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장이 된 나는 그동안 나와 생사고락을 같이 하던 제102사단 동료들의 환송을 받으며 당시 분선현(分宣縣)에 있던 제19집단군 총사령부에 부임했다.
생각하면 제102사단이란 내가 만들어서 내가 키운 사단이나 다름이 없어 떠나기가 퍽 섭섭했다. 제19집단군 총사령부로 부임해 보니 나에게는 생소한 곳이 아니었다.
사령관 나탁영(羅卓英, 러줘잉) 장군부터가 전에 북벌 작전서 동로군 포병대장이었기 때문에 나와는 한 지휘부에 속해 있던 전우였다.
북벌을 위해 나 장군과 나는 항저우까지 함께 진군하였는데 당시 나 장군은 진성(陳誠, 천청) 장군이 사단장으로 있전 제21사단의 부사단장으로 전임되어 갔다가 그 후 12년이 지난 이제 집단군 총사령관으로 영전된 분이었다.
나 장군은 인격이 원만할 뿐더러 문필에 능하고 또한 후덕한 유장(儒將)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다가 전부터 나에게는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계신 분이었다. 그리고 총사령부내의 일반 동료들도 비록 초면이긴 했지만 나에게 퍽 호감을 가지고 대해 줬기 때문에 나는 그들과 금방 친해질 수가 있었다.
내가 참모처장을 맡게 된 제19집단군은 그 지휘하에 4개군단의 병력인 즉 약 12개 사단으로 편성되어 있었는데 우리 집단군은 제9전구 지휘하에 난창 이서의 광활한 지역에 대한 수비를 담당하고 있었으니 전략적인 면에서도 참으로 중요했다.
행인지 불행인지 내가 제19집단군에 부임한 이후로는 특별히 이렇다 하게 기록할 만한 전투가 없이 적과 아군은 다 같이 약 4개월 간이나 일종의 휴전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1939년) 9월 상순에 들어서서부터는 약간 사태가 달라지고 있었다. 그들의 병력 이동이 전에 없이 빈번하여졌거니와 소위 일본 화중 파견군사령부라는 것이 취소되고 그 대신 난징에 중국 파견군 총사령부라는 것이 신설되어 적들은 그 지휘계통을 그 어느 때보다도 튼튼히 다지는 등 누가 보아도 새로운 공격 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품이 역력했다.
그즈음 세계 정세는 마침 독일과 소련이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그들 멋대로 폴란드를 나누어 먹는 등 행패를 부림으로써 급기야 구라파 대전이 폭발한 때라 사실 세계 각국이 아시아 문제를 돌아볼 여유가 없던 때였다.
그러자 일군은 이제야말로 맘놓고 아시아 대륙을 침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중국 침략을 서둘렀다. 일제는 중국 연해에 위치한 각 항구들은 이미 자기들이 점령하고 봉쇄하여 놓았은즉 이제부터는 중국 군민들에 대한 그 대부분의 식량을 공급하고 있는 곡창지대인 동정호(洞庭湖, 둥팅호) 주변을 그중에서도 특히 창사를 점령하기만 하면 일단 중국 침략은 거의 성공을 거두는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러한 판단하에 일군은 제11군 산하의 6개 사단과 포함 20여 척 그리고 기정(汽艇, 작은 증기선) 1백여척을 동원하여 동정호 연안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그러자 중국군의 반격도 반격이었지만 일군은 전선이 워낙 광활한데다가 턱없이 병력이 부족한 나머지 약 보름 동안에 걸친 공격을 시도하다간 그만 제풀에 지처서 아무런 성과도 없이 퇴각하고 말았다. 이것이 소위 제1차 창사 회전이다.
일군은 이 제1차 창사회전에서 많은 병력의 손실을 보았으며 중국군의 사기만 왕성하게 해 준 꼴이 되었다. 일군은 소위 제1차 창사 작전에서 참패한 뒤부터 약간 전략을 바꾸기 시작했다. 일군은 각처의 병력을 수시로 번거롭게 각 전구(戰區)로 이동시켜 가며 중국군에 대해 일종의 게릴라식 공격을 가해 왔다.
지금까지 중국군이 감행한 소모전에 말려들지 않기 위한 이른바 반소모전략(反消耗戰略)이랄까, 어쨌든 일군은 정신없이 여기도 찔러 보고 저기도 찔러 보는 식의 순환성 공격 전법을 택하고 있었다. 일군이 감행하고 있는 소위 그 순환성 공격의 여파가 1941년 3월 상순에 이르러서는 급기야 우리 19집단군 정면에까지 다다랐다.
우린 단연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우리 집단군의 정면에 다가온 적은 제11군이었는데 그들은 새로 이동해 온 제33, 제34등 양 사단과 또한 제20혼성여단 그리고 전차대를 집중시켜 우릴 공격해 올 참이었다.
