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즈가 미군과 체결한 계약에 따르면,
휴즈 항공은 1944년부터 100대의 F-11을
미 육항대에 인도해야 했지만 시작부터 온갖 잡음이 튀어나왔다.
일단 휴즈는 자기 회사 직원들의 관리부실으로 손실된 D-2의
(격납고에 화재가 발생해 프로토타입 1기가 파괴되었다.)
개발에 대한 보상금으로 390만 달러를 미 육항대에 요구했다.
D-2는 휴즈의 사비로 만들어진게 아니라
미국 정부가 미 육항대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휴즈 항공에게 300만 달러에 달하는 개발비를 지원하여
제작된 비행기였지만, 이번에도 휴즈는 D.C의 인맥을 이용해
정부로부터 160만 달러의 보상금을 지급받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이건 빙산의 일각일 뿐,
애초에 XF-11은 군용기로는 여러모로 적합하지 않았다.
D-2의 파생형으로 개발되었던 만큼 방탄성이 없는
듀라몰드가 제작과정에서 폭넓게 사용되었으며,
이를 보강하기 위한 방탄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 당시 미군기들의 생존성 향상을 위해
기본적으로 탑재됐던 자동방루형 연료탱크마저 없었다.
뭐...당시 군용기, 그것도 전투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자동방루형 연료탱크를 장착하지 않은 사례가 있긴 한데...
휴즈가 자신이 만든 H-1의 복제품이라고 주장했던
태평양의 종이비행기, 미쓰비시 A6M 되시겠다.
참 신기하게도 A6M 역시 방탄판이 없었다.
그렇다고 진짜 A6M이 휴즈에게 영향을 받은건 아니다.
영국이 1930년대에 개발한 전투기였던 글로스터 F.5/34의
외형을 100% 카피하여 제작한게 바로 제로센이기 때문
아무튼, XF-11이 아무리 고고도 정찰기라고는 하지만
이런 종이비행기를 적진에 출격시킬순 없었고..
미 육항대는 휴즈에게 기체에 알루미늄을 사용하고
방루탱크를 장착하는 등의 설계변경을 요구한다.
설계변경하라고? 좆까ㅋ
물론 휴즈가 그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9톤 이상의 항공기에서 그들만의 신소재, 듀라몰드를
독점적으로 사용할 권리를 취득했던 휴즈 항공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듀라몰드를 쓰겠다고 고집했다.
여기에 더해 휴즈는 당시 군수물자 생산을 감독하던
전쟁생산위원회(WPB, War Production Board)가
XF-11의 생산비를 낮추기 위해 휴즈 항공이
캘리포니아보다 인건비가 낮은 휴스턴에
새로운 비행기 생산공장을 건설하라고 지시했음에도
여러가지 핑계를 대며 이것마저도 거부해버린다.
결국 1943년 9월에 시작된 최종 협상은 계약 체결로부터
11개월이 지난 1944년 8월이 되어서야 종료되었다.
이제 기체를 마저 설계하고 생산하기만 하면 됐다.
전쟁이 1년 뒤에 끝나지 않냐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새끼들의 저열한 생산능력으로는
절대로 제때 미군에 비행기를 납품할 수 없었다.
휴즈 항공의 직원수는 8만명에 달했지만, 이들 대부분은
B-25나 P-51 등에 들어가는 부품을 제작하는 노동자였다.
휴즈 항공은 보잉같은 근본있는 회사가 아니었다.
그들은 단 1번도 비행기를 제대로 생산해본 경험이 없었다.
애초에 공장에도 대량생산을 위한 라인이 깔려있지 않았다.
여기에 더해서, XF-11의 세부설계를 완료해야할
휴즈 항공의 주요 엔지니어들은 휴즈의 지시에 따라
H-4라고 불린 초거대 비행정의 개발에 투입된 상태였다.
참고로 여기에도 2,300만 달러의 정부 예산이 들어갔다.
원래 1944년까지 3기를 미군에 납품하기로 했지만
휴즈의 집착에 가까운 완벽주의로 인해 설계자가 퇴사해버려
1944년까지 기본적인 설계조차 완료되지 않았던건 덤...
???: 아 좆같네 안해
제대로 되는일이 없었던 하워드 휴즈는
그냥 XF-11과 H-4에서 완전히 손을 놔버리기로 했다.
정부 지원금으로만 1조 이상을 타먹지 않았냐고?
