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賊出海,復為總兵俞大猷、叅將盧鏜、把總婁宇所敗,乃復登陸,結巢陶宅。其一艘飄泊海門,則賊酋林碧川為之首,與其下百二十餘賊,復登大陳山,為把總任錦俘斬,無遺。


왜적이 바다로 나갔다가 총병 유대유, 참장 노당, 파총 누우에게 다시 패하고, 다시 상륙하여 도자(陶宅)에 둥지를 틀었다. 그 중 한 척은 해문(海門)에서 표류하였고, 그 배는 적의 우두머리 임벽천(林碧川)이 이끌고 있었으며, 그 휘하에 120여 명의 왜적이 있었다. 이들은 다시 대진산(大陳山)에 상륙하였으나, 파총 임금(任錦)에 의해 모두 사로잡혀 참수되었고, 한 명도 남지 않았다.



八月,劇賊五十三人流犯蘇州,提督都御史曹公邦輔討平之。


8월, 흉악한 도적 53명이 소주(蘇州)를 침범하였으나, 제독 도어사(都御史) 조방보(曹邦輔)가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ㅡ 주해도편






유대유같은 장수들이 왜구 토벌하던 도중 8월에 흉악한 도적 53명이 소주에 침범하였다가 조방보에게 막혔다는 기록


얘네들이 그 유명한 53인 무쌍의 기록자들인데 상세한 내용은 어떤가?








+倭賊百餘自浙江紹興府上虞縣爵谿所登岸,突犯會稽縣高埠,奪民居樓房據之。知府劉錫、千户徐子懿等分兵圍守,賊潛縛木筏,由東河夜渡,圍而出。鄉官御史錢鯨遭於蟶浦見殺,賊遂流刼杭州而西,歷於潛、西興、昌化,内城大駭。



+ 왜적 100여 명이 절강성(浙江省) 소흥부(紹興府) 상우현(上虞縣) 작계소(爵溪所)에서 상륙하여, 회계현(會稽縣) 고부(高埠)를 기습 침공했다. 이들은 백성들의 가옥과 누각을 점거하며 거점으로 삼았다. 지부(知府) 유석(劉錫)과 천호(千戶) 서자의(徐子懿) 등이 각각 병력을 이끌고 포위해 감시했다. 그러나 적들은 몰래 뗏목을 묶어, 동쪽 강(東河)을 따라 밤을 틈타 강을 건너 포위망을 돌파하고 탈출하였다. ㅡ 명 세종숙황제실록 권423 가정34년 6월 7일 2번째기사







100여 명에서 시작









+乙巳,高埠逃倭自杭州西椋者,沿途傷已,至嚴州淳安縣,僅六十餘人,以浙兵副怠,由濠嶺盤山突入歙縣黃柏源口。徽州府守隘官民兵壯五百餘人,見賊,悉奔潰。賊遂流刼績溪,至旌德,典使蔡堯佐率兵千餘禦之,不克,賊遂叩縣南門,縱大屠掠。過涇縣,知縣丘時庸引兵追擊于塘,敗績。賊乃趨南陵。縣丞莫逞以三百人守分界山,見賊悉奔竄,賊遂入縣城,縱大焚居民房屋。于是建陽衛指揮繆印、當塗縣丞郭映郊、無湖縣丞陳一道、太平府知事郭樟,各承檄以兵來援,與賊遇于縣東門。印等引弓射之,賊悉手接其矢,諸軍相顧愕,貽,遂俱潰。一道所率皆蕪湖驍徤,乃麾衆獨進,爲賊所殺。一道義男子義橫身椑賊刃,亦死。




을사일(乙巳日), 고부(高埠)에서 도망친 왜구들이 항주(杭州)를 지나 서쪽으로 이동하며 길가의 사람들을 죽이고 상해(傷害)를 입혔다. 엄주(嚴州) 순안현(淳安縣)에 도착했을 때는 이들은 겨우 60여 명만 남아 있었으나, 절강(浙江)의 병사들이 방비를 소홀히 하는 틈을 타 호령(濠嶺)과 반산(盤山)을 넘어 습격해 흡현(歙縣) 황백원(黃柏源) 어구(口)로 들어갔다. 휘주부(徽州府)에서 협로(隘路)를 지키던 관군(官軍)과 민장(民壯) 500여 명은 적을 보자 모두 달아나 흩어져 버렸다. 이에 도적들은 계속 이동하며 적계(績溪)를 약탈하고, 경덕(旌德)에 이르렀다. 전사(典史) 채요좌(蔡堯佐)가 1,000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막았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도적들은 경덕 현성(縣城)의 남문(南門)을 공격해 대학살과 약탈을 자행했다.

