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 또 잠시 붓을 돌려 중일전쟁 당시 내가 직접 일선에 나가 전투에 참가했던 시기의 기억을 좀 더듬어 볼까 한다.
먼저도 말했지만 나는 중일전쟁이 시작된 이후 약 1년 간은 후방 근무로 시간을 보냈다. 군수설계위원으로서 군수 문제를 다루고 특별 훈련반에서 일선 요원을 양성하는 일이었다. 후방에서 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마음은 언제나 최일선으로 치닫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조선의용대를 내 손으로 무장시켜 그 중 단 1백명이라도 내가 인솔하고 적의 후방 깊숙이 침투하여 교포 청년들과 일군내의 학도병들을 흡수함으로써 산에서, 들에서 유격전이라도 한번 펴보고 싶었지만 상부에서 허락해 주질 않았다.
나는 일선에 나가 중국군 부대라도 내가 직접 인솔하고 일군과 싸울 기회를 고대하던 중 그때 마침 난징 보위작전에 참전했다가 큰 공훈을 세우고 한커우로 철퇴하여 온 육군 제102사단을 만났다.
제102사단이란 지난번에 말한대로 지난 해 내가 직접 구이저우에 가서 쓰촨으로 인솔하여 온 사단인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구이저우의 지방 부대들은 정리 통합하여 사단으로 편성시킨 부대였으니 나는 흡사 뜻하지 않은 자리에서 죽마고우를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반가웠다.
특히 그 102사단 사단장 바이휘장(柏輝章, 백휘장)과 또 연대장 세 사람 중 두 사람은 나의 구이저우 육군강무학교 동기 동창생들이었으므로 나에게 있어서는 더욱 정이 가는 사단이었다.
마침 그 102사단의 참모장이 부상을 당하여 결원이었던지라 나는 그 102사단의 참모장에 취임하기로 마음먹고 즉시 그 뜻을 군정부장(軍政部長)에 상신한 결과 선선히 허락을 받았다.
그러니까 나는 일선 사단의 참모장으로서 직접 일군과 정면에서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셈이었다.
내가 102사단의 참모장으로 취임하자마자 당시 주장(九江)을 점령했던 일본 화중 파견군의 하타 슌로쿠(畑俊六) 부대 제2군과 제11군 그리고 직할 병단 등 15개 사단과 비행기 3백여대를 보유한 항공 병단 등은 제각기 양쯔강 남북의 그 연안에 분산하여 우창과 한커우(주: 둘 다 현 우한시의 일부임)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개시했다.
그때 내가 속한 그 102사단은 제4군단의 지휘하에 들어 있었다. 우리 사단은 그때 장시성(江西省)의 더안현(德安縣) 부근을 방위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런데 주장 이남의 그 울창한 산악지대를 이용하여 일선의 중국군 부대들이 감행한 그 끈질긴 지연작전으로 말미암아 우창과 한커우의 공격에 나선 일군의 전진은 오랫동안 지지부진했다.
(1938년 우한 전역도. 붉은색이 중국군, 푸른색이 일본군임. 완자링 전투 전황은 우하단 포양호 옆에 보임)
겨우 9월 하순에 가서야 우리 사단 정면에 적 106사단이 출현하게 되었고 또 그 우측에는 적 101사단이, 그리고 그 좌측에는 적 27사단이 진격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 사단 정면을 1차 공격해 오던 일군 106사단은 우리 사단의 맹렬한 반격을 받은 뒤 주춤하여 그 자리에서 우리와 대치상태에 돌입했다.
생각 같아서는 처음보다 그 기세가 누그러져 있는 일군을 계속 압박하고 싶었으나 공격전에 꼭 필요한 포병과 전차 부대가 없어서 뜻대로 공격을 못하고 적과 함께 우리도 계속 대치상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10월 초 우리 제102사단이 소속한 제4군단에서는 돌연 우리 사단 보고 우측의 59사단과 90사단이 지금 적의 기습 공격을 받아 인명 피해가 막심하니 이를 지원하라는 것이다. 지원해 주는 것은 좋지만 우리 제4군단에서는 우리 사단에 명령하여 연 이틀을 두고 6개 대대나 빼내 갔으니 기가 찰 일이었다.
