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달에 몽고군 때문에 6도(道)에 선지사용별감(宣旨使用別監)을 파견하는 것을 중지하였다. 당시 왕명을 받드는 사신들이 백성들에게 심하게 거두어들여 임금의 총애를 굳게 하고자 하였으므로 백성들이 매우 괴로워서 도리어 몽고군이 오는 것을 좋아하였다.


일자 1256년 02월 미상 (음)


출처: 고려사 世家 https://db.history.go.kr/goryeo/itemLevelKrList.do?itemId=kr&types=r


장군(將軍) 송길유(宋吉儒)를 보내어 청주(淸州)의 백성들을 해도로 옮겼다. 송길유는 백성들이 재물을 아껴 옮기는 것을 〈마음에〉 무겁게 생각할까 우려하여 공사의 재물을 모두 불태웠다. 이에 앞서 최항(崔沆)은 여러 도(道)에 사자를 보내 모든 주민들을 섬 안으로 몰아넣고, 따르지 않으면 그 집과 전곡(錢穀)을 불태우니, 굶어 죽는 이가 10명 중 8, 9명이나 되었다.


일자 1256년 08월 미상 (음)

+봄 정월. 대장군(大將軍宋) 송길유(宋吉儒)를 추자도(楸子島)로 유배하였다. 송길유는 성품이 탐욕스럽고 잔혹하며, 최항(崔沆)을 아첨하며 섬겼다. 일찍이 야별초(夜別抄)가 되어 죄수를 심문했는데, 양 손 엄지를 묶어 들보에 매달아놓고 양 엄지발가락을 모아서 무거운 돌을 매어서 땅에서 1척(尺) 정도 띄워놓고, 그 아래에 숯불을 피우고 2명을 시켜 번갈아가며 허리와 등에 매질을 하게 하였다. 죄수가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모두 거짓으로 자백하였다. 경상주도수로방호별감(慶尙州道水路防護別監)이 되어서는 주현의 사람과 재물을 검찰하여 섬으로 들여보내는데,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쳐서 죽였고, 혹은 긴 밧줄로 사람들의 목을 줄줄이 엮어서 별초(別抄)로 하여금 양쪽 끝을 잡아끌어서 큰물에 던지게 하고 거의 죽게 되면 꺼냈다가 조금 뒤 다시 그렇게 하였다. 또 남의 땅과 재물을 한정 없이 빼앗았다.
안찰사(按察使) 송언상(宋彦庠)이 도병마사사(都兵馬使司)에 탄핵하여 보고하였다. 그의 당인 김인준(金仁俊)·김승준(金承俊) 등은 사사로이 대사성(大司成) 유경(柳璥)과 대제(待制) 유능(柳能)에게 이르기를, “송길유는 내가 평소 좋아하는 자입니다. 들으니 안찰사의 탄핵하는 서한이 이미 도당(都堂)에 이르렀다고 하오. 만약 급하게 발표하면, 형세가 구원하기 어려울 것이오. 내가 틈을 타서 영공(令公)에게 좋게 말씀드리면 면할 수 있을 것 같으니, 공은 도모해 주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유경 등은 어쩔 수 없어 넌지시 당리(堂吏)를 타일러 〈왕에게〉 아뢰는 것을 정지시켰다. 최의(崔竩)의 외삼촌 거성원발(巨成元拔)이 이를 듣고, 최의에게 알렸다. 최의는 노하여 송길유를 유배하고 유경·유능·김인준 등을 꾸짖기를, “나는 그대들을 심복으로 여겨 의심하지 않았는데, 어찌 이처럼 전행(專行)하는가.”라고 하였다. 모두 엎드려 대죄(待罪)하였다. 김인준의 아비 김윤성(金允成)은 본래 천한 노비였다. 주인을 배반하고 최충헌(崔忠獻)에게 투탁하여 친시(親侍)가 되었다. 두 아들을 낳아 김인준과 김승준이라고 하였다. 김인준은 생김새가 장대하고 기운이 셌으며, 활쏘기를 잘하였다. 남에게 베풀기를 힘써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으며, 날마다 호협(豪俠)한 자와 무리지어 술 마시기를 일삼으니 집에는 저축이 없었다. 박송비(朴松庇)·송길유(宋吉儒) 등이 최이(崔怡)에게 칭찬하니, 마침내 신임을 얻어 출입할 때마다 반드시 김인준에게 부축하도록 하였고, 전전승지(殿前承旨)를 주었다. 김인준은 최이의 애첩 안심(安心)과 간통하여, 고성현(固城縣)의 바다섬으로 유배되었다가 몇년만에 돌아왔다. 최이는 최항(崔沆)을 불러 후사로 삼고자 하였는데, 김인준이 힘쓴 바 있었다. 최항이 정권을 계승하자 별장(別將)에 제수되고, 아우 김승준은 대정(隊正)에 제수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최의(崔竩)와 서로 의심하게 되었다.
일자 1258년 01월 미상 (음)

최의(崔竩)가 장군(將軍) 변식(邊軾), 낭장(郞將) 안홍민(安洪敏), 산원(散員) 정한규(鄭漢珪)를 강화수확사(江華收獲使)로 삼아 백성의 이익을 수탈하니, 백성들이 떠들썩하였다.
일자 1258년 01월 미상 (음)

+성중에 기근이 들어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었다. 승천부(昇天府)의 신성(新城)으로 옮기고, 양식과 밭을 지급하였다.
일자 1259년 01월 미상 (음)

연등(燃燈) 의례를 하고 제왕(諸王)·재추(宰樞)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왕이 두 번 손을 들어 군신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무릇 연회에 온 사람은 박수를 쳐서 나의 흥을 돋우어라.”라고 하였다. 술이 거나해지자 왕은 더욱 즐거워하였다. 군신(群臣)이 박수를 치고 춤을 추니, 땀이 흘러 몸에 흥건하였다. 저물 무렵에 이르러 파하였다.
사신(史臣)이 이르기를, “국가가 침략을 받은 이래로 연등회의 연회를 이미 6년 동안 정지하였다. 하물며 지금 동북 지역은 다 도적의 소굴이 되고 서남 지역은 배를 띄워 해도(海島)에 의탁하였으며, 길에는 굶어 죽은 시체가 서로 바라보고, 창고는 텅 비었다. 왕은 마땅히 세심하고 조심하며 부지런히 정사에 힘써, 어진 정치를 베풀고 무비(武備)를 닦아도 오히려 보전하지 못할까 근심해야 하는데, 사려가 이에 미치지 못하여 풍류를 즐기기만 하였다. 왕이 이미 노쇠하여 〈다가오는〉 그늘을 보면서 〈남아있는〉 해를 탐내니[視蔭愒日], 굳이 책망할 것이 없다. 당시 연회에 참석한 사람 중에 어찌 1, 2인의 유식자(有識者)가 없어, 왕과 함께 박수를 쳐서 흥을 돋우기를 태평한 날에 있는 것 같이 하고 한마디도 간언하는 자가 없었으니 어찌된 일인가.”라고 하였다.
일자 1259년 02월 미상 (음)

북계(北界)의 애도(艾島)와 갈도(葛島) 두 섬에 합해서 들어온 각 역(驛)의 사람들이 경별초(京別抄) 7인을 죽이고 몽고에 투항하였다.
일자 1259년 03월 미상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