경현(涇縣)을 지날 때 현령(知縣) 구시용(丘時庸)이 병사를 이끌고 당구(塘口)에서 추격했으나 크게 패했다. 적들은 이어 남릉(南陵)으로 달아났다. 현승(縣丞) 막영(莫逞)은 300명을 이끌고 분계산(分界山)을 지키고 있었는데, 적군을 보자 모두 도망쳤고, 적들은 현성(縣城)으로 들어가 주민들의 가옥을 마구 불태웠다.

이에 건양위(建陽衛) 지휘(指揮) 무인(繆印), 당도현(當塗縣) 현승(縣丞) 곽영교(郭映郊), 무호현(蕪湖縣) 현승(縣丞) 진일도(陳一道), 태평부(太平府) 지사(知事) 곽장(郭樟)이 각각 격문(檄文)을 받고 군대를 이끌고 지원해 왔다. 그들은 적과 현성 동문(東門)에서 마주쳤다. 무인(繆印) 등이 활을 쏘아 적을 공격했으나, 적들은 손으로 화살을 잡아내었고, 관군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하다가 결국 모두 흩어져 도망쳤다.

진일도가 이끈 군사들은 모두 무호(蕪湖)의 용맹하고 날랜 병사들이었는데, 그는 부하들을 독려하며 단독으로 진격했으나 적군에게 살해당했다. 의협심 강한 의사(義士) 의횡(義橫)도 적의 칼날을 몸으로 막다가 죽었다. ㅡ 명 세종숙황제실록 권424 가정34년 7월 13일 1번째기사







명군의 감시를 피해 뗏목 타고 이동, 이후 지나면서 살상하고 다녔으나 60여명으로 줄어듬

이후 지방군 박살내는 무쌍 시작

손으로 화살 잡기같은 묘기에 놀라서 혼비백산









+南陵倭流刼至蕪湖,縱火燒南岸,突渡北岸入市。各商民義勇登屋,以瓦石灰礶擊之,賊多傷者,遂奔去。各商兵下屋生縳二倭,斬首十級。賊趨太平府。是時操江都御史褒善駐太平,遺千户曾等督鄉兵、義勇、殺虎手等兵禦之于馬,大敗。賊遂進逼府城。城中人斷河橋防守,賊引而東犯江寧鎮。指揮朱襄、蔣陞率衆迎拒,不能禦。襄戰死,陞被創墮馬,官兵死者三百餘人。賊遂直趨南京。其酋衣紅乘馬,張黃蓋,整衆犯大安德門,我兵自城上以火銃擊之,賊沿外城小安德門、央岡等門往來窺覘。會城中獲其所遣諜者,賊乃引衆由舖崗趨秼陵關而去。

남릉(南陵)의 왜적들이 무호(蕪湖)로 흘러들어와 남안(南岸)에 불을 지르고는, 갑자기 북안(北岸)을 건너 시가(市街)로 침입하였다. 상인들과 백성들이 용감하게 지붕 위로 올라가, 기와와 석회 항아리로 적을 내리쳐 공격하자, 도적(왜구) 중 다수가 부상을 입었고, 그리하여 도적들이 도망쳤다. 각 상선(商船)에 타고 있던 병사들이 집 위로 뛰어내려 왜구 2명을 생포하고, 10명의 목을 베었다.

도적들은 태평부(太平府)로 달아났다. 당시 조강도어사(操江都御史) 포선(褒善)이 태평(太平)에 주둔하며, 천호(千户) 증(曾) 등에게 향병(鄕兵)·의용(義勇)·살호수(殺虎手) 등 군사를 이끌고 마(馬)에서 막게 했으나, 결국 대패하였다. 적군이 마침내 부성(府城)으로 진격해 들어왔다. 성 안 사람들은 하교(河橋)를 끊고 방어했으나, 도적(叛賊)은 군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강녕진(江寧鎭)을 침공했다. 주양(朱襄)은 전사했고, 장승(蔣升)은 부상당해 말에서 떨어졌으며, 관병(官兵) 300여 명이 전사했다.

적군은 이에 남경(南京)으로 곧장 향했다. 적군의 수령은 붉은 옷을 입고 말을 타고 있었으며, 누런 화개(華蓋)를 들고 부대를 정돈한 채 대안덕문(大安德門)을 공격해 왔다. 성 위의 우리 군사들은 화총(火銃)으로 공격하자, 적들은 외성(外城)의 소안덕문(小安德門)과 양강문(央岡門) 등지를 오가며 정탐했다.

