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은 10월 2일 주중 소련대사를 통해 파병을 보류하겠다고 통고한 다음 스탈린으로부터 재차 파병을 요구하는 전문을 받고서야 7일 태도를 바꾸어 9개 사단을 파병하겠지만 당장 보내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때 자신의 특사인 저우언라이와 린파오와 그 문제를 논의해달라고 스탈린에게 요구했다.
11일 흑해 연변 스탈린의 별장에 도착한 중국대표단은 마오쩌둥의 완화된 입장과는 달리 파병이 어렵겠다고 스탈린에게 밝혀 그를 놀라게 했다. 중국 측은 당초 스탈린이 약속한 공군 지원을 하지 못하겠다고 하자 파병에 대해 부정적으로 나간 것이다.
마오쩌둥이 파병에 주저하는 모습을 본 노회한 스탈린은 김일성을 동북지방(만주지역)으로 철수시키겠다고 은근히 암시했다. 그는 실제로 13일 김일성에게 북한을 포기하고 잔여부대를 동북지방으로 철수시키라고 지시했다. 이 소식을 들은 마오쩌둥은 크게 당황했다. 동북지방의 중심지인 션양에 김일성의 임시 망명정부가 들어서는 경우 이 지역의 100만 명이 넘는 조선족에 대한 모종의 주권을 주장하고 끊임없이 한반도를 향해 군사적 모험을 감행해 이로 인한 동북지방의 분쟁지대화와 불안정성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같은 중국의 내부적 안보위협 요인은 마오쩌둥에게는 북한과의 관념적 연대, 미국에 의한 외부적 안보위협, 자신에 대한 스탈린의 의심해소 그리고 기타 다양한 전략적 고려 등 여러 다른 요인들보다 훨씬 결정적인 ‘최종 변수’로 작용했다.
당시 스탈린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절대적으로 필요한 소련의 군사지원과 경제원조를 받기 위해 스탈린의 파병 요구를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마오쩌둥은 이런 사정 때문에 소련 공군의 지원을 사전에 보장받지 못한 채 13일 파병을 최종 결정하게 된다.
맥아더는 웨이크섬에서 중국과 소련의 개입 가능성을 묻는 트루먼에게 "그럴 가능성은 매우 적습니다"라고 일축하고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뒤늦게 중국군이 출병했음을 안 뒤에도 크리스마스까지 전쟁을 끝내고 승리의 월계관과 함께 개선하려는 욕심에 눈이 멀어 충분한 준비와 정찰 없이 무턱대고 반격을 명령했다. 최악의 실책이었다. 유엔군 전체가 무너졌고 38선 이남까지 단숨에 밀려나야 했다. 그러나 펑더화이의 승리는 단순히 맥아더가 중국군이 끼어들지 않을 것이라고 오판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전에 철저한 첩보를 통해 맥아더의 작전 계획과 유엔군의 전력, 병력 배치, 전선의 강약을 낱낱이 파악한 덕분이었다.
중국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맥아더가 자신을 뽐낼 요량으로 언론에 작전을 분별없이 떠벌렸던 탓도 있었지만 미국과 영국 정부 내에 소련 첩자들이 구석수거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전시동맹을 악용하여 침투한 뒤 주요 인사들을 회유하고 온갖 정보를 빼냈다. 반면 미국과 영국 정보기관은 소련 내부에 거의 침투하지 못했다. 스탈린체제가 워낙 폐쇄적인데다 당시에만 해도 미국과 영국은 국내 방첩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제2차세계대전에서 전쟁부 장관을 지낸 스팀슨은 국무장관 시절인 1929년 "신사는 남의 편지를 읽지 않는다"라는 어이없는 핑계를 들어 미국 최초의 암호해독기관인 '블랙챔어(The Black Chamber)'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 때문에 미국은 암호 해독과 첩보 능력에서 큰 타격을 입어 적어도 20년 이상 후퇴했을 정도였다. 정작 국내에서는 FBI의 독재자이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에드거 후버가 눈에 거슬리는 정치인과 유명 인사들의 뒤를 캐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소련이 트루먼의 예상보다 훨씬 빨리 핵 보유에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 역시 미국 내 첩자들을 이용하여 맨해튼 계획의 기밀을 빼돌렸기 때문이었다. 트루먼 행정부는 전쟁이 끝난 뒤 강력한 신무기인 원자폭탄을 독점할 요량으로 1946년 8월 핵무기와 관련괸 모든 원철 기술의 해외 반출을 금지하는 맥마흔법(McMahon Act)을 통과시켜 유럽 동맹국의 핵 개발을 차단했다. 이 때문에 영국, 프랑스 등 동맹국의 신뢰를 크게 떨어뜨리고 동맹관계를 심각하게 훼손했지만 정작 등잔 밑이 어두운 줄은 몰랐다.
