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40부대와 한국전쟁의 유격전 – 10. 에이블 계획과 서해안 유격대(p.36~p.40)


Dark Moon : Eight Army Special Operation in the Korean War

다크 문 : 한국전쟁기 미 8군 특수작전

Ed Evanhoe 저



3. 윌리엄 에이블(레오파드) 기지 – 1951년 1월-2월(1)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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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정보에 다수가 황해도 해주 서부에 일제 99식 소총, 소련제 38구경(유형 불명), 그리고 소수의 미제 카빈으로 무장한 10,000명의 의용대를 보고함이 식별. 유형별 대략적인 숫자를 확인하기 위해 접촉을 지시. 공중 투하를 위한 적합한 낙하 지점. 주제와 연결된 추가 정보. 미 8군 통제 하의 일제 탄약 재고가 있는가? 작동하는 다수의 소총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며 탄약을 가용할 수 있다면 의용대가 사용할 수 있을 것.


아서 S. 달리

UN Partisan Forces in the Korean Conflict*


(*) 해당 내용은 아서 S. 달리(극동사령부 군사지대 MHD-3) 저 ‘UN Partisan Forces in the Korean Conflict 1951-52‘에 수록된, 95.7기동전단(한국 해군)장이 미 8군에 보낸 전문으로, 당시 한국 해군은 95.7(전쟁 초에는 96.7)기동전단의 단일 부대로 편제되었고, 해참총장 손원일 제독이 예하의 95.70기동전단장이 되어, 95.7기동전단장 미 해군 마이클 루시(Michael Luosey) 중령의 통제 하에 협의하여 작전을 지휘했음.

함명수 제독의 국방일보 기고문 ’바다로 세계로!’에 따르면, 1월 5일 황해도 송화 군수가 발동선을 타고 61함에 지원을 요청한 것을 함장 최효용 중령이 보고하면서 그로부터 상황을 본격적으로 인식하였다고 전하고 있음.



1951년 1월 7일, 그 당시에는 경미해 보였지만, 그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을 효과를 불러올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졌다. 단, 소수이지만 목소리를 내던, 레인저 및 특작부대를 주창하던 장교들 만은 예외였다. 동료들은 이들을 애정을 담아, 혹은 딱히 애정을 담지는 않은 체, 의도는 좋으나 엉뚱한 방향의 방안을 내놓는 ”과격한 또라이들*“로 여겼다.


(*) bunch of “wild-eyed nu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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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격한 또라이” 중 한 사람이 바로 미 8군 정보참모인 존 H. 맥기 대령이었다. 1932년 웨스트 포인트 졸업생인 맥기는 필리핀 함락 당시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1943년 말, 그와 다른 포로들을 일본으로 싣고 가던 배가 남 필리핀 제도 민다나오 인근에서 어뢰에 피격되었다. 배는 침몰하기 전 해안으로 위태롭게 향했다. 맥기는 해안으로 헤엄쳐 정글로 탈출했다가, 거기서 우호적인 현지인들을 만나 웬델 퍼틱 대령의 유격대 본부로 안내되었다. 그 곳에서 맥기는 잠수함으로 소개될 때 까지 퍼틱 휘하의 작전 장교로 일했다.* 이후 맥기는 전쟁 중 미 6군 정보참모부의 유격대 연락 장교로써 필리핀으로 다시 돌아왔으며. 이 자리에서 그는 전선 후방의 습격 및 정찰 임무를 수행하던 6군의 알라모 스카우트 부대와 긴밀히 접촉하게 되었다. 맥기는 유격대와 알라모 스카우트의 성과에 깊이 감명받아 특수작전 주창론자가 되었다.


