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계획 / PFG-1 유도탄호위함 개발사업


(1). 시작은 창대하였으나


출처: http://www.mdc.idv.tw/mdc/navy/rocnavy/pfg1.htm



0. 서문


항일 전쟁 종결부터 중화민국 정부의 대만 이전까지, 중화민국 해군은 임대 또는 군사 원조 등의 명목으로 미국으로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시대에 건조되고 전후 감축된 다양한 종류의 중고 함정을 대량으로 인수했다. 

그 종류에는 구축함, 호위 구축함, 초계함, 고속 수송함, 상륙함 등이 포함되었으며, 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많은 미국 원조 함정을 받은 국가였다. 


장부상으로는 수량이 방대한 중고 함정들은 한때 중화민국 해군에게 대만 해협과 남해에서 압도적인 힘을 과시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결국 제2차 세계 대전 시대에 설계 및 건조된 함정들이었기 때문에 노후화되었고 기술적으로도 함포 교전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2차 대전 이후 미사일과 전자 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이 노후화된 미국 원조 함정들은 빠르게 시대에 뒤쳐졌다. 


1978년 2월 16일 미중 수교와 함께 이듬해 미중 공동 방위 조약이 효력을 상실하면서 중화민국은 전례 없는 험악한 정치 외교 환경에 직면하게 되었다. 

대만은 미국과 더 이상 수교국이 아니었기 때문에 미국으로부터 정밀한 무기 체계를 획득하는 것은 매우 어려워졌고, 미군의 대만 해협 방어 지원 중단으로 인해 대만은 중국 공산당의 거대한 위협에 스스로 대항해야했다.



1. 자력 건함의 기원



1973년, 중화민국 정부는 <10대 건설사업>의 일환으로 가오슝 제2항에 중국 조선창(약칭 중선)을 설립하기로 결정했으며, 이후 국산 함정 건조의 중요한 실행 주체가 되었다.


그 후 1976년 7월에는 <재단법인 연합 선박 설계 발전 센터>를 설립하여 자국산 함정을 설계하도록 하였다.


또한 대만 해군은 1977년 4월 1일 가오슝 줘잉(Zuoying, 좌영)에 해군 연구 개발 센터를 설립하여 새로운 함정 및 해군 기술 프로젝트의 연구 개발을 담당했다. 

1980년에서 1982년까지 해군 연구 개발 센터는 소속 전문 군관을 파견하여 본문에서 소개하는 충의 계획(PFG-1) 미사일 호위함, 검룡 사업(네덜란드에 잠수함 주문) 및 자려 사업(영국 설계, 대만에서 건조한 150톤급 순찰정)과 같은 해군의 다양한 건함 계획을 지원하였다.


그런데 그것으로 인하여 센터 자체 인력 감소 및 기능 저하를 초래했고, 결국 1982년 8월 1일 기존 해군 제1 조선창(약칭 해일창)의 설계 센터와 해군 연구 개발 센터를 통합하여 <해군 조선 발전 센터>(약칭 해발 센터)를 설립하였다.


1974년 10월, 중화민국 해군총사령부는 <해군 구축함 무기 체계 혁신 방안> 보고서를 제출하여 24척의 양자호 구축함의 작전 및 무기 체계를 대폭 개량하여 중단기 수요에 대응하려했다. 

이때 해군 구축함 개량을 담당하는 <광무 그룹>은 1975년 10월 13일에 <구축함 무기 체계 혁신 전문 연구 보고서>를 추가로 제출하였다.


보고서에 따르면 양자호 구축함의 성능 향상은 크게 <미사일화>와 <전투체계화> 두 단계로 나뉘며, 1단계 미사일화를 <정장 계획>이라고 하고 슝펑 1형 대함 미사일 등의 신형 무기를 장착하는 것이었다. 

다음 단계인 <전투 체계화>는 무진 1~3호 등 세 단계로 나뉘어 신형 작전 체계, 전자장비, 무장을 교체하고 특히 최종 단계인 무진 3형의 방공 작전 체계와 무기 장비로 '2세대 함정'의 체계를 확정하는 것이었다.