냉전 초반 미국과 영국에는 소련에 동조하는 많은 첩자가 암약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케임브리지대학 출신의 엘리트 관료들로 구성된 '케임브리지 5인조'는 1930년대부터 공산주의에 심취하여 소련 첩자 노릇을 하면서 핵 개발 정보를 비롯한 중요 정보들을 넘겼다. 원자력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랐던 소련이 원자폭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맨해튼 계획에 참여했던 공산주의 동조자들이 연구 자료를 비밀리에 넘긴 덕분이었다. 소련 정보기관의 수장 베리야는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1943년부터 '보로디노 작전'을 수립하고 원자폭탄 개발을 위해 꾸준히 서방에서 정보를 빼냈다. 포츠담회담에서 트루먼은 "우리는 엄청난 위력의 무기글 손에 넣었소"라면서 넌지시 겁을 주었지만 스탈린이 시큰둥하게 반응하자 자신의 말이 무슨 소리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서라고 지레짐작했다. 실제로는 스파이를 통해서 트루먼 이상으로 내막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트루먼이 미국 바깥세상의 사정에 얼마나 무지했는지 보여주는 셈이었다. 덕분에 소련은 맨해튼 계획에 직접 참여했던 영국보다 먼저 핵 개발에 성공했다. 스탈린이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할 수 있었던 이유도 케임브리지 5인조의 한 명이자 영국 첩보기관 M16의 요원이었던 킴 필비를 통해 미국의 핵무기 보유량이 생각만큼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중략)
11월 24일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공세가 시작되었다. 유엔군과 한국군은 전 전선에 걸쳐 전진을 시작했다. 중국군도 미군 이상으로 준비가 불충분했다. 하지만 펑더화이는 미국 내에 소련이 침투시킨 첩자들을 통해 맥아더의 작전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로서도 미군을 상대로 무모한 모험을 시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출처: 별들의 흑역사, 권성욱 저, 2023년, 고유당, 470~550쪽
10월 11일 스탈린이 공군 엄호 못한다 통보
10월 12일 마오쩌둥은 공군 엄호 없이 못싸운다며 중공군 진격 중지하고 참전 반대로 전환.
10월 12일 스탈린이 만주에 북한 망명정부 세운다 통보
10월 13일 마오쩌둥이 참전으로 전환 이유는 만주에 북한 망명정부 세우면 주기적으로 통일한반도에 어그로 끌어서 결국 중국이 전쟁에 말려들테니.
실제 우리도 장제스가 1년 전 제주도에 공군기지 세우고 망명한다는 통보 남한한테 하자 초대 정떡이 거부했었음. 장제스가 본토 되찾는다 어그로 끌어서 국공내전 말려들까봐.
https://www.koreatimes.net/ArticleViewer/Article/132226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4340520그리고 마오는 맵햅 키고 싸울 수 있었음. 미국 국부무에 소련 간첩들이 정보 계속 주는거 스탈린 통해 받아서.
중공군에 가려져 간과되는 사실이지만, 소련(러시아)과 스탈린도 북괴 숨통 살려준 원흉이다.
매카시즘 나올 만했네 자가면역질환
북한의 만주 망명정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