(*) 맥기의 수기에 의하면 탈출은 44년 6월이었고, 배는 피격된 게 아니라 기회를 틈타 뛰어 내린 것이며, 볼러 중령이 지휘하는 서부 민다나오 지대 본부로 탈출한 맥기는 유격대 근무를 원했으나, ’투항자‘를 싫어했던 퍼틱에게 거부되었음. 이에 후송을 요청했고, 그 때 발생했던 신요마루 사건의 생존자들을 인솔해 9월 28일 자신을 포함한 82명과 함께 탈출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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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기의 수기 “Rice and Salt”에 수록된 감옥선에서의 탈출경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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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유격대의 보급과 인원 후송에 사용되었던 잠수함 USS 나왈 호(SS-167). 

맥기와 신요마루 호의 생존자들을 탈출시킨 것도 나왈 호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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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저항운동 선전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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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6군 직할의 특수 수색대였던 알라모 스카우트 부대. 


일련의 사건에서의 첫 에피소드는 북한 서남해안에서 작전하던 UN 기동전단으로부터 미 8군 사령부로 날라온 전문이었다. 이 전문은 황해도 남부에서 공산당과 싸우고 있는 수천명의 비정규군 의용병들이 존재함을 알렸다. 이들이 무슨 무기를 사용하는지는 명시되지 않았다.

(~p.36)


95.1 기동전단에서 보내진 이 전문은 1951년 1월 7일 1400시경 미 8군에 도착했다. 전문이 “유격대”와 관계되었으며, 맥기 대령은 미 8군 전속의 유격 및 특수작전 전문가였으므로, 곧장 전문은 그의 책상 위에 도착했다. 일찍이 1950월 12월 중순 즈음, 맥기는 반공 활동이 북한에서 지속되고 있었음은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 전문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어디서, 어느 정도의 규모로 일어나는지에 대해서는 정보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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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월 7일에, 미 8군은 38도선에서 철수하여, 새로운 주저항선(Main Line of Resistance) 혹은 전선을 형성하는 중이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다시 북쪽으로 조심스러운 진격이 이뤄졌다. 적의 남진을 아주 약간이라도 방해하는 것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누구든지 보탬이 되었으므로, 수천명의 의용병들이 아직도 북한의 서남부 지역에서 적군과 싸우고 있다는 정보는 희소식이었다.


맥기는 즉시 95.1기동전단에 전문을 보내어, 비정규 병력들의 대략적인 수와, 무기의 종류, 그리고 기동전단에게 가능한 그 어떤 정보든 제공해 달라고 요청했다. 전문이 발송되자마자, 맥기는 기동전단에게서 온 전문에 담긴 내용을, 다음 날 리지웨이 장군의 아침 브리핑의 본인 부분에 발표할 노트에 포함시켰다. 공산 유격대들은 지속적으로 미 8군 후방제대에 두통을 유발하고 있었고, 맥기는 리지웨이가 공산주의자들도 마찬가지로 후방 지역 안정화에 문제를 겪고 있다는 걸 듣고 싶어 할 것이라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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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 장군이 1950년 12월 13일 지프 사고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기 전, 미 8군 사령관일 때는 미 8군 사령부에서 특수 작전의 진행이나 우군 유격부대를 창설하자는 논의는 특히 환영받지 못했다. 맥기는 101공수사단이 노르망디 D-Day에 강하할 당시 사단장이었던* 공수부대 출신 장성인 리지웨이는 그보다 좀 더 수용적일 것이라 믿었다.


(*) 리지웨이는 82공수사단장이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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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공수사단장 시절 시칠리아에서의 리지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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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벌지 전투 시기의 18공수군단장 리지웨이(오른쪽 끝). 그 왼쪽이 몽고메리, 맨 왼쪽이 한국전쟁 시기 미 육군참모총장인 당시 7군단장 콜린스.

