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주의적 접근은 난징에서 자행된 학살과 같은 역사적 사건의 의미를 축소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난징은 당시 국민당이 장악한 중국의 수도였기 때문이다. 쉬샤오훙과 린 스필먼은 중국의 중학교 교과서에는 1979년까지 난징 학살에 대한 언급이 없었고 그 이후에는 아주 간략하게만 언급되었다고 주장한ㄷ. J.C. 알렉산더와 R. 가오는 1946년부터 1982년 사이에 중국공산당 기관지인 <인민일보>에서 난징대학살'이라는 표현은 겨우 15번 사용되었으며 그것도 대개는 지나가는 말이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일본의 잔학행위를 경시하려는 정부의 노력을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사례는 난징대학교의 역사가들이 학살을 기록으로 남긴 장문의 원고를 완성한 이후인 1962년에 나왔다. 그 원고에는 사상자 수에 대한 새로운 통계, 잔혹한 폭력을 보여주는 사진, 생존자들과의 인터뷰가 들어 있었다. 그런데 베이징은 이 원고를 일급 비밀로 분류해서, 난징시 측에 이 자료를 일본인 방문객에게만 보여주도록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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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심지어 전범 혐의자와 전쟁 종식 무렵 중국에 있던 일본인들에게까지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그 결과 중국인에 대한 잔학 행위에 가담한 혐의로 푸순 특별교도소에 구금되어 있던 일본인 1,000명 가운데 실제로 기소된 사람은 45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사면을 받고 즉시 석방되었다. 중국은 법정에 출두한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가벼운 형을 선고했으며, 1964년에는 이들 모두를 석방하고 일본으로 송환했다. 마찬가지로 중국은 전쟁이 끝난 후 중국 본토에 고립되어 있던 약 2만 9,000명의 일본 국민을 일본으로 송환하기 위해 신속하게 움직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일본이 이러한 송환에 대해 어떤 보답 조치를 취하기 전에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출처: 전후 일본과 독일이 이웃 국가들과 맺은 관계는 왜 달랐는가, 윌터 F. 해치 저, 이진모 옮김, 책과함께, 2024년, 192~19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