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전 쯤에 다른 갤에 써둔 건데, 한 번 올려 봄.

1. 표트르 대제의 사관학교 창설
1) 해군 아카데미
- 루이 14세의 왕립 학교에서 교육을 받은 정예 장교단을 주축으로 하여 새로운 해군 아카데미를 창설할 것을 결정
(1) 교육 과정
- 산수, 기하학, 펜싱, 무기 교범, 대포, 항해술, 축성술, 지리학, 함선 운용술, 선박의 구조, 지도 · 도안 작성법, 무용, 군사 훈련, 약간의 교양, 광범위한 기술 교과

2) 포병 & 공병 학교 등 육군의 각 병과별 학교
- 교육 과정 : 읽고 쓰기와 공학, 병과 관련 교과

3) 문제점
- 자금난으로 임금과 장학금 지급 난항. 재정난은 장기간 지속.
- 정부는 의도적으로 생활비 수급이 가능한 부유한 귀족들을 중심으로 선발
- 졸업 이후, 진급과 자대 배치에 대한 명확한 규정 부재. → 빈곤 귀족에게는 매력 X

2. 생도단
1) 창설 : 1731년, 귀족 육군 생도단을 설립.
2) 생도단 창설 이유
(1) 청년 귀족의 요구 : 곧바로 장교 임관이 가능한 교육 기관 설립 요청 ← 취직 문제
(2) 군사 전문가의 요구 : 장교 훈련을 위해 기존 조직과는 별도로 생도단(cadet corps)이나 생도 중대(cadet companies)의 필요성 주장
(3) 귀족 계층의 요구 : 청소년 귀족들을 새로운 상류층이 될 “진짜 귀족”으로 육성하자.

3) 생도단 헌장
- 귀족과 장교 자제만 입학 허용. - 일정 기준을 충족한 졸업생에게만 장교 임관 보장.
- 1850년대 기준, 오렌부르크, 시베리아 생도단에서만 비귀족 출신 장교 & 공무원의 자제 수용. 나머지 18개 생도단은 귀족 자제만 수용.

4) 생도단 기능 및 영향
- 귀족 자제에게 교양 교육과 군사 훈련을 동시에 제공하는 교육 기관 
- 긍정적 영향 : 재능 있는 상류층의 입학 증가. 유능한 인재 육성.
- 졸업생의 특권 : 관료, 국가 평의회, 제국 대학, 내각에 입각할 수 있는 권리

5) 재원 : 귀족들의 기부와 국가 예산, 각종 보조금

6) 숫자
- 1770 ~ 82년까지 핀란드, 시베리아 등 여러 지역에 설립 시작.
- 1850년대 기준 총 20개

3. 시종단과 귀족연대
1) 개념 : 장교를 육성하는 또 다른 중요 교육 기관.
2) 창설
- 시종단 : 1759년에 창설, 1802년에 알렉산드르 1세가 장교 양성 기관으로 재편. 
- 귀족 연대 : 1807년에 창설.

3) 성격
- 시종단 : 최고위 귀족 자제들을 위한 기관 
- 귀족 연대 : 빈곤한 귀족 가문 자제들을 위한 2년제 군사 교육 기관.

4) 시종 : 차르의 종자이며, 궁전에서 생활. 졸업생은 근위대 복무를 비롯한 갖가지 특권을 받고 소위로 임관.

5) 귀족 연대의 성과
- 1807 ~ 1912년간, 2665명의 소위 배출. 이로 인해 대중적 인지도와 인기 확보. - 최대 정원은 600명이었고, 1813년에 1700명, 1815년에 2400명으로 증가.

4. 사관 제도
1) 개념 : 18 ~ 19세기 크림 전쟁 이전까지 존재한 일종의 부사관 겸 준위
2) 의무 복무 기간 : 2년
3) 장교 후보생 : 군사 학교에 입학하지 않고 사관으로 입대한 세습 귀족의 자제는 장교 후보생으로 분류
4) 임관 과정
- 모든 귀족의 자제는 학력 제한 없이 장교 후보생으로 지원해 2년의 복무 기간 이후, 임관 가능. 그래도 귀족은 초등일지언정 교육 과정을 이수하는 게 일반적인 편.
- 중등 교육, 고등 교육 이수자는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6개월 의무 복무 이후 임관 가능
- 교육 과정 이수 경력이 없는 개인 귀족, 명예 시민, 1, 2급 길드 상인 출신들은 6년 복무 후에 임관 가능
- 장교 후보생으로 ‘진급’한 사병은 12년 복무 이후에 임관 시험에 합격하면 임관 가능