우리 전 사단 보병 병력 9개 대대 중에서 6개 대대가 빠져 나갔으니 그 3분의 2의 병력이 다른 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분산된 셈이라 결국 우리 제102사단은 사단 사령부의 직속부대를 제외하면 보병 1개 연대밖에 남지 않았다.
이쯤되면 말 뿐이 사단이지 결국 있으나 마나 한 사단일 수밖에 없었다.
이건 아무래도 병력 사용 원칙에 위배되는 행위로서 나는 도저히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 사단장은 군단에서 하는 일이 그릇된 일인 줄 뻔히 알면서도 혹시 뭐라고 반발하면 명령 불복종 죄에 저촉될까봐 아무 소리도 못하고 있었다.
나는 즉시 사단장의 양해하여 군단사령부를 찾아가서 군단장과 만나 이번 우리 사단에 대한 그릇된 지휘방법을 항의했다.
그때 내가 군단장에게 항의한 내용은 우리 사단 지휘부로서는 갑자기 사단의 주력부대가 다른 사단의 지휘하에 들어가는 것을 그대로 방관할 순 없으니 즉시 명령을 내려 우리 사단 소속의 6개 대대에 대한 지휘권을 다시 회복시켜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자 군단장은 자기 잘못을 깨달았는지 별 말이 없이 나의 요청에 응해 주었다.
(미국에서 제작한 당시 전황지도. 루산(Lushan) 서부에 일본 106사단과 27사단이, 루산 동부와 포양호(Poyang Hu) 사이에 일본 101사단이 진격중임. 10월 6일부로 106사단이 지도 중앙부위에서 중국군에 포위당하는 모습이 표시됨)
나는 곧장 사단사령부에 가서 사단 전투 지휘소를 구성한 후 사단 산하의 2개 연대본부와 연대 직속 부대를 급히 인솔, 우리 6개 대대가 집결해 있는 완자링(萬家嶺, 만가령) 우측의 공격진지로 달려갔다.
완자링에서의 전투는 10월 2일부터 시작되었다. 중국군은 10월 7일에 이르러 일군 사단을 동서남 세 방면에서 완전히 포위했다.
적군들은 비행기로 공중에서 투하해 주는 탄약과 식량으로 연명했다. 이 공중 투하 보급품은 잘못되어 우리 진지에도 다수 떨어졌으니 적의 곤란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적들은 포위망을 뚫고 빠져 나갈 구멍을 찾기 위하여 사력을 다했다.
그때 내가 인솔한 우리 부대는 10월 8일에 가서야 비로소 적과의 전투에 들어갔는데 우리가 담당한 적의 진지는 약 1.5km 전방에 있었다.
우리 부대는 우군과의 긴밀한 유대를 강화하면서 주로 밤중에 적의 진지를 공격했으나 그때마다 실패했다.
야음을 타서 적이 점령하고 있는 산중턱까지 올라가는데는 성공했지만 그때마디 치열하게 반격해 오는 적의 기관총 사격과 수류탄 투하에 견딜 수가 없어 번번이 후퇴했다.
(실제 완자링 풍경임)
우리가 점령하고 있던 공격 거점인 그 산정(山頂, 산꼭대기)과 적측이 점령하고 있던 방어 거점인 산정과의 거리는 직선 거리로 불과 1천 5백 m 미만이었지만 그러나 적진을 공격하기 위한 실질적인 거리는 그보다 훨씬 멀었다.
왜냐하면 산과 산 사이의 움푹 파인 계곡이 너무나 깊어서 적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일단 산을 내려갔다가 다시 계곡을 건너 또 산을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적진까지의 실질적인 거리는 무려 5천 m 이상이 되는 셈이었다. 진지를 방어하긴 비교적 쉬웠지만 남의 진지를 공격하기가 용이할 리 없었다.
우리 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우리 우군 부대들은 매일 저녁 야음을 틈타 적을 공격하였지만 그때마다 적의 완강한 반격에 부딪쳐 뜻을 못 이루고 고생을 하는지가 벌써 나흘째가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지금과 같은 식의 작전을 되풀이하다가는 전력만 소모하고 급기야 포위된 적을 놓치고 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정신이 바짝 들었다.