리지웨이는 마켓가든 작전 직전 새로 개편된 18공수군단장으로 부임했는데, 다만 마켓가든 작전에서는 영국 1공수군단이 작전 지휘를 맡아 참여하지 않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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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년 4월 미 8군 사령관 시기의 리지웨이(지프 맨 왼쪽), 극동사령부 부참모장 도일 히키 소장(가운데), 맥아더(오른쪽)


맥기의 생각은 옳았다. 리지웨이가 이 정보에 “흥미”를 느낀 것이다. 리지웨이는 이 예상치 못한 자산을 미 8군이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에 대한 맥기의 의견을 자세히 물었다. 맥기에게는 준비된 대답이 있었고, 유격대가 미 8군을 지원하기 위해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15분 간 자세히 설명했다. 이 발표에 감명 받은 리지웨이는, 미 8군 작전참모부에 맥기의 구상을 발전시킬 것과, 동시에 미 8군의 다른 작전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육지에서 싸우는 유격대에게 가능한 무기와 탄약을 제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p.37)


이것이야말로 맥기가 바래오던 반응이었다. 서랍장에 들어가 있던 에이블 계획이 맥기의 계획의 기반이 되었다. 에이블 계획은 맥기가 1950년 8월, 그 당시에는 유력해보였던, UN군이 한국에서 철수하게 되는 경우를 대비해 작성한 우군 유격대의 훈련, 투입, 보급 및 통신 유지를 위한 우발 계획이었다.


이틀 뒤 지구전과(Attrition Warfare Section)가 미 8군 작전참모부 기타업무실(G-3 Miscellaneous Division*)의 일부가 되었는데, 다만 1월 15일 이전까지는 비공식적이었다. 최초 계획에서는 기타업무실이 심리전과(Psychological Warfare Section)와 특수기획훈련과(Special Projects Training Section) 즉 기장의 미 8군 레인저 훈련소, 그리고 지구전(유격전)과의 부서로 나뉘도록 했다. 맥기 대령은 기타업무실의 실장으로 지명되었다. 맥기와 같은 대령이었던 미 8군 선임 심리전장교가 그가 맥기보다 선임이며, 기타업무실은 심리전과 휘하에 있어야 한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이 문제는 맥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결되어 1951년 1월 15일, 기타업무실은 작전참모부 예하의 독립 조직이 되었다**.


(*) 이 때는 단으로 승격되기 이전, 작전참모부 예하의 참모조직이었으므로 임의로 기타업무실로 번역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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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리전과 또한 기타업무실이 아닌 작전참모부 직속의 독립 조직이 된 것으로 보임. 한편, 맥기는 첩보 수집 임무가 유격 작전에 제약을 줄 것을 우려해 극동사령부 정보참모부의 통제를 벗어나 극동사 작전참모부 혹은 별도의 합동사령부 예하에서 작전하고자 했으나, 바람과 달리 극동사 정보참모부 예하의 FEC/LG(극동사령부연락단, 페클렉. 자세한 건 정보적 상황(3)편 참고)와 협조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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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1월 13일에 맥기가 제안한 지구전과 TO의 원안. 


맥기가 새 분과를 창설하고 지휘하라는 구두 허가를 받은 후 처음으로 한 일은 윌리엄 A. 버크 소령을 부관으로 부임시킨 것이었다. 그 다음은 버크를 노획한 탄약과 무기를 찾고, 신속하게 서해안의 유격대에게 전달하게 하도록 보낸 것이었다. 굉장히 유능하고 열정적인 기갑 장교였던 버크는 부산 병기창에서 노획 무기와 탄약을 찾았다. 무기와 탄약은 한국 해군 함선*에 실렸고 이틀 뒤 백령도의 한국 해군 피난민 철수 지휘소*로 향했다.