5) 진급 여부 : 출생 신분과 교육 수준이 좌우
6) 특이 사건 : 사병에서 시작해 사관이 되어 12년 근무 후, 장교가 된 경우도 아주 드물지만, 존재

5. 밀류틴 개혁 이전, 러시아 장교단의 문제점
1) 장교 병력난
- 장교 대다수가 귀족 출신, 1850년대 장교단에서 비귀족 출신은 4%. 이로 인해 만성적인 장교 부족 발생.
- 나폴레옹 전쟁부터 크림 전쟁 시기까지 평시 · 전시에 기본적으로 유지해야 할 장교 : 병사 비율(병사 20명당 장교 1명)을 충족시킨 적이 단 1번도 없다.
- 나폴레옹 전쟁부터 크림 전쟁까지, 참모부 근무 인력까지 죄다 끌어모은 러시아의 장교 : 병사 비율은 1 : 26 ~ 27.
- 생도단에 별에 별 교육 기관을 다 끌어 모아도, 공식적인 장교 교육 과정은 연간 600명 이상을 졸업시킬 수 없었다.이는 연간 보충 인원의 25%만 공급할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의미였다.

2) 낮은 질적 수준
- 부패하고 지식과 군사적 능력이 부족하며 나태하다는 점을 항상 지적받았다.
- 국가 안보와 국가의 영광보다는 축재가 주요 목표. 이를 위해 약탈과 억압을 활용.
- 장교단의 일부는 군의 지휘관이나 수뇌부라기 보다는 귀족 친목회 회원. 그래서 쓰잘데기 없이 내부 파벌 결속력만 높아서 자기 이익만 챙기는 장교들이 많고 전쟁에서 쓸만한 인력은 부족.
- 귀족군이지, 국민군 개념이 없어서 귀족 장교들은 자신을 국가나 차르, 국가의 종복과 동일시.
- 귀족은 군인과 공무원 외엔 다른 전문직을 선택할 수 없다는 귀족 사회의 인식 때문에 질적 수준이 낮은 치들이 입대해 장교가 되거나, 고위직까지 오르기도 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
- 이 지랄난 상황에서도 제정 러시아군은 표트르 대제 이래로 패배를 모른다고 자부하고 있었고, 대북방 전쟁, 나폴레옹 전쟁에서 승리했으며 7년 전쟁에서도 프리드리히를 2차에 걸쳐 작살냈다. 그 크림 전쟁에서조차 연합군의 찬사를 받을 정도로 분투한 게 러시아군이었다.

- 독일은 7년 전쟁 시기의 악몽과 나폴레옹 전쟁, 헝가리 혁명 시기에 러시아군이 보여준 퍼포먼스를 두려워해 1차 대전 탄넨베르크 전투 직전까지도 러시아군을 과대 평가하고 있었다. 여기서 문제는 탄넨베르크 이후부터 러시아군을 과소평가하기 시작해서 독소전 때 소련군을 우습게 보다 1944년부터 다시 기강을 잡히게 된다.

6. 밀류틴 개혁
1) 배경
- 크림 전쟁에서 겪은 대패로 개혁 필요성 대두
- 용기와 채찍질만으론 강선총과 강철 대포, 증기선을 이길 수 없다는 인식을 군부 전체가 공유
- 알렉산드르 2세의 농노 해방령과 대개혁으로 인해 사병들의 신분이 농노에서 평민으로 변화했기 때문에 예전처럼 사병들을 농노 다루듯이 괴롭힐 수 없다는 문제 발생.
- 크림 전쟁 시기 러시아군 장교단에 대한 밀류틴의 개인적 평가 : "적절한 훈련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무기력하고 사고가 편협하다. 이것 또한 부적절한 훈련이 야기한 결과일 것이다."

