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blog.naver.com/bluwin12/223634694284

숫자의 덧없음: 에이스들의 격추기록에 대한 논란에 대해.글. 남태평양 특파원 마이클 존 클래링볼드 ‘에이스’라는 단어는 공중전의 어휘와 신화 모두에 자리잡고 ...blog.naver.com


내용 출처, 원문은 넷상에서 찾지 못했는데, 번역하신 분이 구매하신 잡지에 실려있는 기고글을 번역하신게 아닌가 생각함 





숫자의 덧없음: 에이스들의 격추기록에 대한 논란에 대해.


글. 남태평양 특파원 마이클 존 클래링볼드







7dec9e2cf5d518986abce8954488726e89


1944년 말 홀랜디아에 있는 P-40N의 킬마크. 이때쯤에는 상공에 일본기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1942년 일본이 태평양 전선을 개척한 이후 적 조종사들의 기량은 심각하게 저하된 상태였다. 




‘에이스’라는 단어는 공중전의 어휘와 신화 모두에 자리잡고 있다. 아군과 적군 모두의 ‘에이스’를 쉽게 비교하며 평판을 쌓고 신화를 구체화한다. 정확한 에이스의 스코어는 항공 역사 분야에서 항상 논란의 여지가 많은 주제 중 하나이다. 


 

‘에이스’라는 개념은 처음에 미국과 영연방 문화에서 적기를 5기 이상 격추 시킨 조종사에게 ‘에이스’라는 칭호를 부여해 포상과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도입됐다. 이 개념은 제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에서 시작됐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 육군이나 해군 공군에서는 ‘에이스’ 제도를 인정하거나 장려하지 않았다. 전투에서의 업적은 집단적 성과로 강조됐다.  







7def9e2cf5d518986abce89540867d6a3c


뉴기니에서 미 제5 공군의 전체 손실 중 70퍼센트가 전투와는 무관한 작전 중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일본인들은 놀랄 것이다. 제8사진정찰비행대의 F-5는 착륙 도중 통제력을 상실한 채 엉뚱한 곳에 추락해 전소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용어 자체에는 물음표가 붙어야 한다. 공중전은 본질적으로 혼란스럽고, 잘 기록돼 있다 하더라도 개별 전투에 대한 균형 잡힌 판단을 내리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이 주제에 대한 논의를 보면 의견은 다양한 데 비해 그게 사실인지는 확인하기 힘든 상태이다. 



격추를 주장한 것과 실제 결과를 정확하게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증거가 남겨진 경우는 드물다. 데이터가 단순히 존재하지 않거나 데이터가 너무 부족해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러나 특정 전장과 기간을 지정하면 격추기록을 정확하게 연구할 수 있다.


전장은 뉴기니이고 기간은 1942년 3월 중순부터 11월까지다. 당시 뉴기니 상공에는 수상기 부대를 제외하면 일본기는 타이난 해군 항공 전대(NAG) 하나뿐이었기 때문에 대조해보는 것이 어렵지 않다. 또한 우리는 호주공군 제75 비행대 소속 키티호크를 포함해 같은 기간 동안 연합군의 정확한 손실과 격추기록을 파악할 수 있다. 타이난 NAG의 기록은 많은 경우 연합군의 기록보다 더 상세하다.






7dee9e2cf5d518986abce89547807c6fdb8c


태평양에서의 일본군의 작전 손실과 전투 손실을 정량화하기는 어렵지만 1944년 말 폭격으로 불타버린 Ki-61과 같이 공중에서보다 지상에서 훨씬 많은 일본기가 파괴됐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기간 모든 날의 연합군 전투는 정확하게 조율할 수 있지만 결과는 놀랍다. 사카이 사부로는 전후 영어로 출간된 회고록을 통해 가장 잘 알려진 이 시기의 일본 조종사다. 사카이는 64기의 격추기록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 수치는 전기 작가인 마틴 케이딘이 지어낸 허구이다. 사카이 자신도 이 수치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이 숫자에 놀라워하며 그 근거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7de99e2cf5d518986abce8954288716f6d


