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역갤에서 구한말 조청관계 관련글들 좀 모았던 거 가져옴

서세동점의 시기에 청나라가 지들 가진 거 지키겠다고 발악한 결과 조선에 대한 이들의 정책도 점차 위협적으로 바뀌었음


1.


조미조약체결 기운이 성숙되어 감에 따라, 이홍장은 주일공사 하여장의 건의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하여장은 고종의 밀사 이동인(李東仁) 등과 접촉한 이후 자주 총리아문과 이홍장에게 서함을 보내어 조선의 조약체결에의 개입과 그 조약문상에 조선이 청국의 ‘속국’임을 명문화 할 것을 주장하고, 이홍장이 조미조약 체결을 직접 주관할 것도 요청하였었다. 이홍장은 하여장의 이런 건의를 받아들여 그 자신이 직접 천진에서 미국 전권과 협상하고, 나아가 ‘속국’임을 명문화 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2.


1876년 조선의 문호개방은 단순한 ‘개국’의 문제가 아니라 조선을 둘러싼 국제관계의 변동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조선은 전래적인 동아시아 국제질서로서의 조공관계를 청과 유지하면서 일본 및 서구와는 만국공법적인 조약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것은 전근대적 조공체제 아래에서의 조청일 삼국의 전통적 관계가 만국공법체제에 편입되면서 새로운 국제관계로 바뀌어감을 의미했다. 이로써 조선은 서로 다른 국제질서가 공존하는 가운데 자주적 근대화를 위한 개화정책을 추진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초기개화정책이 전근대 조공관계의 타파라는 방향성을 갖고 진행되었지만, 오히려 조선이 청과의 관계에서 근대적 ‘속국’으로 변질되어 가는 결과를 가져왔다.조선의 초기개화정책은 전래적인 조공관계의 틀 내에서 이를 이용하면서, 또한 그로부터 끊임없이 벗어나고자 하는 과정에서 추진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조선의 개화정책 추진은 청이 조선 내정에 간섭할 수 있는 빌미를 주었다. 임오군변 이후 청일전쟁으로 조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청이 가해온 정치적 군사적 폭력을 동반한 외압은 조선의 근대사회로의 이행을 저애한 결정적 외적 요인이었다. 1882년의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은 이 외적 요인의 근거를 마련해주는 토대가 되었다. ‘장정’ 체결을 계기로 조선과 청의 전통적 조공관계가 와해된 상태에서도 전통적 조선 ‘속방’ 문제는 조선 자체를 비롯해 청, 일본에 의해 자국에 유리한 대로 서로 이용되는 테제가 되었다. 이 때문에 청일전쟁에서의 패배로 청이 조선에서 물러나자 조선과 청간의 전근대적 조공관계가 드디어 폐기되었다는 인식의 오류도 나오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요컨대 조선정부의 개화정책 좌절로 인한 내정 실패가 1894년 농민전쟁으로 폭발된 후, 조선과 청, 그리고 일본 사이에 일어난 조선 ‘속방 자주’ 논란은 청과 일본이 전통적인 조공관계를 상투적으로 이용했던 實例 중의 하나일 뿐이었다. 궁극적인 목적은 조선에 대한 근대 식민지적 지배권을 유지 또는 확보하려는 과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3.



조선이 청일전쟁으로 중국과의 전통적 조공관계가 철폐되었다는 인식이 굳어지게 된 근거 중의 하나는 청일강화조약 제1조라고 생각된다. 실제로 조선과 청의 관계가 청일전쟁 이전 어떤 성격을 갖고 있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청과 일본의 대조선정책 논리에 익숙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조선과 청의 전통적 속방관계가 청일강화조약 제1조의 문구에 의해서 철폐된 것이 아니며, 1899년 한청통상조약체결로부터 조선과 청의 근대 공법적 대등관계가 시작되었음을 규명함으로써 조청관계에서 청일전쟁이 의미하는 바를 다시 생각해보고자 했다. 그에 따라 우선 조선 ‘속방’이란 명제가 청일전쟁 직전 조선과 청, 일본 사이에 어떻게 작위적으로 이용되었는지 살펴보았다. 1876년 문호개방 이후 조선정부는 개화정책을 추진하면서 조선 ‘속방’이란 명분을 이용해 청으로부터 인적, 물적 지원을 받으려고 했다.

