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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해군에게 자주국방은 석유의 자급자족을 의미했다. 1920년에 제1선 주력함들의 연료가 석탄에서 석유로 바뀌었지만, 일본의 석유 자원 상황에 대한 해군의 연구는 진척되지 못했다. 심지어 가까운 장래에 일본은 전시에 해군의 작전 수행에 필요한 석유를 공급받지 못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특히나 일본의 대규모 전함 건조 계획이 완료된 후 진수할 현대적 함대에 대한 석유의 장기 공급 전망이 불투명했다. 확실히 해군은 다 른 석유 공급원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한 가지 대책은 수입한 석유를 비축하는 것이었다. 1926년 말까지 해군은 주로 미국과 보르네오에서 수입한 약 150만 톤의 석유를 비축했다. 그러나 이 대책은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해외에서의 수입은 위기 시 줄어들 수 있었고, 저장 탱크들은 그 자체로 적의 공격에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대책은 석유 생산지를 직접 확보하는 것이었다. 1895년 이후 일본 제국의 일부가 된 타이완에서의 시추 결과는 실망스러웠지만, 1919년부터 해군이 지원하기 시작한 북부 사할린 지역에 대한 일본 석유 회사들의 탐사는 일부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시베리아 출병으로 일본군이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신생 소련의 공식 영토로 남았다. 설상가상으로 소련은 미국 회사인 싱클레어(Sinclair)에 문제의 이 지역에 대한 탐사권과 개발권을 부여했다. 1923년 초 단호한 입장의 일본 해군은 싱클레어가 이 지역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공식 의회 결정을 확보했다. 2년 후 북부 사할린 지역에 대한 일본의 점령은 시베리아에서 생산한 석유의 50%에 대한 권리를 확보하는 대가로 종식되었다. 1930년에 해군은 이 권리를 통해 연간 10만 톤의 석유를 확보했다.

물론 이 양도 상당했지만 해군의 수요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해군은 1920년대만 해도 석유가 풍부한 지역을 원거리에서 찾기보다는 합성석유를 생산하려는 야심 차고 엄청난 비용이 드는 계획들에 착수했다. 당시 해군의 주요 파트너는 만철이었는데, 만철은 1926년 푸순의 유혈암에서 석유를 추출하는 사업에 착수한 바 있었다. 1년 후 수립한 또 다른 계획을 통해 해군과 만철은 석탄액화 연구에도 착수했다.



출처
일본의 총력전: 1919~1941년 경제 안보의 추구
32~3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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