제105 해군항공부대는 해군 항공대가 라바울에서 철수한 후에도 남아 전투를 지속하기 위해 창설됐다. 이 희귀한 사진은 현존하는 유일한 부대 사진이다. 앞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사카모토 요시오(958 NAG), 이케다 요시노부, 시바야마 세키젠, 나가이 지로, 하라 카츠시(958 NAG)다. 서 있는 이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미와타 노부오, 가네코 타카시, 가와토 마사히로, 킹고 서, 미나미가와, 테라오 시게오(958 NAG), 고치 이사오, 와코 후미오, 우메즈 토시카즈(958 NAG)다. 이 중 가와토 마사히로는 소설에 가까운 회고록을 집필했다. 그는 에어쇼에서 자신이 패피 보잉턴을 격추했다고 주장하는 자서전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진실은 전혀 달랐고 라바울에 있었던 전직 제로센 조종사들은 동창회 모임에서 가와토의 허황된 주장 탓에 그를 기피했다. 






사카이는 뉴기니에서 타이난 소속으로 4.3기의 격추를 기록했다. (소수점은 여러 대의 전투기를 균등하게 분배했기 때문이다.) 이후 1942년 8월 7일 과달카날 상공에서 SBD 돈틀리스 공격기와 F4F 와일드캣을 격추해 총 6.3기의 격추기록을 세웠으며 이전 중국 상공에서 한 차례 격추 시킨 것이 확인되어 총 7.3기의 격추기록으로 늘어났다. (중국 상공에서의 이전 세 차례의 격추는 입증할 방법이 없다.)


그는 또한 1941년 12월 10일 클라크 비행장 상공에서 B-17기를 격추했다고 했지만 미국의 기록은 이를 뒷받침하지 않으며 보르네오와 자바 상공에서의 다른 격추도 입증할 방법이 없다. 1944년 6월, 건강을 회복한 후 복귀했을 때 그는 또 다른 격추를 기록하지만 이 또한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없다. 따라서 사카이의 격추기록에 의심스러운 것들을 완전히 배제해버리면 그는 64기 격추와는 거리가 먼 7.3기에서 11기 사이를 기록한 것으로 결론 내릴 수 있다. 






7de89e2cf5d518986abce89544887c6574


1942년 8월 7일, 과달카날 상공에서 벌어진 전투가 1982년 미국에서 두 적대국의 조종사가 만나면서 재현됐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로덴버그와 미상의 인물(둘 다 SBD VB-6 비행대 소속), 타이난NAG 조종사 출신인 사카이 사부로와 SBD후방 사수 해롤드 존스다. 사카이가 그날 자신에게 부상을 입힌 존스에게 손상된 조종사 헬맷을 보여주고 있다. 







7deb9e2cf5d518986abce895418770686c


일본판 C-47인 ‘테스’가 필리핀 해 상공에서 격추되고 있다. 적기의 격추가 늘 이렇게 명백한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유명한 일본의 ‘에이스’는 니시자와 히로요시다. 그는 여러 ‘권위자’들로부터 최대 120기에 이르는 다양한 격추 기록을 인정받았다. 니시자와의 가장 보수적인 기록인 36기 격추는 일본 제로센 협회에서 인정한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제국 해군이 공식적으로 그에게 부여한 기록이기도 하다.


뉴기니의 타이난 NAG에서 복무하는 동안 그는 개인 25기, 공동 12기의 격추를 기록했는데 이 중 입증이 가능한 것은 3.9기에 불과하다. 1943년 5월 제251 NAG로 전출했지만 이 부대에서도 개인 격추를 기록하거나 인정받지 못했다. 니시자와는 1943년 10월 라바울을 떠날 때 지휘관인 오카모토 하루토시에게 총 86기의 확실한 격추 기록을 보고했다. 1944년 사망 당시 일본 신문 기사에는 니시자와가 150기 이상의 격추를 기록한 것으로 기록돼 있었다. 