그러나 청은 오히려 조선 ‘속방’을 이용해 조선에 대해 근대 식민지적 지배를 꾀했다. 그 결과로서 체결된 것이 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이었다. 조선 ‘속방’이란 명제는 청일개전 직전에도 조선·청·일본 삼국 간에 이용되었다. 1894년 농민전쟁을 진압하고자 조선정부는 조선 ‘속방’이라는 명분을 이용하여 청병차병을 요청했고, 청 또한 속방보호를 명분으로 조선문제에 개입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것이 1876년 조선과 일본 간에 체결된 강화도조약 제1장 조선은 ‘자주의 국’이란 규정에 위반하는 것이라 하여 청군 구축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조선정부에 들이대고 청일전쟁 개전으로 나갔다. 조선 ‘속방’ 문제가 일본의 조선침략에 이용되었던 것이다.

청일전쟁 이후 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강화조약 제1조는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하고, 자주독립을 해치는 조선국의 청국에 대한 貢·獻上·典禮 등은 영원히 폐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로 인해 조선과 청 사이의 전근대 ‘속방’관계가 마치 청일전쟁 때까지 지속된 것처럼 인식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1882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체결 이후 청의 조선에 대한 압박은 근대 식민지적 지배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전근대 조선 ‘속방’관계는 이때 이미 와해되었던 것이다. 이후 청의 조선에 대한 압박은 근대 식민지적 지배의 성격을 띠면서, 조선의 내·외정을 간섭했다. 이에 따라 조선은 반청정책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러나 청의 조직적인 압박으로 인해 반청정책이 번번이 실패하던 중 1894년 농민전쟁이 발발하게 되었고, 이 사건은 청일전쟁이 일어나는 하나의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청일강화조약 1조의 문구가 실제적으로 어떻게 운용되고 있었는지를 1899년 한청통상조약체결까지 두 나라 교섭 과정을 통해서 본다면, 그 실천적인 측면이 매우 약하다는 것이다. 즉, 청은 조약문구의 조선 ‘자주독립’이라는 것은 舊章 즉 1882년의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비롯하여 과거에 체결된 조약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지 명실상부한 조선과 청, 두 나라의 대등관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이것은 청일강화조약 제1조의 조약문구가 조선에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일본과 청의 필요에 의해서만 운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결국 조선은 청일전쟁 이전 전개했던 반청정책의 연속선상에서 조선을 ‘속방’으로 여기는 청에게 지속적으로 대등한 조약체결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조선을 둘러싼 국제관계를 이용해 대한제국은 청과 대등한 자격으로 1899년 한청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비록 한청통상조약에 몇 가지 문제점은 있으나, 1880년대 이후 조선의 반청정책이란 관점에서는 큰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우선 한청통상조약은 한·중 양국의 모든 교섭에서 양국의 평등한 권리와 자주적 권한의 행사에 공법적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한청통상조약 체결은 청과의 불평등관계에서 탈피하고자 전개된 반청정책의 귀결점이 되었다. 나아가 1882년 체결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불평등한 내용들이 한청통상조약에서는 쌍무적으로 평등하게 조정되었다는 점에서 대한제국에게는 조약개정의 의미도 갖는 것이었다.





4.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850868


청은 기존의 화이질서를 폐기하고 만국공법의 속국 개념을 도입하여 조선의 내치‧외교의 자유를 제한하고 종주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청은 근대 국제법체계에서 조청 간의 종속관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목적으로 조선이 조약을 맺을 때마다 속방 조항의 명문화를 시도하였고,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점차 강화하였다.

청의 간섭을 견제할 힘을 미국에서 얻고자 하였던 고종은 조선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주미한국공사관 설립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조선이 국제사회에서 청과 대등한 국가로 인식되며 마침내 청의 종주권을 부정당하게 될 것을 우려한 청 정부의 이홍장과 원세개는 주미공사 파견을 반대하였다. 한편 서양 열강의 견제를 통해 청의 내정간섭을 중단시킬 목적으로 파미를 단행하였지만, 조선의 내치 및 외교의 자주성을 회복하는 데 있어 화이질서의 극복까지는 고려하지 않았던 고종은 이러한 한계로 인해 전권대사를 파견하는 것에는 성공하였으나, 영약삼단을 수용하는 외교적 실수를 범하게 되었다.