그걸 신경쓸정도로 휴즈는 양심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1941년부터 꾸준히 상부에다 휴즈 항공의
극도로 저열한 생산력을 보고해왔던 미 육군항공대는
휴즈의 이런 금쪽이같은 모습에 그야말로 속이 타들어갔다.
당시 드넓은 태평양 전역에서 일본군 전투기들을 피해
고고도에서 안전하게 일본 본토를 정찰할 수 있는 비행기는
B-29의 정찰기 파생형으로 개발된 F-13밖에 없었기에
F-13을 보조할 신형기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결국 휴즈는 미 육항대의 엄청난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콘솔리데이티드(Consolidated, 컨베어의 전신)에서
B-24를 포함한 각종 항공기들의 생산을 총괄했던
찰스 페렐이란 고위 임원에게 XF-11의 생산을 위임한다.
B-24...콘솔리데이티드 사가 제작한 이 폭격기는
B-17보다 거의 모든 부분에서 우월했음에도 불구하고
종잇장같은 방어력과 상대적으로 딸리는 비행성능으로 인해
아브로 랭커스터와 B-17에 가려진 비운의 기체로 유명하지만,
이새끼의 경이로운 생산성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있지 않다.
B-24의 생산량은 무려 18,482대...2머전 폭격기하면 떠오르는
B-17과 랭커스터의 생산량이 각각 12,700대와 7,300대임을
감안한다면 이는 실로 어마어마한 수치였다.
이렇게 B-24를 1시간마다 1대씩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부품이 모듈식으로 사전에 제작되어 납품되었기에
공장에서 부품을 짜맞추기만 하면 조립이 끝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페렐은 제작지연으로 악명이 높았던 휴즈 항공에서도
자신이 콘솔리데이티드에서 사용했던 방식을 적용하기만 하면
XF-11같은 항공기 100대를 만드는건 식은죽먹기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모든 기업이 대량생산에 능숙했던건 아니었다.
하워드 휴즈의 개인 장난감 제작소로 시작한 기업이었던 만큼,
당시 휴즈 항공의 분위기는 자유분방함의 끝을 달리고 있었다.
말이 좋아서 자유분방함이지 직원들이 그냥 일을 안했다...
휴즈 항공에 대해 "항공기 설계 및 제작 경험이 전혀 없다"며
혹평했던 페렐은 그래도 누구처럼 일을 때려치지는 않았다.
일단 비행기 제작과정의 55% 가량을 플릿윙스라는
업체를 포함한 여러 회사에 아웃소싱하기로 결정했는데,
여기서 기존 임원진들과의 극심한 의견충돌이 발생하여
XF-11의 수석 설계자였던 에드 웨스트를 포함한
22명의 핵심 임원들이 회사를 나가버렸다....
물론 그렇다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았다.
우선, 휴즈 항공은 날개 제작을 맡은 플랫윙스에
보안상의 이유로 날개 설계도를 보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날개 제작이 6개월간 지연되었다.
여기에 더해 협력업체들이 단가 인상을 요구하면서
엔진과 날개같은 주요 부품의 납기일이 밀려버리자...
더이상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미 육항대는
1945년 5월 26일에 프로토타입 2대를 제외한
모든 F-11의 주문을 취소해버리고 개발종료를 명령했다.
2차대전 종전을 불과 3개월 남겨둔 시점이었다.
44-70155와 44-70156이란 이름이 붙은
XF-11 프로토타입의 제작은 계속되었지만,
이들은 1946년 4월 5일이 되어서야 완성되었다.
완성된 비행기의 성능은 어땠을까,
길이 20m, 폭 31m, 익면적 91m²라는 스팩은
P-38이나 P-61은 물론이고 D-2보다도 거대한 크기였다.
공차중량이 17톤, MTOW(최대이륙중량)은 27톤에 달해서
B-17이나 B-24같은 중(重)폭격기랑 맞먹는 수준이었다.
실제로 최대이륙중량이 2톤밖에 차이나지 않았으니 뭐...
폭격기 사이즈의 기체를 하늘로 날려보내기 위해, XF-11에는
P&W제 R-4360-31 '와스프 메이저' 엔진 2기가 사용되었다.
B-36이랑 B-50에 탑재된 그거 맞다.
R-4360이 28기통/4,300마력이라는 미쳐버린 성능을 가졌기에
XF-11은 10km 상공에서 720km/h로 순항할 수 있었다.