2) 목표
- 개인의 영달이 아닌 국가를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애국자와 진정으로 장교가 되고 싶어하는 이들을 장교단으로 수용
- 귀족으로서 갖춰야 할 소양을 가르치는 게 아닌 전문적인 군사 지식을 교육해 사관학교에서 적당히 훈련받은 대검 귀족들을 제대로 된 직업 장교로 육성
- 군사 교육을 통해 장교들의 목적 의식과 직업 의식 함양. 충성심과 애국심, 단결력 강화.
- 군을 구시대적인 귀족군에서 근대적이고 유능한 국민군으로 전환하면서 군부를 차르의 직접적 통치 영역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 ← 군부의 일정한 독립성 확보

3) 신분 평등적 조치
- 능력을 갖춘 비귀족 출신 후보자들을 장교단에 수용 ← 귀족군을 국민군으로 전환하기 위한 조치. 농노 해방으로 귀족 장교가 농노군을 이끌 수가 없게 된 상황을 고려한 조치.
- 병 출신 생도들을 위해 군관구별로 특별 교육 과정을 도입해 임관 자격 부여
- 구타 및 가혹 행위로 유명한 러시아군이지만, 장교단과 생도들만큼은 예외여서 밀류틴 개혁 이전에도 장교나 생도들이 체벌을 받는 일은 드물었고 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 신체형도 각종 벌칙을 주거나 청소와 구보, 각종 잡무를 시키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밀류틴 개혁 이후로는 체벌이 거의 완전하게 유명무실해지고, 생도들의 인격을 더 존중해 주었다.

4) 군사 교육 개혁
(1) 교육 과정
- 기본 교양 교육과 전문 군사 교육을 분리

(2) 생도단 개혁(군 김나지움 – 전문 군사 학교)
가) 군 김나지움(육군 유년 학교)
- 생도단을 기초 교육 기관인 군 김나지움으로 변화시키고 생도단의 전문적 군사 교육은 새로운 장교 육성 기관인 전문 군사 학교에 넘겼다.
- 종합적인 교육 과정 제공 ← 단순 교양이 아닌 종합적인 지식 교육 및 사고 함양, 기초 군사 교육 시행
- 중등 교육을 받지 못한 현역 군인들을 위한 특별 교육 과정 운영

나) 전문 군사 학교
- 중등 교육을 이수하거나, 그에 준하는 입학 시험을 통과한 모든 이들에게 신분 차별 없이 입학권 부여
- 병과 별로 2 ~ 3년의 전문적인 군사 교육 과정

다) 육군 중등 예비 학교
- 교육 수준이 부족한 군인들을 위한 학교

5) 참모부 아카데미
1) 창설 배경 : 고위 지휘관 휘하에 작전 계획 입안 및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참모 장교가 중요 보직으로 부각.
2) 의의 : 유능한 장교들을 참모로 육성하는 유일한 군 교육 기관

(1) 입학 기준
- 전 신분에 개방 + 경쟁 입학. 엄격한 입학 시험 제도 도입.
- 많은 장교들이 시험 준비에만 몇 달씩 소모.

(2) 숫자
- 아카데미 졸업생 숫자 < 근위대 장교 숫자 ← 확실한 검증과 엄격한 평가의 증거
- 1832 ~ 1882년까지, 연간 25명이 아카데미 입학. 
- 1879년에 입학 정원을 100명으로 확대. 19세기 말, 150명까지 확대.
- 문제점 : 82년 기준, 졸업생이 전군에 661명. 백만이 넘는 러시아군의 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숫자가 적었다.

(3) 혜택 : 빠른 진급과 좋은 보직
- 전쟁성 장관의 행정 업무 담당관, 참모 아카데미 · 군사 학교 · 사관학교의 교수와 교관 직책, 여타 군 교육 기관 책임자, 군관구 참모장 직위는 아카데미 졸업생들을 위한 자리로 정착.
- 참모부 아카데미 졸업은 모든 현장 지휘관과 하급 장교들의 선망인 연대장으로의 빠른 진급을 보장 가능. 이 혜택은 전쟁성 장관이 참모부 아카데미 졸업생들을 위해 모든 연대장 직책의 3분의 1을 확보해둔 1896년부터 시행.
- 아카데미 졸업생들은 동일 계급의 다른 장교보다 두 배 더 많은 임금을 수령.

8. 밀류틴 개혁의 성과
- 장교단의 전문성 및 체질 개선 성공.

