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9년 12월 15일, 헝바오 전투에서 패배한 바이충시는 국민당 하이난다오 행정장관 천지탕(陳齊棠)에게 가능한 모든 선박을 모아 달라고 요청했다. 광시군을 하이난다오로 이동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이난다오는 바이충시가 마지막으로 의지할 수 있는 전략적 요지였다. 12월 8일, 바이충시는 애가 타서 황졔와 쉬지밍(徐启明)에게 명령했다.
“각 부대는 싸움을 피하고 실력을 보존하라. 안전이 상책이니 경무장으로 분산하라.”
12월 9일, 그는 암담한 심정이 되어 좌우에 말했다.
“린뱌오가 끝까지 쫓는구나. 부대들이 모두 패하거나 흩어졌으니 얼마나 배를 탈 수 있겠는가?”
바이충시는 그날 배 위에서 잤다. 10월에서 12월까지 백일 남짓한 기간에 그의 몇 십만 병력은 연기처럼 사라졌다. 바이충시가 거느렸던 광시군 가운데 극히 일부 병력만 하이난다오에 도달하고 나머지 부대들은 베트남으로 후퇴하거나 모두 섬멸되었다.
베트남으로 도망간 국군 패잔병
1949년 12월, 후난성과 광시성, 윈난성의 국군 패잔병 가운데 3만 명이 프랑스 식민지인 베트남으로 가서 3년 6개월간 머물렀다. 국군 1병단 사령관 황졔는 패잔병 1만 7천 명을 이끌고 쿤룬관에서 서쪽으로 후퇴했다. 화중 군정장관 바이충시가 황졔에게 전문을 보냈다.
"전투를 피하고 실력을 보존하라. 부대를 이끌고 하이난다오로 가라."
전임 참모총장 천청도 타이베이에서 전문을 보냈다.
“아우의 부대가 이난에 가기 어려울 것이다. 베트남에 근거지를 만들고 기회를 보는 것이 어떤가?”
황졔는 장교 회의를 열어 자신의 결심을 밝혔다.
“베트남에서 길을 빌려 타이완으로 가겠다.”
황졔는 천청과 바이충시에게 전문을 보내는 한편,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군 총사령부에 전문을 보내어 베트남행을 통보했다. 12월 12일, 황졔 병단의 참모장 허주번(何竹本)과 프랑스 량산(諒山: 베트남 북부도시) 변방군 참모장이 ‘가도협정’을 맺었다. 프랑스군은 국군을 500명 단위로 대오를 편성하여 베트남에 들어오게 하였다. 무기는 잠시 프랑스군이 맡기로 하여 사실상 무장해제를 당했다.
황졔의 부대는 닝밍(寧明)을 거쳐 국경에 이르렀다. 1949년 12월 13일 오전 9시부터 권속, 평민, 부상병부터 국경을 넘었다. 황졔 병단의 병사들과 뒤따르는 경찰, 학생등이 12월 18일 프랑스가 지정한 멍인(蒙陰)에 도착했다.
멍인은 석탄 폐광 지역으로, 3면이 산이라 낮에도 어두컴컴하고 정오경에나 겨우 햇볕이 들었다. 숙소에는 전기도 없었으며 모기와 벌레가 끓었다. 병사들은 벌목을 하고 풀을 잘라 엉성한 막사를 지었다. 보름 뒤 겨우 안둔할 수 있었지만, 프랑스군이 수시로 와서 금품을 빼앗거나 몰수해 갔다. 프랑스군은 하루에 1인당 쌀 4량(1량은 37그램)을 지급했다. 병사들은 물과 기후가 맞지 않고 배가 고파 병에 걸렸다. 약품이 부족하고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자가 끊이지 않았다.
리쫑런, 바이충시의 부대는 중국을 30년간 종횡한 정예였다. 그러나 1949년 하반기에 해방군에게 모두 섬멸당해 사라졌다. 광시계에서 남은 병력은 장진의 3병단 126군과 장쩌샹과 쉬지밍의 10병단 46군 등이었다. 이들은 룽저우(龍州)에서 베트남으로 달아났다. 양광 지방의 부대도 뒤를 따라갔는데 모두 합하면 1만명에 이르렀다. 광시군도 프랑스군이 정한 지역에 머물렀는데 멍인보다는 자연환경이 나았다. 그밖의 생활은 황졔부대와 같았다.
국민정부 직계 중앙군인 26군 3,879명도 나중에 베트남으로 합류했다. 8병단 부사령원 겸 26군단장 펑쭤시가 인솔하여 윈난성에서 베트남 북북 차이저우(菜州)로 갔다. 그밖에 베트남의 국민당 수령인 우훙칭(武鸿卿)이 광시의 루다오위안(鲁道源)의 11병단 일부 병력을 받아 ‘월남 건국군 경위여단’으로 편성했다. 하지만 프랑스 식민지 당국은 이들도 멍인으로 보냈다.
1950년 1월말까지 베트남으로 도주한 국군은 모두 33,400여명에 이르렀다. 그후에도 장제스 직계인 윈난 동남부 유격부대 2,000여명이 해방군의 토벌을 피해 베트남으로 갔다. 이들은 1951년 7월 12일 홍허(红河)를 몰래 건너다 호치민을 따르는 월맹 부대의 공격을 받아 사단장 위지유 이하 과반수가 물에서 죽었다. 간신히 강을 건넌 병사 1,023명을 사단 참모장 장야룽이 지휘하여 1951년 7월 푸궈다오(富國島)에 도착했다.
이렇게 베트남으로 도주하는 국군 패잔병이 끊이지 않아 1951년 말에는 국군 패잔병이 4만 명에 육박하였다. 국군 패잔병이 자꾸 베트남으로 가자, 신중국 외무부장 저우언라이가 항의성명을 발표했다. 저우언라이는 프랑스 당국을 강력하게 비난하고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프랑스 당국은 식민지인 베트남에 국공 내전의 불똥이 튈 것을 우려하여 국군이 체류한 3년 6개월간 무장해제하고 사실상 연금상태를 유지하였다.
처음에 황졔가 ‘가도협정’을 맺을 때는 베트남의 길을 빌려 타이완으로 가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신중국은 타이완의 병력을 증강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프랑스에 항의하였다. 프랑스는 중국 내전에 불개입하는 방침을 가지고 국군 패잔병을 월맹에 대항하는 기동부대로 편성할 것을 고려하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폭발하자 미국은 베트남에 체류 중인 국군을 ‘반공대륙’(反攻大陸 : 장제스가 타이완에서 대륙을 회복하기 위해 본토로 반격하겠다는 의지를 담은 구호이다.)부대로 쓰기를 원하였다. 본인들 의사와 관계없이 국제정세에 휘말린 것이다.
1950년 12월 25일, 절망에 빠진 황졔와 국군 병사들은 단식을 벌이며 프랑스군에 항의했다. 단식으로 급양 등 처우는 개선되었으나 여전히 타이완으로 돌아갈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그 후 타이완 당국과 프랑스 사이에 지리한 교섭을 거쳐, 1953년 4월 베트남 체류 국군 3만여 명은 타이완 가오슝(高雄)으로 돌아갔다.
출처: 국공내전 신중국과 대만의 탄생, 이철의 저, 앨피, 2023년, 704~7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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