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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란츠만의 '쇼아'에서 발췌함. 라울 힐베르크가 란츠만에게 죽음의 열차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임)


라울 힐베르크
홀로코스트 연구의 권위자인 미국 역사학자 | 미국 벌링턴

'노선 지침' 제587호입니다.
특수 열차를 운행하려면 항상 작성해야 했던 서류죠.
587번이라는 숫자가
그 전에 얼마나 많은 지침이 있었는지 보여줍니다.
여기 아래에는 누어 퓌어 덴 딘스트게브라우흐(Nur für den Dienstgebrauch)라고 쓰여 있어요.
'내부 관계자용'이라는 뜻인데
기밀의 정도로 따지자면 사실상 하급 수준에 해당하죠.
그런데 제가 놀랐던 부분은
죽음의 열차와 관련된 서류인데도,
이것뿐만 아니라 다른 서류들에서도 마찬가지지만,
'기밀'을 뜻하는 단어 게하임(Geheim)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만약 문서에 '기밀'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면
그걸 읽는 사람들이 그게 뭔지 더 궁금해해서
아마도 더 많은 의심을 사게 됐을 겁니다.
주의란 주의는 다 끌었겠죠.
이 작전을 진행하는 동안 심리적인 차원에서 명심해야 했던 게
수행하고 있던 임무를 절대로
명명하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아무 말 말고 그냥 하라는 거였죠.
뭘 하는지 부인하지도 말고요.
그래서 '내부 관계자용'이라고 적혀 있는 겁니다.
여기 보시면 이 서류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손에 들어갔는지 알 수 있는데요.
'Bfe'. 기차역을 말하죠.
이 노선에만 기차역이 총... 8개나 돼요.
여기가 트레블링카에 도착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렀던
마우키니아 기차역입니다.
그러니까 라돔(Radom)을 지나서 바르샤바 구역까지
이렇게 상대적으로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 데도
문서를 수신한 곳이 8곳이나 되는 거죠.
여기 8개의 역을 지나갈 때마다
각 기차역 담당자에게 통보해야 했으니까요.
그런데 한 장이면 충분한 것을 왜 두 장씩이나 썼을까요?
여기 보이는 PKR은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죽음의 기차를 뜻하는 약자예요.
그런데 트레블링카에 열차가 도착하면
곧바로 비워냈기 때문에
거기서 새로 출발하는 빈 열차가 하나 더 생기게 되는 거죠.
아시다시피 비어 있다는 뜻인 단어 레어(leer)를 나타내는
알파벳 L이 여기 이렇게 표시되어 있고요.

뤽라이퉁 데어 레어추게스(Rückleitung der Leerzuges)
'빈 기차의 귀환'이라고 쓰여 있군요.

여기 보세요.
숫자를 매기는 방식에서 교묘함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9228변에서 9229번, 이어서 9230번, 9231번, 9232번.
전혀 특별할 것 없이
일반 열차를 운행하는 거나 다름없었던 거죠.

죽음의 열차였는데도요!

네, 죽음의 열차였는데도 말이에요.

이제 이 부분을 살펴보시면
어느 한 게토에서 내부를 비우는 작업이 진행 중이었고
거기서 기차가 출발해 트레블링카로 향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1942년 9월 30일 4시 18분에 출발한 거죠.
적어도 계획된 일정표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오전 11시 24분에 트레블링카에 도착해요.
이건 길이가 아주 긴 열차였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늦게 도착한 거고요,
여기 '50G' 표시가 보이시죠.
사람들을 가득 채운 화물칸이 50개였다는 뜻입니다.
중량이 굉장히 '무거웠던' 수송이었던 거죠.
트레블리카에 도착한 시간이 11시 24분,
오전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15시 59분에 열차가 다시 출발합니다.
그사이에 기차에 실려 있던 것을 내리고
청소까지 한 다음 다시 출발할 수 있도록 준비를 마친 거죠.
그렇게 빈 기차에 다시 일련번호를 매긴 거고요.
그러니까 이 기차는 오후 4시경에
트레블링카에서 또 다른 작은 도시를 향해 출발했고
그곳에서 또 다른 희생자들을 실은 겁니다.
그리고 여기 보시면
새벽 3시에 다시 트레블링카를 향해 출발해서
다음 날 도착했어요.

그러면 이 두 열차가 같은 열차라고 볼 수 있는 건가요?

아 그럼요. 같은 열차죠. 이 둘은 같은 열차입니다.
매번 번호만 바뀐 거고요.
그렇게 트레블링카로 다시 돌아가고 나면
새로운 수송이 또 있었겠죠.
도착하자마자 다른 곳으로 다시 출발하는 식이었던 겁니다.
매번 똑같은 상황에 똑같은 방식으로 운행을 반복했으니까요.
이 기차는 또다시 트레블링카로 돌아가서는
최종적으로 9월 29일 쳉스트호바에 도착합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 거죠.
이게 바로 '노선 지침'이라고 부르던 서류입니다.
열차 안에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는 가정으로 계산을 하면
이런 식으로 '노선 지침'을 한 번 시행할 때마다
약 1만 명 정도의 유대인이 죽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만 명은 훌쩍 넘을 것 같은데요!

최소한으로 잡아서요.

그런데 이런 문서에 이렇게까지
주목할 만한 이유가 있을까요?
실제로 트레블링카에 다녀온 입장에서
거기 현장과 이 문서를 동시에 보니까...

지금 제가 이 종이를 이렇게 손에 들고 있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이건 서류 원본이에요.
당시 행정을 집행하던 관료들도
이걸 두 손으로 직접 들고 있었다는 걸 생각해 볼 수 있죠.
유물이나 다름없습니다. 남아 있는 건 이것뿐이니까요.
죽은 사람들은 더는 말이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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