9. 밀류틴 개혁의 한계
- 비귀족 출신 장교들을 개방적이고 더 나은 교육을 받은 장교로 배출할 수 있었으나, 개선된 군 교육 체계가 장교단의 문화를 바꿀 수는 없었으며, 도리어 귀족과 비귀족 출신, 개혁파와 보수파 간의 분열을 가시화했다.
- 국민군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장교들의 체질 개선 외에도 장교들이 일반 병사들을 소모품이 아니라 병역을 수행하는 시민으로 존중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지만, 장교들의 대다수는 그런 인식이 없었고 그렇게 인식 전환을 하라고 요구받지도 않았다.
- 평민 출신 생도 중 일부는 생활비가 부족해 빈곤해 시달렸고, 그 중에서 소수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원치않는 알바를 하기도 했다. 제복 청년에 대한 독특한 환상을 갖고 있는 일부 남성들을 위해 입을 벌려 주거나 바지를 내려 주는 일이었는데, 입만 1번 벌려 주는 것으로 당대 러시아 공장 노동자의 하루 일당보다 2 ~ 3배가 넘는 돈을 벌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군부에서 군의 위신을 떨어뜨린다고 단속에 나서고 관련자들을 처벌하기도 했지만, 처우 개선이 비교적 빨리 이뤄지지 못해 생활이 어려운 이들은 몰래 몰래 알바를 뛰었다. 이러한 행태는 1900년대에도 볼 수 있는 일이었다.

10. 개혁의 후퇴
- 1882년 7월, 신임 전쟁 장관 바노브스키는 귀족 신분의 지위를 강화하려는 황제의 의향을 받들어 군 김나지움을 생도단으로 회귀시켰다. 이는 기본 교양 교육과 기초 군사 교육을 다시 재결합해 어린 학생들에게 가능한 짧은 시기에 군사적 가치와 태도를 교육하기 위해서.
- 이 조치는 생도단의 지적 교육 수준을 하락시키고 생도와 장교단 내부의 반지성주의를 확산시켰다.
- 차후에 개선이 이뤄지긴 하지만, 반지성주의는 오래도록 러시아군의 고질병이 되었고, 소련 시절까지 이어지는 적폐 중의 적폐가 되었다.

11. 알렉산드르 3세
- 즉위 초에 밀류틴 개혁을 뒤엎긴 했지만, 알렉산드르 3세는 황제가 되기 전부터 군사 분야에 관심이 많은 밀덕이었던지라 즉위 이후부터 군대에 대한 투자를 대폭 늘리고 군인에 대한 처우와 연금 제도, 복지를 대폭 개선했다. 그 덕에 알렉산드르 3세는 제위 기간 내내 군대의 절대적인 충성을 받아 강력한 통제력을 행사했다. 개인적으로도 키가 180대 후반에 한 손으로 동전을 구부리고, 양손으로 기차 지붕을 들어올리는 초인이었던지라 신체적인 면에서도 군부의 호감을 사기 좋았다.

12. 소결론
- 러시아 장교를 까기 위한 목적으로 자료를 활용하자면, "표트르부터 그 지랄 떨었지만, 실은 귀족 친목회에 긴빠이 치고 병사 괴롭히는 천치 군사 귀족 수준이었구나"

- 러시아 장교를 변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료를 활용하자면, "그래도 일을 안 한 건 아니구나" + "아니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7년 전쟁이랑 나폴레옹 전쟁에서 최대의 퍼포먼스를 이끌어내서 프리드리히랑 나보 엿 먹였지?" + "크림 전쟁 때는 이런 조건에서도 연합군 상대로 버텼구나" 로 써먹을 수 있을 듯.


- 장교단 관련으로 주제를 압축해서 밀류틴 개혁에서 추진한 군관구제나 병력 감축, 사병 훈련과 신무기 도입 관련 내용은 제외했음.


- 왜 알렉세예비치에서 알렉세예비치까지냐면,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로마노프에서 드미트리 "알렉세예비치" 밀류틴까지.


- 그 다음 개혁은 러일 전쟁을 말아먹은 것으로 유명한 크로포트킨이 주도했다. 솔직히 크로포트킨은 조지 마셜이나 후배들인 고레츠키, 흐룰료프처럼 후방에서 각종 업무를 담당하거나 군 훈련, 교육 분야에서 활동할 인사인데 가믈랭처럼 괜히 야전에 불려나와서 커리어 조진 인간이라 좀 아깝긴 함.


13. 참고 자료

- 새로운 러시아 역사

- 나탸샤 댄스

- 1917년 혁명기 러시아 장교들의 위기와 대응

- 진흙 발의 거상”인가? “붉은” 스팀롤러인가?: 러시아/소련 군대에 관한 서방 세계의 편견과 실상

- 스타미디어 다큐멘터리 "ROMANOV"

- 러문위키, 영문위키 제정 러시아군 항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