양자호의 플랫폼은 이미 노후화되었기 때문에 대폭 개량을 거치더라도 원래 설계가 현대 해전에 필요한 다양한 장비 체계에 부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새로운 무장의 설치 및 사격 범위, 전자 장비의 전자파 적합성 및 전력 소비 등이 모두 2차 대전 시대에 건조된 노후 함정으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따라서 대만 해군은 결국 현역 중고 전투함을 대체할 새로운 전투함을 확보해야했다. 


이떄 미중 수교 단절 직전, 대만 해군은 미국과 중국 공산당의 관계가 가까워질수록 단기간 내에 미국으로부터 더욱 진보된 신규 또는 중고 함정을 획득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미국은 제2차 대전 시기에 너무 많은 선박을 건조했기 때문에 전쟁 종결 후 일정 기간 동안 새로운 함정 건조 수요가 전혀 없었고, 따라서 단기간 내에 비교적 신형의 여유 함선을 대만에 공여할수는 없었다. 


1977년 1월 11일, 중화민국 해군총사령부는 2세대 군함의 ROC를 제출했는데, 이때 '2세대 함정' 구상이 해군총사령부의 공식 문서에 처음 등장하였다.


미중 수교 단절 전년인 1978년, 대만 해군은 <2세대 함정 건조 전문 프로젝트 그룹>를 정식으로 설립하여 <자강 태스크포스>라고도 불렀으며, 2세대 함정의 사전 계획 작업을 시작하고 서방 세계에서 가능한 한 모든 함정 정보를 검색했다.

같은 해 정부는 <연합 선박 설계 발전 센터>를 설립하여 국내 선박 설계 건조 능력을 구축했으며, 초창기에는 해군과 중선의 인력을 차출하여 지원했는데, 여기에는 이후 미국 연수에도 참여하는 자강 TF의 멤버인 왕친성 등이 포함되었다.


당시 대만 해군은 신세대 함정 획득에 대해 두 가지 방향으로 갈렸다.

하나는 직접 외국에서 구매하거나 외국으로부터 성숙한 설계를 구매하여 대만에서 건조, 위험과 비용을 줄일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당연히 다른 하나는 대만이 자체 설계 및 건함 능력을 구축해야 하며, 이를 통해 대만 해군의 소요에 맞춰 다양한 함정을 건조하고 진정으로 자주국방을 달성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위험과 비용이 훨씬 높고, 두터운 관련 산업 기반(전기, 전자, 철강 등), 정치적으로 장기적이고 강력한 지원이 필요했다. 

당시 참모총장(한국기준 합참의장) 쑹창즈, 해군총사령(해참총장) 저우젠, 해군부총사령(해참차장) 린저성은 자력 설계/건함 능력 배양에 집착했다.


당시 국제 환경이 대만에 점점 불리해졌기 때문에 국제 시장에서 해군총사령부의 요구에 맞는 설계를 찾더라도 정치적 장벽을 극복할 수 있을지 불확실했다. 

따라서 실제로 실현 가능한 방안은 외국 설계 회사의 도움을 받아 대만 해군을 위한 설계 및 건함 능력을 구축하고 해군의 요구를 충족하는 설계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해군총사령부 초기의 건함 연구에서는 2세대 함정을 양자호를 대체하는 1급 함정인 유도탄호위함(PFG)과 산자호, 관자호를 대체하는 2급 함정인 연안초계함(PCEG, 나중에 유도탄초계함으로 변경)으로 나누었다. 

1978년 초, 해군총사령부의 PCEG 제안안은 배수량이 약 600~800톤급이었고, PFG는 1000톤급과 2000톤급 등이 고려되었다. 


해군총사령부는 PFG가 다음과 같은 작전능력을 갖추기를 요구했다.

1) 지역 방공 작전 능력 및 높은 대공 탐색 능력  

2) 지역 방공 미사일 운용 

3) 사격통제체계와 데이터 링크 완비

4) 함재 헬리콥터를 통한 선박의 탐지 및 대잠 작전의 확장


한편 PCEG는 요구되는 사양이 낮고 자함 방공 능력만 갖추면 되며, 사용하는 탐색, 사격 통제 체계 및 대공 미사일은 PFG보다 낮은 등급이 요구되었다.

PFG가 척당 최소 6천만 달러로 추산되어 너무 비싸지자, 해군총사령부는 1978년 3월에 PFG와 PCEG의 통합을 검토하여 배수량을 1000톤급 이내로 제한했지만, 두 함정의 임무 요구와 장비에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통합은 비현실적이었고 따라서 원안대로 분리되어 진행되었다.


