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e88775bc85618423e686e6329c706f80baf364059a084f0a152afce75e45a09d193d3b83bd36123a7e5e67eb77837e07f80251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시작되는 1947년부터 종전되는 1949년 사이, 인도 바로 옆에 있는 매우 거대한 국가에서는 패권을 두고 두 인물이 자웅을 가리고 있었음.


7de48673c48769f1239e8293469c706a092796cfd05625eda774e44113ff7641c45963a95b101e57a9740716c11aa26154b4b788

그들 중 한 명은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였고

0cef8371bcf7698423e886914e9c701c2f36ad4076aa814e16e08a5fd4e43dfbecdc64fe23609bd8741fac12522d274a2111fa

또 다른 한명은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이었음.


사실 이 기간엔 국민당이고 공산당이고 전통적 강역을 제외한 이외 영토에는 큰 관심을 가질 수 없었음. 너무나 당연한 것이, 그걸 신경쓰고 있다가는 중국이라는 매우 큰 국가의 패권 전체를 상실할수도 있었기 때문임.



09e9f576b4866ef223ea8491459c7018a92a2fcb87290a43beffd65ea65f3a09d54f7fba7afa34c95ffff4ae86318f8b4565a7aa

그리고 국민당은 최종적으로 중국 대륙의 패권을 포기하고 재기를 노린 채 대만 섬으로 후퇴했고, 중국 공산당은 중국 서부의 일부 국민당 잔당이 남아있었지만 주요 세력이 대만으로 패퇴한 것이 확실해지자


건국 준비를 마치고 1949년 10월 1일,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했음. 제1차 인도 파키스탄 전쟁이 같은 해 1월 5일에 끝났으니, 약 10개월의 시차를 두고 중국 대륙이 통일된 것임.


양안관계에 대한 입장차이를 떠나서, 이는 중국 주변 국가들에게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될 수 밖에 없었음. 왜냐하면 중국이라는 국가가 일부 도서를 제외하고 통일된 상태에서 이제 내부 정리가 끝나는 순간 이 총칼이 바로 자신들을 향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임.



7aec8507bc8760f323edf3e2309c701c01769c228e8cb6fa9f0c23f989cd16bc811ba41c9511ab4650e6aff2b598e8ce116d99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직후, 중공은 대만에게서 진먼다오를 빼앗기 위해 진먼다오에 전면적인 상륙을 감행하였고

79eb8675c4846ef2239c84e4309c7065aa2ac65dfdbfa578ee7010659d2876a17d6846e30a792a75c5f06763edee658addc2ca73

1950년 10월, 625전쟁으로 전 세계의 이목이 쏠린 사이 중국은 소리소문없이 티베트를 침공, 해가 지나가기 전 무력으로 점령하였으며


0c9c8074b3f76df623ecf0e4459c706ba152ae562719146538a2f409e27889b45afdca46f268ec874a5379582265f27fb88b50ec

티베트 침공 직후 중공군을 한반도로 파견, 멸망하기 전 북한을 지원해 전세를 다시 한반도 중부로 옮기는 등 중국 대륙 외부에 군사력 투사를 아끼지 않고,

09eef271b0f461f423eb85e4339c7069fbfc50b0a2e09458389dd9f298176161fde875d49386d7e8315baac67d1ca778d6de7d

이후 1958년엔 진먼 포격전을 감행하며 대만해협을 냉전의 최전선임을 각인시키는 등 신생 국가치고도 인근 지역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서슴지 않았음.


심지어 1960년엔 버마 국경에서 국민당 잔당을 소탕하기 위해 버마 정부와 손잡고 버마 국경 일부 지역을 장악하고 버티고 있던 국민당 잔당 소탕작전을 진행하는 등 결코 적지 않은 대외 군사작전을 적극적으로 벌임.





그리고…



089b877eb7861bf023e88691439c706cb51bcce14456aa887e3193412988927c7c1d2aa102155dea1e882e8c3fb7a20942a5fdaef5

중국과 인도 사이에는 명확히 국경을 합의보지 못한 아크사이친이라는 지역이 있었음.


이 지역은 명백히 존재하는 지역이지만 19세기 중후반부턴 시크교도 제후가 이끄는 잠무-카슈미르 왕국의 일원으로서, 또한 영국령 인도 제국의 하위 지역으로서 영국은 존슨 선, 매카트니-맥도널드 선 등 해당 구역의 분계선을 임의로 그어놓은 상태였음.


이는 크게 보면 영국과 티베트 사이의 국경을 정리해놓은 맥마흔 선의 일부였는데, 맥마흔 선까지 다루면 내용이 길어지니 나중에 정리할 일이 있으면 정리하도록 하겠음.