 




7dea9e2cf5d518986abce8954583766e27


건 카메라 사진. 이 사진은 프랑스 북부 상공에서 영국공군 제198 비행대의 캐나다 출신 조종사 ‘플럼’ JMG 플라몽동 중위가 조종한 호커 타이푼 Mark IB가 Ju 88을 격추하는 장면을 찍은 것이다. 기관포탄이 Ju 88의 동체에 부딪혀 화염에 휩싸인 후 곧바로 50피트 상공에서 추락했다. 





일본의 전시 문화에서 특히 전투 중 전사자가 발생하면 군에서는 고인을 찬양하는 데 열을 올렸다. 조종사가 병으로 사망한 경우에도 군에서는 ‘전투 중 영웅적으로 전사했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하곤 했다. 매복했다가 격추된 경우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는 ‘적기 하나를 격추한 후 공중전에서 영웅적으로 전사했다.’고 적었다. 1944년 일본 제국 해군 관보에서 니시자와가 36기의 적기를 격추했다고 공표했을 때 그러한 주장에 대해서는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지만 연합군 기록에서는 이러한 주장을 입증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수치는 진실로 받아들여져 왔다. 하지만 사카이에게 적용한 것과 동일한 계산법을 사용해 니시자와의 격추기록을 실제 결과와 비교해 보면 약 12기 격추 정도의 스코어가 도출된다. 

 


더 극단적인 일본의 사례로는 육군 조종사 아나부키 사토루가 51기 격추의 기록을 세운 사례가 있다. 이 기록은 그의 일기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추정되는 자가 평가 점수에서 나온 것이다. 버마 작전 당시 그의 자가 점수는 48기로 공식 스코어인 30기 격추와 대조를 이룬다. 그의 가장 위대한 단일 작전은 1943년 10월 8일 버마 상공에서 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날 그는 리버레이터 폭격기 2기와 P-38 전투기 2기를 격추하고 이어 세 번째 리버레이터에 돌진하며 공격을 가했다. 이 전투는 일본에서는 예술작품과 기사를 통해 불멸의 명성을 안겼지만 그날의 기록은 단순한 낙관론이 아니라 완전히 조작된 것이다. 이날의 미국 기록에는 이와 일치하는 임무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7de59e2cf5d518986abce89547877d6fa4


1945년 4월 링가옌에서 제3 공중 특공단 루이 쿠르드 대위의 킬마크. 스코어보드에는 일본, 이탈리아, 독일, 미국의 승리가 적혀 있다. 이탈리아기의 격추는 사르데냐 상공에서 격추시킨 Mc.202이고 일본기 격추는 1945년 2월 7일 포모사 앞바다에서 격추시킨 ‘디나’이다. 이 업적으로 그는 추축국 3개국의 기체를 모두 격추한 미국의 ‘에이스’ 세 명 중 한 명으로 남게 됐다. 미군기의 격추기록은 그가 식별을 실패한 C-47기를 강제로 착륙시켰는데 다행히도 다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과잉 주장은 양측 모두에게 공통되는 것이었기 때무에 일본군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것은 상당히 불공평하다고 할 수 있다. 1942년 타이난 NAG는 뉴기니에서 도합 25기의 제로센을 공중전에서 잃었고 대부분의 손실은 작전 중에 발생했다. 25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최종적인 수치이다. 포트 모르즈비에서 에어라코브라를 운용하는 제8전투비행전대는 이 기간 동안 제로센 45기의 ‘확실한’ 격추와 약 20기의 ‘추정’ 격추를 주장했으며 제35전투비행전대 역시 비슷한 수치를 격추했다. B-26 마루더와 B-17의 기총사수들은 추가로 226기의 제로센을 격추했다. 호주공군 75비행대의 키티호크(실제로는 총 3기의 제로센을 격추)의 기록과 호주공군 허드슨 기의 격추를 더하면 1942년 뉴기니에서 연합군이 격추한 제로센의 숫자를 다 합치면 356기다. 다시 말해 ‘확실한’ 격추 기록 14건 당 실제 격추된 적기는 단 1기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다. 



