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타(Kubota)와 김(Kim)은 유럽과 동아시아의 조총 운용 방식의 차이를, 전반적인 역량과 "군사 문화"의 근본적인 분기점으로 보았다. 이는 곧 일본과 한국에서의 "군사 혁명이 최소한의 수준에서 멈춘 이유 중 하나"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그들의 논리는 명확하다. 즉, 동아시아의 조총술은 명중률과 개인 기술 훈련에 집착한 나머지, 집단 전술적 기동(maneuver)이 아닌 일종의 무예(martial art)로 발전했으며, 유럽식 조총술의 특징인 엄격한 제식 훈련(drill), 규율(discipline), 집단 훈련(collective training)이 결여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절에서는 그들의 주장이 섬세함이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양측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이러한 '분기(divergence)'라는 개념은 증거 앞에서 쉽게 무너지기 때문이다. 조총술의 차이는 결코 절대적이지 않았으며, 그에 대한 반례들은 양쪽 모두에서 발견된다. 동아시아의 명사수들 또한 빠른 연속 사격과 집단 제식 훈련을 꾸준히 익혔으며, 반대로 유럽군에도 특수부대 수준의 저격수들이 존재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차이가 군사적 역량의 격차로 직결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각각의 조총술 방식은 장단점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고, 단순히 어느 쪽이 우위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첫 번째로 명확히 해야 할 점은, 동아시아가 단순히 명중률을 위해 속도를 포기한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조준 사격은 시간이 더 걸린다. 그러나 동아시아의 조총수들은 여전히 신속성과 연속성을 위한 일제 사격(volley fire) 훈련을 철저히 수행했다. 예를 들어, 기급(戚繼光)은 정밀한 조준과 표적 사격을 적극적으로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죽음의 우박(hail of death)'을 퍼붓는 것의 중요성 또한 강조했다.


이러한 대량 사격과 명중 사격의 균형은 중국뿐만 아니라 기급의 유산이 강하게 남아있던 조/선에서도 달성되었다. 조/선의 군사 서적인 『병학지남주해(兵學指南註解)』에서는 기급의 지침을 한 구절씩 매우 명확하게 주석하고 있다.


무려 2,000여 개에 달하는 주석 중 일제 사격(volley fire)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탄이 비어 있는 자는 재장전하고, 아직 탄이 남은 자는 다시 발사한다. (즉, 다섯 번의 순환 사격을 의미한다.) 이미 쏜 자들이 장전하는 동안, 아직 쏘지 않은 자들이 다시 발사한다. (이것은 순환을 완료하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뜻이다.) 사격은 결코 끊기지 않으며(즉, 끊임없는 연속 사격), 하루 종일 무턱대고 탄을 소모해서는 안 되고, (각 순서마다) 절대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 (차례차례, 순서를 어기지 않고 교대로 사격해야 한다.) 활과 화살 또한 조총과 동일한 방식으로 운용된다. (... 밤새도록 쉬지 않고 사격한다. 밤이 되면 적은 소탕되고, 각 조는 조총수 1인당 10회의 일제 사격을 수행하게 된다.)”


각 주석에서 명확히 하듯, ‘일제 사격’이란 5열 대형을 구성한 뒤, 사격과 장전의 순서를 끊임없이 순환하는 것을 의미했다. 활과 화살까지 결합된 이 방식은, 서양 조총술이 지향한 일종의 '불의 장벽(blanket of fire)'과 전혀 다를 바 없는 탄막 효과를 만들어냈다.


중국과 조/선의 사격 속도에 대한 정확한 데이터는 부족하지만, 이들 역시 다양한 사격 시스템을 운용했으며, 각 체계는 당연히 발사 속도와 탄도 밀도가 서로 달랐을 것이다. 안드라데(Andrade)는 기급의 조총 훈련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지휘관의 판단에 따라 다양한 층위 구성도 실험될 수 있었다. 즉, 5명 2열, 2명 5열, 또는 10명 단일 라인 등의 방식이다.”