마침 성 안에서 적군이 보낸 간첩을 잡았고, 적들은 군사를 이끌고 포강(鋪崗)을 거쳐 주릉관(秼陵關)으로 퇴각했다. ㅡ 명 세종숙황제실록 권424 가정34년 7월 24일 3번째기사






말을 구한 건지 원래 타고 있던 건지 왜구 수장이 붉은 옷에 말을 타고 있음


10명 사망 + 2명 생포 + 간첩 1명 생포

총 -13명



명군 300여 명 이상 전사








+倭自南京至秣陵關,應天推官羅節卿、指揮徐承宗率兵千人守關,望風奔潰,賊遂過關,至溧水縣楊林橋,典史林文景率兵迎過,不能禦。署縣縣丞趙珠臣棄城走,賊遂由小北門入城,宴飲民家,信宿乃去。署縣縣丞趙珠臣棄城走,賊遂由小北門入城,宴飲民家,信宿乃去。


왜구가 남경(南京)에서 말릉관(秣陵關)으로 침입하자, 응천부(應天府) 추관(推官) 나절경(羅節卿)과 지휘(指揮) 서승종(徐承宗)이 병사 1,000명을 이끌고 말릉관을 수비하였으나, 적의 모습만 보여도 달아나 무너져버렸다. 이에 왜구는 말릉관을 넘어 예수현(溧水縣) 양림교(楊林橋)까지 진격했으며, 예수현 전사(典史) 임문경(林文景)이 병사를 이끌고 맞섰으나 막아내지 못했다. 현직을 대리하던 현승(縣丞) 조주신(趙珠臣)이 성을 버리고 도망치자, 적들은 소북문(小北門)으로 성안에 침입했다. 이어 민가에서 잔치를 벌이며 이틀 밤을 머문 후에야 떠났다. ㅡ 명 세종숙황제실록 권425 가정34년 8월 1일 1번째기사







남은 왜구들은 다른 곳으로 침투해서 다른 관군들 격파








+甲戌,溧水倭流刼漂陽,趨宜興,至?亭。聞官兵自大湖出,取道官路橋、黃土,越武進縣境,抵無錫慧山寺,一晝夜奔一百八十餘里,我兵追及,急擊之,賊疲,走望亭。次日至滸墅關,都御史曹邦輔督各官兵圍之。


+ 예수(溧水)의 왜구가 예양(溧陽)으로 유입한 후, 의흥(宜興)을 거쳐 기정(屺亭)에 도달했다. 이때 관군이 대호(大湖)에서 출동, 관로교(官路橋)·황토(黃土)를 경유해 무진현(武進縣) 경계를 넘어 무석(無錫) 혜산사(慧山寺)까지 하루 밤낮으로 180여 리(里)를 급히 달려가, 우리 군사가 적을 따라잡아 맹렬히 공격했고, 피로에 지친 적군은 망정(望亭)으로 도주했다.

다음 날 호서관(滸墅關)에 도착하자, 도어사(都御史) 조방보(曹邦輔)가 각 길의 관병(官兵)을 독려하여 포위하였다. ㅡ 명 세종숙황제실록 권425 가정34년 8월 12일 1번째기사







결국 마지막까지 남은 53명은 도어사 조방보에게 포위되어 전멸

명 실록에서는 이렇고









時賊勢蔓延, 江浙無不蹂躪. 新倭來益衆, 益肆毒. 每自焚其舟, 登岸劫掠. 自杭州 北新關西剽淳安, 突徽州 歙縣, 至績溪·旌德, 過涇縣, 趨南陵, 遂達蕪湖. 燒南岸, 奔太平府, 犯江寧鎭, 徑侵南京. 倭紅衣黃蓋, 率衆犯大安德門, 及夾岡, 乃趨秣陵關而去, 由溧水流劫溧陽·宜興. 聞官兵自太湖出, 遂越武進, 抵無錫, 駐惠山. 一晝夜奔百八十餘里, 抵滸墅. 爲官軍所圍, 追及於楊林橋, 殲之. 是役也, 賊不過六七十人, 而經行數千里, 殺戮戰傷者幾四千人, 歷八十餘日始滅, 此三十四年九月事也.


