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당시 경비대의 장교들은 더러 만군이나 중국군 출신 장교들이 있기는 하였지만 대부분이 군사영어학교를 나온 일본군 출신 장교들이었기에, 모든 군사훈련은 구령만 우리 말로 바꾸고 교범도 없이 일본식으로 실시하고 있었다. 또한 미군 측에서 장비를 지급해 주지 않아 일본군이 사용하던 99식과 38식 소총을 가지고 도수훈련과 집총훈련을 실시했다.
한편, 내무생활도 일본식 그대로를 답습하고 있었다. 몹시 힘들고 불합리했는데, 이는 일본군 출신 경비대의 장교와 하사관들이 전에 일본 군대에서 무자비한 기합 속에 훈련을 받아왔던 잔재가 그대로 남아 있는 탓이었다. 이와 반대로 합리적인 방법으로 내무생활을 지도해 나가는 장교들도 더러 있었다. 그리고 군기는 하극상과 같은 사건이 자주 생기는 등 문란한 상태였지만 모병과 확장은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또 한 가지의 고통은 일본 군대식 기합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사병의 내무생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관학교 내무생활에서도 크게 다를 것이 없었다. 기합과 구타는, 신생 국군의 간부가 된다는 포부를 품고 모여든 후보생들에게 큰 불만의 씨앗이 되었다. 그리하여 몇몇 후보생들은 더 이상의 교육을 포기하고 사관학교를 떠나기도 했다. 이런 행위들이 조금도 시정되지 않은 채 계속되다 보니 마침내 불미스런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우리 2기생 교육이 거의 끝나가고 있을 무렵인 12월 초, 교장인 원용덕 대령이 제8연대장으로 전보되고 군영 출신인 김종석 소령이 대리근무를 하고 있을 때 생도대장을 구타한 하극상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후보생들에게 가한 기합과 구타로 그동안 누적되어 온 갈등과 불만이 폭발하였던 것이다...
내가 중대를 지휘하면서 고통스러웠던 것은 탈영병 문제와 내무반에서의 구타행위, 그리고 급식문제였다. 이것은 내가 이미 제1연대에서의 사병생활과 사관학교의 교육과정을 통해서 겪은 일들이었다. 이러한 일들은 우리 연대뿐만 아니라 전 경비대에서 겪고 있던 공통의 어려움이었다. 그리고 구타행위를 근절시키기 위해 나는 중대 병영의 가정화로 이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해 보려고 구체적인 방안들을 강구하고 곧 실천에 옮겼다.(중략)
다음으로는 하사관들의 교양교육을 실시해 나갔다. 우리 중대는 연대 중에서도 가장 먼저 완편된 선임중대였기 때문에 일본군 출신 하사관들이 특히 많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일본 군대식 잔재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기합과 구타로서 병사들을 통솔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악폐를 일소하기 위하여 책임소재를 확실히 할 것과 부하 사병들에 대해서는 분대장과 소대 선임하사관들이 엄한 형님이 되는 동시에, 인자한 누나가 되어 줄 것을 강조하고 중대원을 지도해 나가도록 했다...
출처
신념의 삶 속에서(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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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타가 진짜 힘들지
ㄹㅇ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