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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는 지는 해였고, 청나라는 떠오르는 해인데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 한 사대주의자들이 명분에만 집착하여 실리적 외교를 등한시한 참사가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이라는 게 흔한 대중적 인식인데...


병자호란(1637년)당시 명나라와 청나라의 전쟁은 아직 한 쪽으로 확실히 전세가 기울지 않았음.


명나라의 야전군이 완전히 소멸한 것은 1641년의 송금지전(松錦之戰) 이후였고, 그나마 오삼계가 청나라에 귀순하기 전까지 산해관은 뚫리지 않았음.


또한 당시 명나라가 내부로 고영상, 이자성을 비롯한 농민 반란에 엄청나게 시달렸어도 이는 홍승주(洪承疇)가 주도한 강경 진압에 어느 정도 잦아들었음.


반면 청나라는 만주족, 피지배 한족, 포섭한 몽골족 등 여러 부족들의 연합체로 지도자였던 누르하치와 홍타이지의 능력과 위상에 가려졌지만 결속이 단단하다고 보기도 어려웠고, 무엇보다도 피지배 한족의 반발은 언제 터질 지 모르는 시한폭탄이었음.


결정적으로 청나라는 경제적으로 너무나도 허약했는데 조선에 미친듯이 교역을 요구했던 것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당시 속전속결을 위해 한양으로 내달렸고, 두 번 모두 조선군을 압도했음에도 조선을 완전히 멸망시키지 못 하고 철군했던 것도 바로 약한 경제력 때문이었음.


이를 보여주는 사례들이 여러 가지가 있는데 1628년에 원숭환이 복직할 당시 '요동을 5년 안에 평정할 수 있다'고 발언한 것, 청태종이 언제나 휴전을 조건으로 명나라에 물자를 요구한 것, 심지어 몽골 지방을 통한 우회 약탈전으로 어느 정도 사정이 나아진 병자호란 직전에도 군량 부족으로 청태종이 함께 출병할 동맹군인 몽골군한테 연합 훈련도 못 하게 '출병할 때 오라'고 명령한 것 등이 있음.


병자호란 승전을 통해 조선으로부터 물자를 대놓고 거하게 뜯어먹을 수 있게 된 청나라는 송산 전투 이후 명나라가 농민 반란으로 무너질 때까지 버티다가 입관하여 중국을 주워먹을 수 있게 되었던 거임.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조선이 청나라의 물자 셔틀로 전락하지 않고, 고려 현종 당시 귀주 대첩처럼 침략을 훌륭히 막아냈다면 청나라는 통일 왕조가 아닌 누르하치-홍타이지의 난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을 수도 있음.


굳이 인조를 변호하는 주장에서는 정변으로 집권한 인조 정권의 정치적 불안정성, 즉위 직후 이괄의 난으로 인한 서북 야전군 병력의 소멸 등을 핑계삼는데...


전술했던 고려 현종 역시 강조의 정변으로 즉위했고, 직후에 통주 전투로 엄청난 군사적 손실을 입은 것은 물론 실권자이자 후견인이었던 강조의 전사로 국가 지도부가 혼란에 빠졌고, 송(宋)나라는 별 도움이 안 되었고(...), 무엇보다도 한반도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구축하지 못 한 상태였음에도 끝끝내 2, 3차 여요전쟁을 승리로 이끌어내서 한민족 역사상 최고의 태평성대를 열어젖혔다는 점에서 변명이 될 수는 없다고 봄.


이렇듯 병자호란은 청나라에겐 굶어죽느냐 뜯어먹어서 사느냐 하는 도박이었고, 조선에게는 정묘호란이라는 예방 주사를 맞고도 인구가 1/3도 안 되는 적에게 무력히 굴복한 군사적, 국방 참사임이 명백한데 왜 외교 참사로 인한 굴욕으로 인식되는 건지 모르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