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위원회에 끌려와 피투성이가 되도록 구타를 당하고 있던 사람은 바로 6·25 전쟁 발발 전 인민군 4사단의 통계참모를 했던 팔로군 군정대학 동기생 한태윤이었다. 그는 해방 전 일제경찰을 했던 전력이 탄로나자 월남하여 6·25 전쟁이 나기 며칠 전에 인천 연안부두 파출소장으로 부임했다. 그러다 좌익출신인 보도연맹원들을 돌에 매단 채 인천 앞바다에 빠뜨려 죽이는 현장에 파출소장으로 입회를 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국군을 따라 후퇴하지 못한 그는 학살당한 보도연맹원의 가족들에게 붙잡혔던 것이다. 한태윤이 맞아죽는 것을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 그를 철저히 조사하겠다는 명목을 내세워 데리고 나왔는데 며칠 뒤 보도연맹의 유가족들이 사단사령부를 통해서 항의를 했다. 崔泰煥씨도 어쩔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한태윤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는 서울이 안전하다 싶어 서울로 가는 통행증을 만들어서 보내주고 상부에는 도망쳤다고 거짓 보고를 했다.
 
  『비록 저랑 정반대편에 서 있지만 그래도 친구는 친구 아닙니까. 그 자리에서 피투성이가 된 그 친구와 부둥켜 안고 둘 다 울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죽기 일보 직전이었던 친구의 목숨을 구해줬기 때문에 나도 그 보답을 받아 살벌한 전쟁터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