둘째, 개인의 숙련도가 중요시되었다고는 해도, 중국과 조/선의 평균적인 조총수들은 유럽의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집단 훈련을 충분히 받았다. 사실 조준 사격을 동반한 일제 사격은, 조준 없이 쏘는 일제 사격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의 훈련과 엄격한 사격 통제가 필요했다. 그러니 기급(戚繼光)이 조준 사격을 단순한 개인 훈련이 아닌 집단 훈련으로 규정하고, 징이나 나팔 같은 신호에 맞춰 군사들이 우아하게 일제히 사격하도록 훈련시킨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실전에서는 이런 사격 통제가 극단적인 수준으로 집행되었다. 명령을 어기거나 신호를 무시한 조총수는 즉결 처형되거나 전투 후 처벌 대상이 되었고, 이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분대장은 목이 잘렸다. 아마도 구보다 마사시가 주창한 ‘군사적 분기’라는 개념은 일본의 특수한 상황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일본에는 무려 200개 이상의 사격 유파가 있었고, 조총술은 무예로 여겨지며, 제자들은 오랜 기간 사격술을 갈고닦았다.


이런 환경 속에서 일본에서는 강을 건너며 사격하거나, 누운 채 발가락 사이에 총을 끼워 쏘는 식의 믿기 어려운 기예성 조총술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구보다가 주장하는 핵심 논점은 설득력이 약하다. 그는 일본이 일제 사격을 수행했음을 인정했지만, 그 속도와 훈련 수준은 그의 주장보다 훨씬 더 높은 수준이었다.


에도 시대 전기부터 후기까지 일본의 군사 서적들은 조총 사격 훈련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 예를 들어, 《습포사의(習砲私議, 1823)》라는 조총 훈련서에서는 조총 훈련을 "엄격한 시험과 비교를 통해 정기적으로 실시해야 한다"고 명시했다. 이 매뉴얼의 한 훈련법은 일본 조총수들이 55미터(30간) 거리에서 24cm 폭의 작은 인체 모양 표적을 향해 행진하면서 신속하고 정밀하게 일제 사격하도록 지시했다. 타격 횟수와 각 일제 사격 간의 시간 간격은 매우 철저하게 기록되어 평가되었다.


비슷한 사례는 아이즈 번(會津藩)의 군사 매뉴얼에도 나타나는데, 이곳에서는 일제 사격 속도를 9등급으로 세밀하게 평가하는 체계가 존재했다. 발사 속도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현대 재현 실험에서는 일본식 화승총으로 5분 동안 8~9발의 조준 사격이 가능했으며, 속사용 카트리지(하야고, 早碁)를 사용할 경우 분당 최대 3발까지 발사할 수 있음이 확인되었다.


일본의 방대한 자료들은 아직 ‘군사 혁명’ 논쟁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진 적이 없으며, 향후 더 나은 데이터가 발견될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유럽에서는, 전열보병들은 주로 속사에 집중했지만, 전문 경보병이나 산병(skirmisher) 부대는 명중률을 중시했다. 이들은 대규모 일제 사격이 아닌 조준 사격을 수행했으며, 동아시아와 마찬가지로 정밀한 총기나 때로는 강선이 들어간 사냥총을 사용했다. 예컨대 17세기 초부터 유럽 일부 저격수들은 적 지휘관을 저격하기 위해 활용되었다.


영국 내전(1642~1651) 당시, 셔번 성(Sherborne Castle) 포위전에서 한 명의 저격수는 '버딩피스(birding-piece)'라는 사냥총으로 적 장교들을 조준 사격해 두각을 나타냈다. 같은 전쟁에서 영국 장군 조지 몽크(George Monck)는 각 부대에 사냥총을 든 저격병 6명을 배치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들은 "적 병사를 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부대의 장교만을 노리라"고 명령했다.


1808년경이 되면, 유럽 전장에서는 장교들 간의 상호 저격이 더 이상 보기 드문 일이 아니었고, 비록 군사적 예의 위반으로 간주되었지만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18세기 후반까지 이러한 저격병들은 필요에 따라 일시적으로 모집된 자원병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동아시아 군용 조총과 유사한 사냥총(fowling piece)으로 사격 연습을 하며 사격술을 익혔다. 혹은 민간 슈첸(Schuetzen) 사격 대회에 참가해, 민수용 강선총과 활강총으로 명중률을 겨루며 실력을 쌓기도 했다. 어쨌든, 정규 군인들과는 달리 이 자원병들은 대체로 훌륭한 명사수였다.


