. (중략)
양 측 모두 차지한 위치를 강화하거나, 휴전 도중에 증원을 받는 것을 금지하지만, 휴전 동안엔 스콧 장군이 도시에서 보급을 받는 것을 허락하는 조건으로, 휴전 또한 체결되었다.
협상은 즉각 시작되어, 9월 2일까지 트리스트 씨와 멕시코 측에서 임명한 대표 사이에서 격렬하게 계속되었다. (중략) 이 전쟁은 정복전쟁, 그것도 정부의 이익을 위한 전쟁이었기에, 오히려 새로운 주를 수립할 수 있는 영토를 확보하라는 지시를 받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쨌건 간에 멕시코인들은 제시된 조건에 너무나도 분개했고, 휴전의 종결을 알리지도 않은 채 방어 준비를 시작했다. (중략) 9월 4일 즈음, 휴전을 또다시 어겼다는 소식이 스콧 장군에게 전해지자, 스콧 장군은 산타 안나 대통령에게 이 일을 신경 써줄 것을 단호하게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고, 만족스럽지 않은 답변이 돌아오자, 휴전이 끝났음을 선언했다.
-율리시스 S. 그랜트 회고록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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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리노 델 레이 전투를 그린 판화.
차풀테펙 전투를 그린 판화.
몰리노 델 레이와 차풀테펙 전투
휴전이 파기된 이후, 미군은 다시 공격을 재개합니다. 이번에는 멕시코시티 서쪽에 있는 몰리노 델 레이(Molino del Rey, 번역하면 왕의 방앗간)가 목표였는데, 멕시코군이 이 곳을 중요한 장소로 여기고 있어 미군은 이 곳을 멕시코군이 대포 주조소로 사용하고 있다 생각하고 공격을 결정했으나, 실제로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곡물 저장소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어쨌건 미군은 스콧 장군에게 권한을 위임받은 워스 장군의 지휘 아래 몰리노 델 레이를 공격했고, 멕시코군은 패퇴하여 인근의 방어시설이 구축된 차풀테펙(Chapultepec)이라 불리는 언덕으로 후퇴합니다. 그랜트가 보기에는 미군이 곧장 차풀테펙으로 진격할 수 있었지만, 미군은 계속 진격하는 대신, 몰리노 델 레이에서 멈춘 다음 며칠 뒤 필로우 장군의 지휘 아래 차풀테펙을 공격합니다. 몰리노 델 레이와 차풀테펙 전투에서 미군은 상당한 손실을 입은 것으로 회고록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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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장군은 이때 멕시코 시티 남서쪽으로 약 4마일 떨어진, 산 아랫부분에서 시작해 산비탈을 따라 반마일 거리만큼 뻗어 있는 마을인 타쿠바야를 워스 장군 휘하의 사단으로 점유하고 있었다. 여기서 서쪽으로 1마일을 가면, 평야보다 조금 높은 곳에 몰리노 델 레이가 있다. 이 방앗간은 길다란 돌 건물로, 높이는 1층, 길이는 수백 피트에 달했다. 이 시점에서 스콧 장군은 방앗간 일부가 대포 주조에 쓰이는 주조소로 사용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는 오해였음이 나중에 드러났다. 이 건물이 멕시코인들에게 중요한 이유는 건물에 저장된 곡물의 양 때문이었다. 이 건물은 지붕이 평평한데다 외벽을 따라 모래주머니가 쌓여 있어서, 그 옥상은 보병에게 있어 상당히 큰 위협이 되는 방어시설이었다. 또 차풀테펙이라는 언덕은 평야에서 약 300피트 높이까지 솟아 있었는데, 이 언덕은 몰리노 델 레이와 멕시코 시티 서쪽을 직선으로 이으면, 그 직선 거의 정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다. 이 언덕은 그 꼭대기 부분과 돌투성이의 가파른 양 측면이 모두 요새화되어 있었다. (중략)
몰리노 델 레이 전투는 9월 8일 이뤄졌다. 7일 밤, 워스 장군은 휘하의 여단 및 연대 지휘관들을 불러, 참모들을 데리고 자신의 본부로 와서 다음 날을 위한 명령을 받도록 했다. 이 명령은 동이 트기 전 방앗간을 공격할 수 있는 거리까지 이동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공병들이 가능한 최선을 다해 그 장소를 정찰했기에, 접근과 공격 모두를 위한 실제 명령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 필수적인 정보는 모두 확보된 채였다.