1978년 5월 초, 해군총사령부는 국방부에 PFG 1급 함정과 PCEG 2급 함정의 사업안을 공식적으로 제출하고 PFG를 먼저 진행할 것을 제안했다. 

동시에 해군총사령부는 설계를 지원할 외국 업체를 선정하기 시작했는데, 미국의 JJMA, Gibbs and Cox(RCA와 컨소시엄), Hydronautics, Tacoma 및 서독의 HDW 등이 관심을 보여 브리핑을 진행했다. 


해군총사령부는 또한 중선에 외국 업체의 능력과 국제 시장에 있는 기존 설계를 평가하도록 위탁했다.

PFG 1급 함정은 함대 작전의 주력으로 활용되어야 하고 대잠 장비가 좋아야 하며 바람과 파도가 거친 대만 해협에서 초계를 수행해야한다는것을 고려하여 PFG의 톤수 기준을 2000톤급 이상으로 확대하였다.

해군총사령부는 기술 복잡도가 높은 PFG 사업을 먼저 실행하여 전투체계 등 핵심 작업을 끝내기 원했다. 

(국제 정치적 환경이 점점 대만에 불리해졌기 때문에 PFG 핵심 시스템을 최대한 빨리 획득하여 향후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PCEG를 구축할 때 양자호 구축함의 정장 사업, 무진 사업 등 개량사업의 기술을 활용하여 비용을 절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국방부는 PFG가 너무 비싸고, 현역 양자호 구축함이 성능 향상 계획을 통해 최소 10~15년 동안 작전을 수행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따라서 1978년 7월 하순, 해군총사령부에 톤수가 더 작고 비용이 저렴한 PCEG를 우선 진행할것을 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군총사령부는 PFG 연구개발을 계속 추진하여 1979년 1월 초에 국방부에 PFG 원형함 1척의 예산과 계획 일정 개요를 제출했다.


해당 보고서에 나온 PFG의 사양은 다음과 같다.

1) 배수량 약 2100톤 

2) 함포, 대공 미사일, 대함 미사일, 대잠 어뢰 및 대잠 헬리콥터 장비

3) 최대 속도 36노트, 순항 속도 20노트

4) 승조원은 130명

5) 설계, 건조, 장비(탄약 및 헬리콥터 제외), 인원 양성 및 2년분 부품을 포함한 총 가격은 약 1억 1100만 달러(40억 1550만 신대만달러)


1979년에 설계 및 자문 회사를 선정하고 설계를 진행하면 1981년에 함선을 기공하고 1982년에 건조 및 체계 설치, 1983년에 시험 평가를 진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서는 예상하였다.

이 보고서의 PFG 설계는 주로 JJMA의 2100톤급 다기능 호위함 개념설계를 참조했으며, MK-45 5인치 함포 1문, 경사발사관의 SM-1 미사일 8발(무진 3형 양자호와 유사한 설계), 4연장 하푼 대함 미사일 발사기 2기, 2연장 30mm 기관포 2문 및 대잠 헬리콥터 1대를 장비했다.


해군총사령부의 PFG 원형함 보고서는 1979년 상반기에 국방공업기금회의 심사를 거쳐 5월 23일에 국방부의 PFG 준비 작업 진행 승인을 받았다. 

<국방공업기금>은 1979년 1월 미중 수교 단절 이후 설립되었으며, 자금 출처는 미국과의 수교 단절 직전 대만 국민과 해외 화교가 기부한 국방성금이었다. 

기금의 다른 주요 용도로는 공군의 '자강중대'와 육군의 '자강전차연대' 구매였고, 국방 예산에 대한 부담을 줄일 수 있었다. 


이어서 1979년 6월, 연합 선박 설계 발전 센터는 해군총사령부에 미국 국적의 5인 전문가 그룹을 조직하여 계획 정의 단계의 자문 작업을 2주 동안 지원하도록 하였다.


1979년 제41차 군사 회담에서 장징궈 총통은 '중선의 설비를 이용하여 해군 건함 능력을 발전시키라'고 지시했다. 

이어서 7월 17일, 해군총사령부는 장징궈 총통에게 <미사일 호위함 조함발전방안>을 브리핑하여 장징궈 총통의 승인을 받았고, 8월 6일 대만행정원 '국방공업 발전정책 지도 그룹'에 이 방안을 브리핑했다.