태평양에서 미군과 일본군 공군 간 벌어진 최초의 순수한 전투기 대 전투기 간의 전투는 제39전투비행대 소속 라이트닝 12기가 일본군 제11공군연대 소속 오스카 8기를 상대로 벌인 전투였다. 그 결과 미군은 10기의 격추(추정 포함), 일본군은 2기 격추와 2기의 추정격추를 주장했다.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일본 전투기 단 한 기만 완전히 격추됐고 다른 한 기는 손상을 입은 채 귀환하는 도중 불시착했다. 일본기와의 공중 충돌로 인해 손상된 전투기(불시착 도중 손상된 전투기)를 포함해 단 2기의 P-38 전투기가 손상됐을 뿐이다. 


 


격추기록과 실제 기록 사이의 차이가 큰 이유는 무엇일까?


대부분의 조종사가 선의의 의도로 격추를 기록한 것이 분명하므로 격추기록이 정직하지 않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런 격차가 발생하는 데에는 몇 가지 중요한 이유가 존재한다. 첫 번째는 공중전이 매우 찰라에 벌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 조종사가 같은 적기를 공격하는 것이 일번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적기가 이미 피해를 입은 상태에서 추가로 더 많은 전투기의 공격을 받은 경우 실제로는 누적된 공격에 대해 각각 별도의 기록이 제출되는 경우가 많았다. 둘째로 뉴기니의 습한 열대 공기에서는 윙팁이 증기 운무를 생성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높은 ‘G’의 선회에서는 단순히 증기 흔적만 있어도 적기를 적중시킨 것으로 보일 수 있었다. 셋째, 일본의 제로센은 스로틀을 갑자기 올리면 배기관에서 검은 연기를 내뿜는 경향이 있었는데 이로 인해 엔진이 손상됐다고 생각해 격추라고 기록한 것이 늘어났다. 


 


마지막 이유는 아마도 가장 가슴 아프고 이해하기 힘들지만 가장 흥미로운 이유이기도 하다. 전투 심리학자들은 극도의 압박을 받는 인간은 종종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생존이 위태로운 상황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놀라운 일이 아니지만 뇌가 어떻게 그리고 왜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지는 아직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1942년 4월 17일 포트모르즈비 서쪽에서 벌어진 교전에서 호주공군 75비행대의 핵심 조종사가 제출한 상세한 전투 보고서에서 그 전형적인 예가 느러난다. 비록 청구인은 적기의 추락을 보지 못했다고 최종적으로는 인정했지만 카울링 부품이 기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목격하는 등 적기의 파손이 자세히 묘사돼 있다. 실제로 그날 제로센만 피해를 입었고 고토 타츠스케는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다. 그는 전투기를 라에로 복귀해 꼬리 번호 V-152를 불시착시켜 전투기를 폐기했지만 잠시 회복한 후 고토는 다시 비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공군 보고서에는 조종사가 자신이 목격했다고 믿는 것을 제출한 점에서는 사실이지만 고토의 전투기 손상은 기껏해야 피상적인 수준이었다. 이 사건은 극도의 압밥감 속에서 인간의 행동에 대한 사례 연구이기도 하다. 




7de49e2cf5d518986abce8954386706dc1



1942년, Fw190이 스핏파이어에게 격추되는 장면을 촬영한 카메라 영상에서 보여주듯 ‘격추’가 확실한 경우는 무척 드물었다. 