(*) 원문은 ROK Navy’s refugee evacuation command post. 해군 1함대는 1951년 1월 5일부터 (송화 군수가 지원을 요청했던)PF-61함을 중심으로 황해도 연안에서 피난민들을 구출하고 청년 의용대를 지원하는 작전을 펼치고 있었으며, 9일에는 부산에서 탄약 2만 발을 적재한 PC-704 지리산함과, 군의관 및 위생하사관을 탑재한 LST 단양호가 출동했음. 이후 1월 20일 해군은 PC-702함 함장이자, 당시 인천경비대사령관이던 이희정 중령을 사령관으로 하는 서해지구방위사령부를 백령도에 설치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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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도선에서 2마일 남쪽에 위치한 큰 섬인 백령도는 황해도 최서남단으로부터 약 15마일 떨어져 있다. 대청도, 소청도, 그리고 백령도의 세 섬이 이루는 군도 중에서 백령도는 가장 크고, 최북단의 섬이었다. 전쟁이 발발했을 때, 백령도의 공산당 동조자들이 섬을 점거했다. 1950년 7월 첫째 주 UN군 함정이 서해안에 도착함으로써 북한이 탈취된 섬을 활용하는 것은 저지되었지만, UN군은 10월 초 클라크 대위의 비정규군이 도착하기 전까지 섬을 탈환하지는 않았다. 12월 초, 육지의 피난민들이 해안의 섬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백령도는 한국 해군의 통제 하에 주요 피난민 중심지가 되었다. 피난민과 함께, 의용군(유격대) 병사들도 도착했다.


버크 소령과 해군 첩보대의 문 소령*은 무기를 확실하게 전달하고, 황해도 남서부와 서해안 군도의 상황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를 얻기 위해 무기 수송대와 함께했다. 무기와 탄약은 육지의 의용병들을 돕기에는 너무 늦게 도착했으므로, 버크는 섬의 방어를 목적으로 무기를 백령도의 유격대에게 넘겼다.

(p.38)


(*) 문 소령은 이 시기 서해지구 첩보대장, 서해지구방위사령부 창설 후엔 초대 참모장이었던 문기섭 소령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임.

문기섭 소령은 3월 이희정 중령의 후임 사령관이 되었다가, 이후 6월 해병대 강기천 중령과 교체되었음.


버크는 1월 17일~18일에 북한 서해안에 유격대 사령부를 수립하는 것이 자원을 투입할 만한 가치가 있음을 납득시킬만한 정보를 가지고 백령도에서 돌아왔다. 버크는 백령도에서 알게 된 것을 에이블 계획의 개정본에 포함했다. 에이블 계획의 초기본은 미군 지휘 하의 한국 육군 및 해병대가 유격전 기술을 훈련받은 후, 작전조들이 적 후방에 침투하여 작전기지와 무선 통신을 수립하도록 되어있었다. 작전조는 거기서 현지 주민들을 모집, 무장, 훈련시켜 유격전을 수행하고, 동시에 최신 전술 첩보를 수집하고 미 8군에 보고할 것이었다. 

(~p.39)


이 초기본은 2차세계대전 당시 맥기의 필리핀 유격대 경험에 강하게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거기서는 도피중인 미군이 역시 도피중인 필리핀 척후대나 병사들의 소집단을 지휘하게 되면서 유격대 활동이 발달되었다. 생필품 때문에, 이들 소집단은 지역민들을 약탈하든, 혹은 일본군 트럭이나 소규모 주둔군을 습격하든 둘 중 하나를 택하도록 강제되었다. 필리핀인이 이끄는 집단의 상당수는 적보다는 지역민을 희생양으로 삼았지만, 미국인이 이끈 유격대는 물자를 얻기 위해서 주로 적 호송대를 공격했다. 부를 얻기 위해 일본군에 협력한 부유한 상인과 지주만이 예외였다. 미군이 이끄는 유격대들이 서로 합류해, 더 크고 효과적인 부대를 형성하고 미군 정규군을 본뜬 지휘체계를 수립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지휘체계는 호주의 맥아더 사령부와 접촉이 이루어지고, 잠수함과 공중투하로 보급품이 도착하기 시작하면서 보강되었다.