예를 들어, 30년 전쟁(1618–1648) 당시 독일 농민들은 신성 로마 제국군 약탈대에 대해 치명적인 사격 능력을 보여줬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자신의 땅에서 까마귀나 해충을 사냥하는 데 익숙했던” 이 농민들은 “매우 뛰어난 명사수였고(특히, 목표물이 살아있을 때 더욱 명중률이 좋았다)” 그들의 사냥총은 “전투용 머스킷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손에 익숙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례들은 전쟁 수행 방식이 동서양 모두에서 매우 가변적이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성급한 일반화는 피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한쪽의 조총 운용 방식이 다른 쪽에 비해 절대적인 우위를 가지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실제로 시간이 흐르며 서양식 총포술이 우위를 점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유럽과 동아시아 사이의 군사적 전력을 직접 비교하는 것은 어렵다. 왜냐하면 근세 시기에 양측 간에 벌어진 정규 전투의 표본 자체가 매우 적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상황에서는 명중률을 중시하는 동아시아식 조총술이 확실한 이점을 가졌다고 추론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동아시아 조총병이 유럽 보병과 거리 싸움을 벌였을 경우, 사거리가 더 긴 명중 사격으로 유럽군의 반격 사거리 밖에서 타격을 가할 수 있었다.


물론 이 상황에서도 유럽군의 산병(skirmisher), 특히 라이플로 무장한 산병이 교란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 조준 사격에서 우위를 가진 동아시아 쪽이 확실히 유리했을 것이다. 명중 사격의 이점은 목표가 좁은 전면을 가지고 있을 때 더욱 명확해진다.


물론 이런 상황은 드물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전투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화력 극대화를 위해 횡대(line formation)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외적인 사례도 있다. 1814년 블레이던스버그 전투에서는 영국 보병이 좁은 다리를 건너는 동안, 수백 정의 머스킷이 유효 사거리 안에서 무차별적으로 발사되었지만, 사실상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만약 그 자리에 조/선의 조총병이 있었다면, 훨씬 더 치명적인 결과가 나왔을 것이다.


이를 1636년 김화 전투와 비교해보라. 당시 조/선 조총병들은 만주 기병을 좁은 계곡으로 유인한 뒤, 가까운 거리에서 일제 사격을 퍼부어 참혹한 피해를 입혔다.


동아시아의 우위는 단순히 명중률에만 있지 않았다. 동아시아 조총병들은 총알을 탄약통 안에 단단히 밀어 넣고 정성스럽게 장전했기 때문에, 서양 조총병들과 달리 높은 지형에서 아래로 사격하는 것이 가능했다. 일본에서는 실제로 경사 사격, 즉 ‘사지야(下射屋)’라 불리는 훈련법까지 존재했다. 반면, 유럽 조총병들은 탄환을 제대로 밀어 넣지 않았기에, 총구를 아래로 향하면 탄환이 쉽게 빠져버리는 문제가 있었다.


이 문제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사례가 있다. 1654년, 청-조/선 연합군과 러시아 함대가 강가에서 전투를 벌였다. 당시 청-조/선군은 퇴각 중이었으나, 조/선 조총병들이 강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참호를 쌓고 포진했다. 이들은 높은 지형에서 러시아군을 향해 집중 사격을 퍼부었고, 결국 러시아군은 참다 못해 언덕을 돌격했다. 하지만 러시아군은 조/선군의 효과적인 반격 사격에 의해 참패했고, 시체를 산처럼 쌓은 채 물러났다.


만약 양군의 위치가 바뀌었다면 상황은 정반대가 되었을 것이다. 언덕 아래에서 올라오는 적을 향해 총을 겨눌 경우, 러시아군의 탄환은 총구에서 그대로 빠져나갔을 것이고, 그들은 사실상 무방비 상태로 전투에 임했을 것이다.


이와 유사한 사례는 유럽에서도 최소 한 번 있었다. 1636년 비트슈톡 전투에서 제국-작센 연합군은 언덕 위에 포진했지만, 총기를 제대로 장전하지 않았기에 치명적인 대가를 치렀다. 적군이 언덕 아래에서 올라오자 총을 아래로 겨누는 순간, 총알이 총구에서 떨어져 나가버려 사실상 무방비 상태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유럽식 조총술이 더 우위를 보였던 상황도 있었다. 유럽의 조총술은 단순히 명중률보다 발사 속도와 화력 밀도로 압도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1525년의 파비아 전투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 기병들은 스페인 조총병들의 “치명적인 납탄의 일제 사격”에 의해 말에서 문자 그대로 날려졌다. 기록에 따르면, 그 탄환은 “기병 한 명을 꿰뚫는 데 그치지 않고 두 명, 심지어 말 두 마리까지도 관통했다.”