7ced9e2cf5d518986abce89547897d6d53



1942년 4월 17일, 호주공군 제76 비행대 장교인 바니 크레스웰은 뉴기니 상공에서 타이난NAG와의 교전 중에 목숨을 잃었다. 연합군 측에서는 목격하지 못한 전투에서 그는 사카이 요시미가 조종하는 제로센 전투기와 충돌했고 이후 대형에서 이탈해 추락했다. 크레스웰은 ‘격추’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다



장부의 반대편에서 청구가 제출되진 않았지만 그 반대의 상황이 발생한 사례도 많이 존재한다. 전형적인 사례는 1942년 4월 17일, 같은 날 호주공군 76비행대의 비행대장 바니 크레스웰이 다른 키티호크 조종사 우즈 중위와 함께 라에를 향해 완숙 출격할 때 발생했다. 이 비행은 크레스웰의 첫 전투임무였다. 그들은 반대 방향으로 향하는 13기의 제로센과 조우했다.



전투 보고서를 보면 양쪽 모두 똑같이 놀랐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수저으로 열세였던 호주공군 조종사들은 포트모르즈비로 안전히 귀환하기 위해 유일하게 합리적인 선택인 후퇴를 택했다. 크레스웰은 이 교전으로 3기의 제로센이 탄약을 소진해 가면서 목숨을 잃을때까지 싸웠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교전 후 제로센들이 포트모르즈비로 향하던 중 잠시 후 사카이 요시미가 대형에서 이탈해 밀림에 추락했다. 그와 그의 전투기 모두 크레스웰의 사격에 피해를 입었지만 크레스웰은 ‘격추’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지 못했다. 이 시대의 역사는 이런 비유로 가득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에 대한 가장 상징적인 공격인 진주만 공습조차 아직도 미군과 일본군의 당시 전투를 정확하게 비교하지 못하고 있다.


어느 편에 속해 있었는지 어느 전장에서 싸웠는지에 따라 격추기록은 상이해지는데 독일 공군 정보국에서 1942~1943년 루프트바페 제12비행단에서 수집한 기록에서 독일측 기록과 약간씩 과소 주장한 것으로 추론했다. 또한 전후 독일의 공식 라이도 방송은 일부 예외를 제외하고는 일번적으로 실제 손실을 반영했으며 이를 영국공군에서는 ‘선전의 밤’이라고 불렀다.





7cec9e2cf5d518986abce8954587766f53


솔로몬 제도 전역에서 일본 비행정 여러 대가 B-17 폭격기에게 근거리에서 기총사격에 의해 격추됐다. 이런 격추의 경우 실제로 발생했으며 일본 기록에 의해 입증됐다. 넓은 조종석 뒤의 관찰자 구역에서 찍은 이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군 장교가 관찰자로 탑승하기도 했다.



다른 전역과 다른 전쟁시대에서 ‘에이스’를 어느 정도까지 확인할 수 있을까? 루프트바페의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흩어져 있고 조율되지 않았기 때문에 유럽에서의 초기 전쟁은 특히 문제를 발생시킨다. 현재 미국 역사가가 이 문제를 연구하고 있지만 결과는 아직 몇 년이 지나야 나올 예정이다. 전쟁 후반기에 건카메라가 도입됐지만 이마저도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P-38에서 촬영한 필름은 카메라가 기수에서 왼쪽 폭탄 걸쇠로 옮겨지기 전까지는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유명했다.


심하게 파손된 항공기가 고의로 급강하해 기지로 성공적으로 복귀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결론은 양측의 주장이 정확하게 분석된 사례는 극소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역사의 이면을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대부분의 ‘에이스’의 격추기록은 강등될 것이라고 장담한다.


물론 숫자 게임은 경박하다고 볼 수도 있다. 숫자가 반드시 누군가의 능력이나 사안의 중요성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이스’라는 개념은 제2차 세계대전은 말할 것도 없고 제2차 세계대전의 거대한 공중전에서 작용한 보다 실질적인 요소에 비하면 사소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설득력 있게 제기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젠가는 소위 ‘사실’로 굳어진 여러 가지 허구가 아니라 오래 전 전 세계 하늘에서 실제로는 어떤 일이 있어났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생기면 좋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