나는 적의 진지를 둘러싼 작전 지역내의 지형을 직접 살핀 뒤에 다시 획기적인 전술을 구상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나는 즉시 제1전선으로 달려가서 적에 대한 우리 부대의 공격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나는 무엇보다도 우리 부대를 괴롭히는 적의 기관총 진지를 가려내야 했다.
우리 보병들이 적의 진중으로 육박하지 못하는 가장 큰 장애물이 적의 기관총 사격이었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적이 설치한 기관총의 위치를 정확하게 가려내어 그것을 분쇄함으로써 보병들의 진로를 뚫어 줄 계획이었다. 워낙 어두운 밤이라서 도저히 그 위치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나는 적이 기관총 사격을 가하게시리 적을 유도하라고 보병들에게 명령했다.
우리 보병들의 유도 작전에 걸린 적들은 곧 기관총 사격을 시작했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칠새라 적이 점하고 있는 산령(山嶺, 산봉우리)과 그 산의 반사면에 설치한 기관총의 위치를 잽싸게 발견, 그 상세한 위치를 기록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그러니까 10월 9일 대낮에 나는 거리 측량기를 이용하여 간밤에 내가 기록해 놓은 적의 기관총 진지에 대한 거리와 방향을 정확하게 측정해 놓았다.
그리고 밤을 기다렸다. 이제 집중적으로 우리가 포격만 잘 가하면 우리 부대의 가장 큰 장애물인 적의 기관총 진지는 제거할 수 있다는 생각에 흥분했다.
당시 우리는 각 연대마다 81mm 박격포가 8문 정도밖에 없는 실정이었기 때문에 그렇듯 연대별로 분산되어 있는 포를 가지곤 아무래도 한곳에 집중적으로 포격을 가하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2개연대에 있는 박격포 16문을 한곳에 모으라고 명령했다. 저녁에 적의 진지를 향해 접근하기 시작한 우리 보병들이 이제 공격 개시선에 도착했다는 신호에 접하자마자 예의 그 박격포 16문이 일시에 포문을 열고 한곳에 집중적으로 포격을 퍼부었다. 그러자 산이 완전히 무너지는 듯 싶은 요란한 폭음과 함께 적의 가장 주력적인 기관총 진지가 산산조각이 났다. 우리 보병들의 진로가 열렸다.
사기충천한 우리 보병들은 그때 우렁찬 만세 소리와 함께 돌격전을 감행하여 기어이 적의 산령을 점거하는데 성공했다.
(현재도 남아있는, 일본 106사단 사령부로 쓰이던 건물)
그때 적은 도망치는 데만 정신이 팔려서 사단 사령부의 서류도 채 처리하지 못했다.
마침 적의 106사단사령부는 산 뒷면의 계곡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들은 우리 부대의 기습 공격에 몰려 당황한 나머지 부관부(副官部, 참모부) 소관 중요 기밀 작전 문서 등을 하나도 챙기지 못하고 그냥 도망쳐 버린 것이었다. 우리는 적들이 남기고 도망친 그 기밀작전 문서에 의거하여 적의 화중군 편성 병력의 규모와 작전 계획 등을 상세히 알 수가 있었다.
하여간 내가 제1선에 나서 직접 지휘한 완자링 작전은 타이얼좡(兌兒庄, 태아장) 작전 이후 아군이 처음으로 거둔 혁혁한 대전과였다. 우리가 노획한 적의 무기만 하더라도 소총 1천여 자루, 경중 기관총 50여정, 포로 30여 명, 말은 1백여필에 달했다.
그런데 우리 부대가 대전공을 세운 그날은 마침 중국의 국경일인 쌍십절 즉 10월 10일이라 우리 모두의 즐거움은 더욱 컸다. 상해 작전 이후 줄곧 후퇴만 거듭하다가 그날 우리 부대의 승리 소식이 전해지자 당시 한커우에 체류중이던 장제스 위원장의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장제스 위원장은 우리 부대에 연락하여 각별히 축하의 뜻을 전하고, 당시 전시 수도인 충칭에 있던 여러 정치 지도자들은 모두들 축배를 올리면서 우리 부대의 전공을 높이 치하해 주었다...
출처
대륙의 분노(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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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잘보고 있습니다. 해당 책을 보유하고 계신건가요? - dc A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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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한 양반임 ㄹㅇ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