놀라운 것은, 이 스페인 조총병들이 동아시아 병사들처럼 참호나 방어진지 없이, 심지어 짙은 안개 속에서 싸웠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격은 전장을 “죽어가는 기사들과 산처럼 쌓인 말들의 비참한 시체로 뒤덮었다.”


파비아 전투 이후에도 많은 유럽군은 여전히 기병을 유지했지만, 17세기 중반이 되면 전통적인 정면 기병 돌격은 더 이상 효과적인 전술로 간주되지 않았다. 유럽의 조총 화력이 그 정도로 강력해졌기 때문이다.


반면 동아시아의 총병술은 기병 돌격에 그렇게 강하지 못했다. 동아시아에서 총병이 기병에게 승리한 이야기가 하나 있다면, 그만큼 참혹하게 기병 돌격에 무너진 사례도 있다. 일본에서는 흔히 나가시노 전투(1575)에서 노부나가의 총병대가 기병을 막아냈다고 알려져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일본 총병들은 심지어 경장 기병에게도 정면으로 맞서 싸우기 어려웠다.


실제로 임진왜란(1592-1598) 기간 동안, 일본 총병들은 몽골 기병 전술을 계승한 명나라 기병에게 자주 기동전에서 말려들었다. 마찬가지로 조/선의 총병들도 강력한 만주 기병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 그다지 성공적이지 않았다. 특히 밀착 전투 지원 병력이 없는 개활지에서는 매우 취약했다.


사르후 전투 이후, 조/선군은 뼈아픈 교훈을 얻었고, 지형과 성채를 적극 활용하거나 적 지휘관을 저격하고 근거리에서의 집중 일제사격으로 만주 기병을 상대로 몇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보면 동아시아 총병들은 여전히 기병을 상대할 때 방어 구조물 뒤에서 사격하는 것을 선호했고, 이로 인해 유럽 병사들과는 달리 종종 불리한 상황에 처하곤 했다.


무엇보다도 예기치 못했던 유럽식 총병술의 숨겨진 강점이 있었고, 이것이 결국 실질적인 군사적 분기점으로 이어졌다. 동아시아에서는 저격 훈련을 받은 보병이 동시에 일제사격수이기도 했다. 그래서 평균적으로 동아시아 보병은 유럽 전열 보병,보다 더 치명적이고, 다재다능하며, 유연성이 뛰어났다. 이는 17세기와 18세기 동안 동아시아의 확실한 우위였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그 우위는 더 이상 유지되지 않았다. 유럽에서는 경보병(light infantry)이 전열 보병(line infantry)과 별도로 존재했기 때문에 저격술의 특화가 훨씬 더 적극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초창기에는 명중률에 대한 유럽의 무관심 때문에 오히려 유럽이 정확성 면에서 뒤처져 보였다. 하지만 18세기 후반 경보병 전술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유럽은 케네스 포머랜츠의 표현을 빌리자면 오히려 ‘후진성의 이점’을 얻게 되었다.


즉, 경보병이 군대 내에서 정식으로 제도화되면서, 이들은 일반 보병,보다 더 많은 실탄 훈련과 사격 연습 기회를 부여받았다. 동시에 유럽에서 발달한 강선(rifling) 기술의 혜택도 집중적으로 누릴 수 있었다.


이렇게 유럽식 총병술에 내재했던 작지만 예상 밖의 불균형은 19세기 들어 더욱 심화되었다. 빈번한 전쟁으로 인해 유럽의 사격 정확도는 동아시아 수준을 따라잡았고, 심지어 그것을 넘어섰다. 바로 이 시점이 서구가 군사적으로 우위를 점하게 된 순간이며, ‘군사적 균형의 시대(Age of Parity)’가 마침내 끝나고 ‘대군사적 분기(Great Military Divergence)’로 전환된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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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 Gruyter Studies in Military History vol.3에서 강혁훈(Hyeok Hweon Kang) 의 논지 중 핵심적인 부분들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