맥기, 당시 대위가 감옥선에서 해변으로 헤엄쳐 나왔을때 미군 주도의 유격대 조직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에겐 이러한 작전이 익숙했으며, 상당히 잘 작동했음을 알았기에 그의 유격부대 계획이 이를 본뜬 건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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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크의 에이블 계획 개정안의 도입부.

이 뒤에는 기지사령부의 조직, 인원과 장비 편제, 군(郡)별로 유격대 간부후보생들의 훈련 및 유격대 조직, 통신 망의 구성 등이 세부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에이블 계획의 개정안은 원안과 비슷하게 나왔다. 계획에서는 각 유격대 기지는 전략적으로 위치되어야 하고, 자체적인 기지 방호 능력을 갖춰야 했으며, 중앙 사령부와의 통신을 위한 고출력 무선 기지 및 유격대 부대들 간의 내부 무선망이 운영되어야 했다. 계획에는 또한 유격대원에 대한 정보 수집, 무선 운영, 개인 화기, 전투 단위 조직, 보급, 공중투하, 그리고 폭파의 분야별 훈련이 포함되었다. 각 유격대 기지와 주요 유격 부대는 미군 장교에 의해 지휘되어야 했으며, 그가 부대의 훈련과 중앙 사령부의 명령에 따른 전개를 책임 질 것이었다. 유격대 사령부에 부속될 미군은 최초에는 11명의 장교와 사병으로 정해졌으며, “필요 시” 추가 인원이 제공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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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격대원들에겐 급료가 지급되지 않았다.


에이블 계획을 개정하면서, 버크는 이북에서의 유격전 수행을 위한 여러 작전적 구상을 구체화했다. 그 중 하나가 유격대가 물자와 무기, 장비과 그 밖에 적지 후방에서 필요한 모든 것들을 스스로 구해야만 한다는 개념이었다. 유격대 기지는 유격대 단대의 발족을 위한 훈련과 무전기, 폭발물과 일부 무장, 그리고 의료 물자를 제공할 것이었지만, 부대가 육지에 발을 내딛은 후로는, 스스로 헤쳐 나가야만 했다. 최우선 개념은 아마도 유격대가 보수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개념들은 잘 먹혀들었다.

(~p.40)


-11. 윌리엄 에이블 기지(p.41~43)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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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소개

Dark Moon : Eight Army Special Operation in the Korean War는 95년에 출판된,

전쟁 전 미군이 운용했던 이북 출신 한국인으로 구성된 첩보부대 켈로부대와,

이북에서 자생하던 여러 반공유격대를 미군 휘하로 편입하여 통합한 부대인, 

미 8240부대가 한국전쟁 당시에 수행한 비정규전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임.


국내 서적 및 논문에도 참고문헌으로 사용되는 등 연구사적 가치가 있으나, 지금 기준으로는 오래되어 정확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많고, 특히 한국인 대원의 인명 등이 부정확한 경향이 있음.


위 번역글은 여타 책의 참고문헌에 있는 원문의 서술이 궁금한 경우에 참고하는 것을 의도로 작성되었으므로

내용 상 오류가 있음을 양지하고 읽어야 하며,


최신화되고 정확한 내용은 군사편찬연구소 발간 한국전쟁의 유격전사나,

(군사편찬연구소 홈페이지에서 열람 가능)

미 특수전사령부 역사실 홈페이지의 한국전 부분 기사가 이 책보다도 충실하고 비교적 정확하게 설명되어있으므로 이 쪽을 찾아보는걸 권함.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홈페이지

https://www.imhc.mil.kr/user/indexSub.action?codyMenuSeq=70543&siteId=imhc&menuUIType=top

미 특수전사령부 역사실 홈페이지 

https://arsof-history.org/arsof_in_korea/index.html



원래는 빠르게 2편으로 나눠 올리려 했는데, 이것 저것 부연하다보니 3편으로 늘어나버림..


번역에 이상한 부분이 있거나 글 가독성이 좋지 않다면 마음껏 건의해주시면 감사하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