8일 아침 동이 틀 때쯤, 몰리노에서 교전할 병력들은 모두 명령받은 위치에 있었다. 방앗간 전방의 땅, 즉 방앗간의 남쪽은, 차풀테펙 꼭대기의 포병과 방앗간의 더 가벼운 대포들이 조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돌격이 실행되었고, 곧 모든 게 끝장이 났다. 워스 장군의 병력은 방앗간의 문이란 문은 전부 열고 진입했고, 적은 차풀테펙으로 급하게 후퇴했다. 이 승리를 곧바로 이어나갔다면, 미군과 멕시코군은 너무나도 가까이 있었던 차풀테펙의 방어선을 넘어갔을 것이고, 그리하여 그곳은 더 큰 손실 없이 우리 손에 들어왔을 것이다. 차풀테펙을 수비하던 이들은 아군을 위험에 빠트리지 않으면서 우리를 쏠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이런 일은 없었고, 5일 후 우리가 8일에 거의 거머쥘 수 있었던 방어시설을 점령하기 위해, 더 많은 소중한 생명이 희생되어야만 했다. (중략)
몰리노 델 레이는 그렇게 이제 점령되었고, 교전에 참여한 병력은 점령한 위치와 건물을 지키기에 충분한 수를 제외하고 타쿠바야의 기지로 돌아갔다. 교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으나, 사상자는 교전한 병력의 수에 비하면 많았다.
11일 밤에는 차풀테펙의 진지를 포격할 수 있는 위치에 포대가 구축되었다. 포격은 12일 아침 일찍 시작되었으나, 이 날에는 포병의 포격을 제외하고는 추가적인 교전은 없었다. 스콧 장군은 차풀테펙의 점령을 필로우 장군에게 맡겼으나, 상세 계획을 필로우 장군에게 위임하지는 않았다. 각각 이 강습에 자원한 병사들 250명으로 구성된 돌격대가 2개 구성되었고, 각각 맥킨지 대위와 케이시 대위의 지휘를 받았다. 강습은 성공적이었으나 손실도 컸다.
-율리시스 S. 그랜트 회고록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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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시티에 입성하는 미군을 그린 판화.
산 코스메와 벨렌 성문 공략, 그리고 도시의 함락
그렇게 차풀테펙까지 함락시킨 미군은, 곧이어 멕시코시티 내부로 진격하기로 결정합니다. 당시에는 멕시코시티로 들어오는 도로 곳곳에 성문(가리타스)이 있었는데, 미군은 이 중 서쪽의 산 코스메와, 남쪽의 벨렌 성문을 공격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랜트 소위는 이때 산 코스메를 공격하는 부대에 있었습니다.
아무튼, 미군은 두 성문 코앞까지 진격하는 데 성공했는데, 미군이 성문 근처까지 진격하여 대치하던 와중이던 9월 13일 밤, 멕시코의 국가 지도자였던 산타 안나가 군대를 이끌고 도시에서 떠납니다. 멕시코시티를 떠난 산타 안나는 미군의 보급선 및 통신선을 끊으려는 시도로, 동쪽으로 가서 미군이 주둔해 있던 푸에블라를 포위하나, 북쪽에서 내려온 조셉 레인(당시 자원병 준장) 장군의 원군에게 패배하며 실패하고 맙니다.
미멕전쟁 발발 몇년 전에는 독재자에 가깝게 지내다 반란으로 쿠바로 쫓겨나고, 미멕전쟁 발발 직후엔 (산타 안나를 이용해 협상을 시도하려던 미국을 속여서) 또다시 멕시코로 돌아와 또다시 멕시코의 지도자가 된 산타 안나가 갑자기 사라지면서, 멕시코시티 의회는 임시적인 휴전을 요청합니다. 스콧 장군은 여기에 응하지는 않았으나 시민의 안전을 보장했으며, 시 의회와 스콧 장군이 대담을 나눈 이후 미군은 조심스럽게 멕시코시티에 입성합니다.
산타 안나와 같이 떠나지 못한 낙오자, 산타 안나가 떠나면서 (미군을 공격하기를 기대하며) 풀어준 수감자들, 그리고 미군에 적대적인 시민들에게 입성하는 미군이 공격당하기는 했지만, 곧 미군에게 진압됩니다. 그렇게 멕시코시티가 미군에게 넘어가며 멕시코시티 전투는 막을 내렸고, 전쟁은 그 뒤로는 미군을 상대로 한 게릴라전과 유격전 수준으로 잦아듭니다. 멕시코시티 함락 약 5개월 후인 1848년 2월에는 과달루페 이달고 조약이 체결되면서 미멕전쟁이 완전히 막을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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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렌을 치는 부대는 퀴트먼 장군, 미시시피 주에서 온 자원병이자, 군 내에서 군인으로도, 남자로도 호감을 사던 그가 이끌었다. 산 코스메를 치는 부대는 워스 장군이 이끌었다. 진격은 차풀테펙이 함락되자 두 송수로 도로를 따라 개시되었다. 나는 산 코스메로 향하는 도로에서 싸웠고, 그 도로에서 있었던 일 대부분을 볼 수 있었다. 적이 발견되자, 우리 병력은 송수로를 떠받치던 아치형 구조물 아래에 숨어 엄폐한 다음 한번에 한 아치를 지나며 진격했다. 진지한 저항은 우리가 탄 도로가 동쪽으로 도로를 향해 난 도로와 만나는 지점, 즉 송수로가 우측으로 꺾이는 지점에서 총으로 쏘면 맞을 거리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없었다. 이곳의 방어에 대해서는 앞부분에서 설명한 바 있다. (중략)
워스 장군 휘하의 부대는 9월 13일 밤을, 산 코스메 성문 근처의 집에서 벨렌으로 이어진 적의 전열과 대치한 채로 보냈다. 내가 같이 있었던 병력은 도시로 이어지는 도로 북쪽의 여러 집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밤중에는 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 이어져 도시로 들어가는 통로를 만드는 데 참여했다. 그날 밤 산타 안나는 — 탈영병을 제외한 — 자기 군대를 데리고 도시를 떠났다. 산타 안나는 이때 도시 내의 갇혀 있는 죄수들을 모두 풀어주었는데, 아마 죄수들이 분명 해가 밝기 전 우리에게 피해를 입히기를 기대하고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산타 안나가 떠난지 몇시간이 지나자, 시 의회는 스콧 장군에게 대표단을 보내, 휴전과 함께 교회 건물, 시민들의 권리, 도시 관리에 대한 시 정부의 주권 보호를 — 마치 요구하듯이 — 요청했다. 스콧 장군은 그런 조건으로 자신을 구속하는 것은 거절했지만, 우리 전선 뒤에 남기로 결정한 이들은 올바르게 행동하는 한 보호하겠다고 보장했다.