 

충의 계획 전체의 예상 비용 규모는 47억 3천만 신대만달러였으며, 13억은 국방공업기금에서 충당하고 후속 34억은 국방 예산에서 매년 편성하기로 했다. 

이 예산에는 설계 역량 구축 및 시공, 초도함 건조 비용이 모두 포함되었다. 사업안을 행정원에 브리핑한 후 국방 공업 기금은 먼저 5억 8천만 달러를 해군에 지급하였다. 


이로써 해군총사령부는 마침내 PFG 연구 개발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고, 이를 <충의 계획>이라고 명명했으며, 충의계획은 중화민국 해군의 첫 번째 자력 설계/건함 계획이 되었습니다.


충의 계획은 해군부총사령 린저성이 직접 담당했으며, 주요 목표는 세 가지였다.

첫째로, 인원을 미국에 파견하여 군함 설계 및 건조를 현장에서 학습하고 이를 활용하여 대만의 신세대 주력 전투 함정 연구 개발을 완료하는 것.

둘째로, 미국 정부와 협상하여 신형 무장, 전투체계 및 기관 등의 수출 허가를 획득하여 충의 계획 뿐만 아니라 다양한 신세대 함정에 사용하는 것.

셋째로, 군함 설계 인원을 양성하고 새로운 기술 자료를 획득하는데, 이때 함정 설계의 노하우, 즉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했다.


대만 해군의 요구에 따라 충의 계획의 목표는 배수량 3000톤 이내의 호위함으로, 대잠을 주요 임무로 하면서 대공 및 대수상 작전 능력도 겸비하고 작전 반경은 약 500해리였다. 당시 대만 해군은 이러한 유도탄호위함 24척을 건조하여 기존 24척의 양자호 구축함을 1대1 대체할 예정이었다.



2. 계약 업체 선정


1980년 4월, 연합 선박 센터는 미국의 국제 선박 자문 회사와 충의 계획 자문 계약을 체결했다. 이 회사는 연합 선박 센터의 초대 이사장인 리루샹 박사가 소개했으며, 퇴역 미국 해군 소장 혼싱어(Honsinger) 부자와 퇴역 대만 해군 기술 군관 취펀더우가 멤버로 있었다. 


국제 선박 자문 회사의 업무에는 건함 설계 및 무기체계 업체 선정, 대만 해군 프로젝트 관리 및 설계 인력 양성, 충의 계획 사업단의 초기 설계 완료 지원, 이후 중선에 건조 위탁 등이 있었으며, 미국 측의 코드명은 PFG-1(Patrol Frigate, Guided-I, 유도탄호위함)이었다. 


입찰 제안서에 따르면 대만 해군의 요구 사항은 배수량 3000톤 이하, 최고 속도 30노트, 작전 반경 500해리, 정상 항해 시 항속 거리 4000해리, 대잠 작전을 주요 임무로 하면서 대공, 대수상 작전 및 전자전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해군은 혼싱어 등의 도움을 받아 입찰 제안서를 완성하여 총 12개 미국 업체에 입찰을 제안했는데, 6개 조선 업체와 6개 무기체계 공급 업체였다.

선박 업체로는 Gibbs & Cox, Rosenblatt & Sons, JJMA, 시스템 업체로는 Westinghouse, Unisys 등이 있었다. Gibbs & Cox는 미국의 유명한 군함 설계 회사로, 원래 대만 해군이 가장 선호하는 대상이었지만 냉전 시대 국방 산업 경기가 호황을 누리면서 이 회사는 충의 계획과 같은 자잘한 프로젝트에 관심이 없었다. JJMA는 한국의 울산급 호위함 설계도 지원하고 있었는데, 충의 계획 입찰에 참여한 제안은 울산급과 유사했다.


업체 결정 외에도 혼싱어는 인원 교육도 준비했다. MIT가 대만 훈련생을 위해 1단계 건함 선행 훈련반을 개설했는데, 총 2개 기수로 나뉘어 1980년 하반기와 1981년 상반기에 진행되었다. 

원래 당시 MIT의 군함 설계 과정은 미국과 유럽의 NATO 동맹국 인원에게만 개방되었고, 아시아 학생(일본 포함)은 제한되었기 때문에 혼싱어의 노력으로 대만 인원이 수강이 가능했다. 