당시(가정 34년) 도적들의 세력이 만연하여, 강소와 절강 지방은 [도적들에게] 유린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새로운 왜구가 도달하여 갈수록 많아지고 갈수로 방자하고 악독해졌다. 매번 스스로 [자신이 타고 온] 선박에 불을 지르고, 육지에 올라 [인근 사람들을] 위협하고 약탈하였다. 항주(杭州)의 북신관(北新關)으로부터 서쪽 방향으로 가서 순안(淳安)을 약탈하였고, 휘주(徽州) 흡현(歙縣)으로 돌진하여, 적계(績溪)·정덕(旌德)에 이르렀으며, 경현(涇縣)을 지나 남릉(南陵)으로 달려가 마침내 무호(蕪湖)에 도달하였다. [무호의] 남쪽 기슭을 불사르고, 급히 태평부(太平府)로 달려가 강녕진(江寧鎭)을 침범하였으며, 곧바로 남경(南京)을 침범하였다. 왜구는 붉은 옷과 누런 모자로, 무리를 통솔하여 대안덕문(大安德門)을 침범하였고, 협강(夾岡)에 이르러, 곧 말릉관(秣陵關)으로 나아간 뒤 그곳을 떠나, 율수(溧水)를 경유하여 율양(溧陽)·의흥(宜興)을 침범하고 약탈하였다.

[왜구는] 관병이 태호(太湖)로부터 진출한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무진(武進)을 넘어, 무석(無錫)에 도달하여, 혜산(惠山)에 주둔하였다. 하루 낮밤 180여 리를 달려, 호서(滸墅)에 이르렀다. [마침내 왜구는] 관군에게 포위당하였고, [관군은 왜구를] 추격하여 양림교(楊林橋)에 이르러 모두 섬멸하였다. 이 전투에서, 적군은 불과 60~70여 명에 지나지 않았으나 경유한 곳은 수천 리에 이르렀고, [왜구에게] 살육되거나 전쟁에서 부상당한 자는 거의 4,000 명이었으며, [싸움이] 시작된 지 80여 일이 지나서야 비로소 멸하여졌는데, 이는 [가정] 34년(1555) 9월의 일이다. ㅡ 명사 외국전




청나라 시기 작성된 명사의 기록








100여 명 → 60여 명 → 53명


명나라 군이 쏜 화살 손으로 잡았다는 것도 사실







+柘林倭合新倭四千餘人突犯嘉興。總督強經分遣參將盧鏜等督糧土等兵,水陸擊之。保靖宣慰使彭藎臣與賊遇于石塘灣,大戰敗之,賊遂北走平望。副總兵俞大猷以永順宣慰司官舍彭翼南兵邀擊之,賊奔回王江涇。保靖兵復擊,急其後,賊之大潰。諸軍共擒斬首功凡一千九百八十人有奇,溺水及走死者甚衆,餘賊不及數百,奔歸柘林。自有倭患來,東南用兵,未有得志者,此其第一切云。


석림(柘林)의 왜적이 새로 온 왜적 4,000여 명과 합세하여 갑자기 가흥(嘉興)을 침공하였다. 총독 강경(强經)은 참장(參將) 노탕(盧鏜) 등을 분견하여 토병(土兵) 등을 거느리고 수륙 양면으로 공격하게 하였다. 보정선위사(保靖宣慰使) 팽진신(彭藎臣)이 적을 석당만(石塘灣)에서 만나 크게 싸워 이를 격파하니, 적은 마침내 북쪽으로 달아나 평망(平望)으로 갔다. 부총병(副總兵) 유대유(俞大猷)가 영순선위사(永順宣慰司) 관사(官舍) 팽익남(彭翼南)의 병사를 거느리고 요격하니, 적은 달아나 왕강경(王江涇)으로 돌아갔다. 보정의 병사가 다시 공격하여 그 후방을 급히 치니, 적이 크게 무너졌다. 여러 군대가 합쳐 사로잡고 목 벤 것이 모두 1,980여 명이나 되었으며, 물에 빠져 죽거나 달아나다 죽은 자도 매우 많았다. 남은 적은 수백 명에 미치지 못하여 달아나 석림으로 돌아갔다. 왜구의 화환이 생긴 이래로 동남 지방에서 군사를 쓴 것으로써 뜻을 이룬 적이 없었는데, 이번이 바로 그 첫 번째라고 일컬을 만하다. ㅡ 명 세종숙황제실록 권422 가정34년 5월 1일 3번째 기사








명군도 아예 손 놓은 건 아니고 왜구 본거지 2만 + 4천 합세한 공격에 주력군 집중해서 처리

주력군들이 왜구 거점들 깨부수는 사이에 저렇게 역으로 침투해서 휘젓고다님








총독은 왜구 최대 본거지 소탕했음에도 저 죄로 수도로 끌려가서 사형 선고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