퀴트먼 장군은 13일, 자신이 탄 도로를 따라 아주 훌륭하게 진격해서, 그날 밤 퀴트먼 장군의 부대는 워스 장군의 부대가 산 코스메 성문 근처에 자리잡은 것과 거의 마찬가지로 벨렌 성문 근처를 차지하고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스콧 장군과 시 의회 사이의 대담 이후, 아침에 두 부대 모두 조심스럽게 도시에 입성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워스 장군의 부대는 도시 서쪽 끝 근처에 있는 공원인 알라메다에서 멈추기로 했고, 퀴트먼 장군은 플라자로 직행하여 국립궁전을 점령하기로 했다. 이 국립궁전은 도시 동쪽에 위치한 여러 건물의 집합으로, 의회가 회의를 열고, 법정이 열리며, 관공서가 모두 위치해 있는 동시에 대통령이 거주하는, 그러고도 공간이 남아 박물관, 응접실 등이 있는 곳인데, 보통 “몬테주마의 궁전”이라 하면 바로 이 궁전을 이야기한다.
우리 병사들은 도시에 들어서던 와중 석방된 죄수들한테서, 그리고 아마도 탈영병과 적대적인 시민들한테서도 사격을 당했다. 거리는 텅 비어 있었고, 도시는 보이지 않는 이들이 옥상, 창문, 길모퉁이에서 쏘던 것을 제외하면 마치 ‘죽은 자들의 도시’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 사격으로 내 연대의 중령 갈란드 중령이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제4보병연대의 시드니 스미스 중위도 치명적인 부상을 입었다. 시드니 스미스 중위는 며칠 후 사망했고, 그의 죽음으로 인해 나는 중위 계급으로 진급하게 되었다. 나는 1846년 5월 팔로 알토 전투에 소위로서 참가했고, 거기서 16개월이 지나 멕시코 시티에 입성할 때도 같은 계급으로 입성했는데, 그 사이 나는 한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전투 모두를, 그것도 잃은 장교의 수가 어느 한 전투에 투입된 장교의 수보다 많았던 연대에서 겪은 채였다. 내 연대는 멕시코 전쟁 중 증기선 폭발로만 4명의 장교를 잃었었다. 이들은 모두 내 선임이었다. 멕시코군은 딱히 계급을 차별하지는 않았는데, 가끔은 내 후임 장교들을 쏘아 죽이기도 했다.
스콧 장군은 위엄있게 차려입은 채 이내 두 부대를 따라 도시로 입성했다. 스콧 장군도 사격을 당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렇지는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어쨌건 장군이 다치지는 않았으니 말이다. 스콧 장군은 먼저 “몬테주마의 궁전”에 숙소를 차리고는, 거기서 정복된 도시의 정부를 위해,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석방된 죄수들의 적대적 행위 또한 진압하기 위해 현명하고 사려깊은 명령을 공표했다. 이 명령은 죄수들을 돕는 자는 누구든 존중하지 않겠다는 명령이었다. 곧 무법 상태는 진압되었고, 멕시코 시티는 조용하고, 법이 지켜지는 곳으로 변했다. 사람들은 침략자에 대한 두려움 없이 거리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직후 우리 병력의 대부분은 도시로부터 남쪽과 남서쪽으로 4마일 또는 5마일 거리 산들의 산기슭에 있는 마을로 보내졌다.
-율리시스 S. 그랜트 회고록 중.
멕시코시티가 물이많긴해
멕시코시티에서 멕을 빼면??? 시코시티 wwwwwwwwwwwwww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