그때 적의 공격 방법은 우리 집단군의 정면을 북쪽과 중간 그리고 남쪽 이렇게 세 갈래로 나누어서 우선 샹가오 현을 목표로 이를 점령하고 다음엔 난창에서 창사로 가는 길을 트고자 맹렬한 공격을 가할 셈이었다.
일군이 택한 그 3개처의 공격부대는 아마 공격로의 지형을 참작하여 부득이 그렇게 세 곳으로 부대를 나누었던 모양인데 아군측에서 보면 도리어 유리한 형편이었다. 왜냐하면 침공해 오는 적군들의 부대와 부대 사이의 거리가 지리상으로 너무 떨어져 있어서 적들이 한곳으로 집중하여 몰려오는 것보다는 적을 상대하여 물리치기가 좀 편리한 탓이었다.
우리 19집단군은 3월 15일을 기하여 정면의 북쪽 방향에서 공격하여 오던 적 제33사단을 상대로 17, 18 양일 간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을 벌인 끝에 적 2천여명을 살상하는 대전과를 올렸다.
그러자 적들은 완전히 포위되는 신세만은 면하려고 19일을 기하여 허겁지겁 일제히 퇴각해 버리고 말았다. 남쪽 방향에서 침공하여 오던 적군 제20혼성여단 역시 적 33사단과 마찬가지로 15일을 기해 본격적으로 아군을 공격해 왔다.
그들 적은 남쪽에서 아군에 대한 대포위 작전을 감행할 속셈인 모양이었지만 워낙 숫적으로 우세한 아군의 병력에 눌려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그들은 북쪽과 남쪽 그 중간통로를 따라 아군을 공격하던 적 34사단과 같이 합류하여 다시 샹가오 방면으로 아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던 것이었다.
아군의 군세는 그 장비상으로 보아 포병과 전차 등 중무기가 없는데다가 적에 비하여 기관총과 같은 자동화기가 턱없이 부족한 탓으로 공격력은 약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러나 숫적으로 병력만은 적의 약 3배에 달하여 가능한한 아군은 그 우세한 병력으로 적을 포위하여 근거리 접전을 벌일 계획이었다. 아군은 중로(中路)를 통해 공격하여 오는 적의 예봉을 될 수 있는 한 피하면서 적을 우리 측 진지 깊숙이 유인했다. 그리고 우세한 아군의 병력을 활용하여 침공하는 적을 사방에서 포위했다.
말하자면 후퇴하면서 적을 포위하는 이른바 퇴각 포위 작전이었다. 적은 우리의 그러한 퇴각 포위 작전에 휘말려 24일에 가서는 완전히 포위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러자 포위된 적들은 전에 일단 후퇴하였던 33사단의 도움에 힘입어 25일을 기해 아군의 포위망을 뚫고 퇴각로를 찾으려 발버둥쳐 봤지만 아군의 완강한 반격에 부딪쳐 드디어 27일 적들은 사력을 다하여 퇴각 직전에 실패하고 다시 포위되어 버렸다.
아군의 포위권내에 들어간 적들은 당황한 나머지 저희들끼리 좌충우돌 사뭇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돌파구를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적들은 수많은 전차를 앞세우고 싸우면서 퇴각하기 수일 만인 4월 1일에 가서야 겨우 원래의 자기들 진지인 후방의 견고진지로 달아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하여 만 19일만에 걸친 적과의 피어린 싸움에서 아군은 결국 승리하고 말았다.
그런데 한 가지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은 이 싸움 초기에 있어서 아군 20군단의 제19사단장이 마침 병으로 입원중이었기 때문에 내가 임시로 그 대리 사단장에 임명되어 이번 이 적과의 싸움 전기간 중 내가 직접 사단 작전을 지휘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전의 만가령(완자링) 전투를 직접 지휘하여 대승한 경험을 최대한으로 살림으로써 이번 전투에서도 최선을 다한 것이다.
그 결과 적은 이번 싸움에서 제34사단의 부사단장인 이와나가(岩永) 소장 이하 전사자만도 무려 5천여명을 헤아렸으며 우리가 노획한 적의 소총만도 2천자루에 야포가 10문이요 기관총이 50여정에 달했으니 실로 중일전쟁 발발 이후 그때까지에 거둔 전과 중 가장 휘황찬란한 대전과를 올렸다.
중국정부에서는 그 때의 작전을 "상고회전(上高會戰, 샹가오 회전)"이라 명명, 중일전사에 길이 남겨 놓았다.
나에게 있어 그 상고회전은 일선 지휘관이 되어 참전한 만가령 작전에 이어 두번째로 내가 직접 지휘한 작전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때 한국인으로서의 그 드높은 기개를 중원대륙에서 마음껏 발휘한 느낌이어서 여간 마음이 유쾌한 것이 아니었다.
출처
대륙의 분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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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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