각 기수 수업은 두 단계로 나뉘었는데, 첫 번째는 MIT에서 군함 설계 수업을 듣고, 두 번째는 혼싱어가 미국 민간/군 출신 조선공학 전문가를 초빙하여 수업을 진행했다. 수업 장소는 학교 근처의 민가였다. 파견된 인원은 당시 대만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들로, 해군, 연합 선박 설계 센터 및 중국조선창(중선)에서 차출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충의 계획 1기 파견 인원은 미국에서 선행 훈련을 마친 후 미시시피주 파스카굴라의 리튼(Litton) 조선소를 방문하여 장비 탑재중이던 첫 번째 키드급(Kidd class) 유도탄구축함 USS Kidd에 탑승한 적이 있다. 

4척의 키드급 구축함은 원래 이란을 위해 건조되었지만, 1979년 이란 혁명이 발생하고 친미 팔레비 왕조가 전복된 후 미 해군에서 남은 함선을 인수하기로 했다. 

키드급 구축함은 당시 미 해군에서 가장 진보된 구축함(이지스 구축함은 아직 개념 단계)이었다. 이는 3천 톤급 미국제 2차 대전형 구축함만 운용해 본 대만 해군과 중선 인원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처음으로 고급 선박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고 묘사했으며, 책에서만 보던 가스터빈과 같은 진보된 장비를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다.


당시 그들은 25년 후 이 키드급 구축함이 대만에 인도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1981년 2월, 해군은 웨스팅하우스를 충의 계획의 주 계약 업체로 선정하고 주요 체계 통합을 담당하게 했으며, 하청 업체로 로젠블라트를 선정하여 설계 및 건조를 의뢰했다. 

일반적인 건함사업은 설계업체가 주 계약 업체를 맡지만, 충의계획의 경우엔 대만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여 규모와 인지도가 높은 웨스팅하우스를 주 계약 업체로 선정하여 미국 정부에 대만으로의 관련 기술, 시스템 수출을 로비할 때 더욱 유리하게 만들었다. 이는 혼싱어의 조언이기도 했다.


1981년 7월 1일, 대만 해군은 웨스팅하우스, 로젠블라트와 <해군총사령부와 미국 웨스팅하우스 해외 서비스 회사 간 유도탄 호위함 계획 계약>을 체결하여 충의 계획의 실행 근거가 되었다. 

이 계약은 2년 동안 지속되며, 타당성 평가, 표준 제정, 초기 수요 및 대체 시스템 평가, 개념 설계, 기본 설계, 계약 설계, 구매 사항 등으로 이루어졌고 비용은 1,100만 달러에 이윤 50~100만 달러였다.

계약은 충의 계획의 초기 설계 단계만을 정의하고 있으며, 이후 발전은 다음 조항 내에 정의되어 있다. 


계약이 완료되면 쌍방은 조건과 가격을 고려하여 이후의 후속 조치를 정의하며, 여기에는 프로젝트 계획 절차 수립, 상세 설계 및 건설 공사, 함상 작전 장비 구매 및 최종 상세 설계, 장비 설치, 초기 설치 및 결합 테스트, 공식 해상 테스트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방식은 충의 계획에 퇴로를 마련해두는 것으로, 초기 분석 설계와 후속 상세 설계, 건설, 테스트를 분리하는 것이다. 만약 1단계 계약 완료 후 초기 설계에 문제가 발생하거나, 이후 재정적 부담으로 인해, 혹은 정책 전환이 발생할 경우, 해군은 계획을 취소하고 빠져나올 수 있다.


이 계약에서 웨스팅하우스 외에 스펙트럼 어소시에이츠라는 하위 계약 회사가 있다. 이 회사는 미 해군 퇴역 정보 요원이 설립한 회사로, 이들은 과거 미국 해군에서 소련, 유럽 함선의 건조 자료를 수집하여 분석하는 과정에서 귀중한 경험과 데이터베이스를 축적했기 때문에, 조선 대기업으로부터 하청 업무를 받아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된 다양한 선형 데이터를 제공하여 고객을 돕는 역할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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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긴것 같아서 세 파트로 나누어 올림.

대만 해군 건함사의 대표적인 What-if 분기점 중 하나로서 그 시작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