아무튼 이 지역이 임의로 선이 그어진 이유는 해당 국경에 대한 청-영국간 명백한 국경 합의가 없었기 때문인데, 이를 이유로 영국령 인도 제국과 청나라 간 국경 합의를 위해 영국은 여러 번 청나라에 국경 확정을 요구했음


그러나 청나라가 해당 요구를 받았을 때는 사실상 청나라가 국가 기능을 하지 못하는 말기암 환자 수준인 상태였던 관계로, 국내외 산적한 문제에 뒤덮여 청나라는 변경 오지 국경선에 신경을 쓰지 못했음. 영국 또한 제대로 된 응답을 받지 못하자 자국이 임의로 그어놓은 경계선을 국경선으로 사실상 간주하고 관리하기 시작했음.


그리고 이 문제는 1911년 청나라가 멸망하고 군벌 시기, 중화민국, 중화인민공화국까지 중국 내 문제가 계속되면서 어떤 세력도 제대로 된 마무리를 짓지 못한 채 잊혀지게 되었음.



74988473c18a69f523e98293329c706a0d0138b90066c4af6a8c42711079dc3bf0895be47eef4c02379333c41b633f70c61f77d7a7

그럼 아까 왜 뜬금없는 중국 얘기를 하면서 빌드업을 짰는지 대충 견적이 나올텐데


제대로 정해지지 않은 국경, 그리고 그 국경을 사이에 둔 국가가 어느정도 내부 정리를 완료한 시점이 도래했다는 것임.


그리고 이런 상황이 맞물리면서 양국간엔 해당 지역을 두고 분쟁이 점화된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



또한 전편에서 봤겠지만, 인도는 합병을 약속하고 지원을 요청한 잠무-카슈미르 왕국에게 군사지원을 하면서 해당 지역을 장악했다고 간주했기 때문에, 아무도 살지 않는 이 척박한 지역은 인도 입장에선 “당연하게” 우리 땅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음.




78ee8500b2f6688023e9f4e0449c7019c7596e8de1adc52219ec16b3f32eb2f83a1a2edd601177536c1af8c7a467a26d6f033213

1956년, 아무도 살지 않는 아크사이친에 중국 정부 인원들이 도로를 건설하기 시작했음.


이건 사실 인도 입장에선 사실상 뒤통수나 다름이 없었는데, 당시 인도 총리였던 자와할랄 네루는 1950년대 초에 이미 “맥마흔 라인을 기반으로 한 국경선”을 국경선으로 인정하겠다는 주장을 했음에도 중국인 이에 별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았기 때문임.


개인적으로는 당시 중국은 한반도와 대만에 더 큰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황무지 국경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함.


문제는 맥마흔 선이 그어졌을 당시, 영국과 티베트 당국은 해당 국경선에 조인을 했으나 중화민국은 어정쩡한 태도로 반대하며 해당 국경선에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건 언제든 중국 대륙을 통일한 국가가(중화인민공화국이 아니더라도) 이 문제에 태클을 걸 수 있었기 때문임.


아무튼 중국이 1956년 ~ 57년 건설한 간선도로는 현재 219번 국도(국도219)라고 불리는 중국 서부 국경라인을 따라 건설된 대규모 도로 프로젝트의 일부로서 건설된 도로망이었음. 다만 당시에는 해당 지역에 상주 인구가 없었던 관계로 도로 건설이 끝난 1958년이 되어서야 인도 측에서 해당 도로가 지어지고 개통된 것을 파악하고 이에 대해 반발했음.


중국 측에서는 “아크사이친 일대, 즉 맥마흔 라인은 중국이 인정한 적이 없다.”는 주장을 고수하며 물러서지 않았고, 국가 간행물 등에서 해당 지역을 중국 영토로 표기하여 발간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음.






0bef8305c6841ef523eb8796469c701b59f89d96c303640fe559983986310e52028e9df0c29474d0719802e73fd43a729484849a27

1959년부터는 기껏해야 외교적 분쟁이던 아크사이친의 분쟁이 본격적인 양국간의 무력 충돌로 비화되는데,


먼저 첫번째로 인도가 티베트 봉기가 실패한 이후 달라이라마의 정치적 망명을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다람살라에 티베트 망명정부를 꾸릴 수 있게 지원을 해서 중국의 격분을 샀기 때문임.


결국 이 문제는 크게 보면 티베트 문제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티베트 문제에서 달라이 라마는 중국의 아킬레스건과도 같은 존재였었음.


게다가 같은 해에 아크사이친을 정찰하던 인도군이 중국군과 교전을 벌여 1명이 포로로 잡히는 사건도 발생함.



다만 전쟁 이전까지 양국이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맥마흔 선을 두고 양국간의 입장 차이는 결코 좁혀지지 않았기에 결국 성과 없는 말다툼만 계속 할 뿐이었음.


그 와중에도 산발적인 교전은 지속되고 있었는데…






(계속)

- dc official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