물론 정비사들을 미치게 하는 정비성도 가지고 있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여기를 참고하도록 하자
R-4360이 시간당 500갤런(1,800L)라는
그야말로 애미뒤진 연비를 가지고 있었기에
최대 8,000km에 달하는 항속거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휴즈 항공의 엔지니어들은 XF-11에다 내부연료탱크 외에도
주익 안쪽에 위치한 파일런에다가 장착하는 300~700갤런(1135L~2,650L)용량의 보조연료탱크 2개와
날개끝에 장착하는 300~600갤런(1135L~2,271L)짜리
외부연료탱크 2개를 추가로 탑재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방루처리된 연료탱크 앞쪽에 위치한 XF-11의 콕핏은
조종사와 사진기사가 앞뒤로 엇갈려 탑승하는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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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이런 자리배치라고 생각하면 될듯하다.
콕핏 앞에는 최대 8개의 정찰용 카메라를 장착할 수 있었고,
테일 붐 옆에도 카메라를 2개까지 집어넣을 수 있었다.
장착된 카메라의 종류는 K-17부터 K-22까지 다양했지만,
동체가 작아 사진을 비행기에서 인화하는건 불가능했다.
게다가 원판인 D-2에 달려있던 폭탄창이 삭제되어
야간작전용 5인치 조명탄을 적재할 수 없어서
야간정찰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단점도 있었다
경쟁작인 XF-12는 내부에 암실까지 갖춘 B-29만한 정찰기라
조명탄을 몇톤씩 쟁여놓는게 가능했던걸 생각해본다면
이건 XF-11을 제작한 휴즈 항공의 설계 미스였다.
하지만 진짜 설계결함은 따로 있었으니...
휴즈 항공의 고질적인 기술력 부족으로 인해
XF-11에는 비행기 외부에 얼음이 생기는 것을 방지하는
방빙(防氷, Anti-Icing)장치가 장착되지 않았다.
즉, 고고도 정찰기였지만 고고도 비행이 불가능했다.
비행기의 유압/전기계통에서 계속 결함이 발생한건 덤...
미 공군은 이런 비행기의 모습을 보고 어이가 없었지만,
어차피 취소된 사업이었으니 그냥 초호기를 인수해줬다.
이후 XF-11은 1946년 7월 7일에 초도비행을 실시한다.
당연하게도 하워드 휴즈가 이 정찰기의 조종을 맡았고,
A-20 하복 2대가 XF-11을 에스코트할 예정이었다.
1시간 15분간의 짧았던 비행은 XF-11이 기체결함으로
캘리포니아 베벌리 힐스의 주택가에 추락하면서 끝났다.
하워드 휴즈는 이 사고로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갔지만,
애초에 이 사고 자체가 휴즈의 고집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휴즈는 초도비행 당시 미 육군항공대 규정과는 반대로
600갤런(2,300L)이 아닌 1,200갤런(4,500L)의
항공유를 연료탱크에다가 적재하라고 명령했으며,
무리하게 랜딩기어를 올리려고 시도했다.
에스코트하는 기체와의 무전 주파수를 사전에 맞춰놓지 않아
비행기가 추락하는 도중에도 A-20과의 교신이 불가능했다.
원래는 비행전에 손실된 유압유를 보충해야 했지만
육안으로 확인되는 손실이 없다는 이유로 보충하지 않았다.
결국 오른쪽 엔진 프로펠러의 유압유가 모두 유출되어
장착된 이중반전 프로펠러가 거꾸로 회전하기 시작했고,
항공기는 오른쪽으로 빙글빙글 돌면서 추락했다.
대당 5,500억짜리 시제기의 허무한 결말이었다.
휴즈 항공을 믿고 XF-11 개발에 1.1조,
H-4 개발에 5,700억을 쏟아부은 결과는 처참했다.
1.6조원이 넘는 예산으로 제작된 비행기는 단 3대,
이마저도 납기일을 2년 가까이 넘겼다.
나랏돈 1.7조를 도둑맞은 미 의회와
자신들의 알짜 노선망을 TWA에게 빼앗긴 펜암
그리고 그냥 하워드 휴즈가 싫었던 메인주 미 상원의원,
오웬 브루스터는 이 거만한 억만장자를 족치기로 결정한다.
다음편에 계속...
미 육군항공대 천사네. 해군이었다면 ㄹㅇ 반갈죽되었을듯 - dc App
휴즈이새끼
진짜 개미친새끼네
휴즈 이 미친새끼 ㅋㅋㅋㅋ - dc App
그냥 국가 예산으로 비행기 힙스터질만 한 거 아닌가
팩트)다
말 안쳐듣다가 떨어졌는데 용케 살았네 ㅋㅋㅋ
???: 어쩌라고
뭐야 씨발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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