고종에 의해 공사관 서기관으로 발탁된 알렌은 국제무대에서 조선이 청의 속국임을 대외적으로 공개하여 자신들의 종주권을 인정받으려 한 청의 외교적 전략을 저지하고 조선이 국제사회에서 청과 대등한 국가로 인식될 수 있도록 국가적 위신을 지켜주었다. 또한 그는 여전히 중국 중심의 화이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를 노정하고 있었던 주미공사 일행을 설득하여 국제사회에 조선이 자주 독립국임을 입증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그러나 더욱 강화되는 청의 간섭과 고종 및 정부 관료들이 가진 국제정세 인식의 한계는 조선이 전통적 사대질서를 극복하고 국제법상의 자주 독립국으로 나아가는 길을 요원하게 하였다.






5.



이 글은 광서제의 즉위 이후 청의 변방 및 조선 정책에 대해 해방론의 맥락에서 해석해 보고 자 시도한 것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19세기 말 청은 본토의보전을 목적으로 본토의 문호(門戶)가 되는 속국과 속지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 문호정책(門戶政策)과 인식은 청의 각료들은 청 내부뿐만아니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를 고려한 것으로, 청 조정이조선과 같은 속국과 대만 등 속지를 보전하는 방안을 모색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정책이 당시 청 조정 내에서 중요하게 논의되고 있었던 해방론(海防論)의 맥락에서 나왔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당시 청 조정의문호정책은 청 조정의 내부 정치 관계와 관련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1870년대 청의 속국 정책과 그 논의를 살펴보면, 특히 조선과 대만 두지역을 각각 “동북(東北)의 문호(門戶)”와 “남양(南洋)의 문호(門戶)”로 인식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의 경우, 청의 중요한 속국이자, 내정에 자주가보장된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1880년대 이전 청은 조선이 서구 국가와의 통상과 교섭을 권도하면서, 조선이 자연스럽게 균세지법(均勢之法)의 질서 속에서 스스로 국가의 지위를 보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자 하였다. 그러나 조선에서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등 조선에서 내란이 연달아 발생하게 되면서, 청조정은 기존의 속국 정책을 버리고 군대를 파견하고 내정에도 간섭하는 등 적극적인 자세로 전환하게 된다.




6.
https://www.dbpia.co.kr/journal/articleDetail?nodeId=NODE07250470



「청ㆍ일수호조규」ㆍ「조ㆍ일수호조규」가 맺어진 1870년대의 후반이 되면 청은 점차 적극적으로 이러한 변화에 대응해야만 하였는데, 중요한 계기의 하나가 된 것이 바로 1879년 일본이 종래 동시에 청의 조공국 이기도 하였던 琉球를 병합하였던 사건이라는 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일본의 해외팽창은 청의 藩封ㆍ藩部에 대한 위협,즉 영토와 국경 문제를 직접 건드리는 민감한 사안이었기 때문이다.가장 중요한 조공국 조선이 다음 차례가 되고,그렇게 되면 바로 滿洲,나아가 北京이 위태로워질 염려가 있었다.

더구나 이 무렵 청은 新疆 지역의 혼란과 야쿠브 벡의 반란을 틈탄 러시아의 伊利 점령(1871)으로 러시아와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琉球문제에 대해서는 강경책을 취할 수도 없었다.청은 左宗棠을 파견하여 新疆의 반란을 진압하고,이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崇厚를 파견하였지만, 그가 맺은 리바디아 조약(1879년)은 러시아 측에 크게 유리하였으므로 청은 비준을 거부하고 다시 曾紀澤을 파견하여 조약 개정을 요구하였다. 이리분쟁은 증기택이 1881년 상트 페테르부르크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해결되었지만, 청은 이러한 사태를 통해 점차 국경과 주권의 개념에 의거하여 러시아의 위험을 방지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은 러시아에 대비하여 신강이나 만주지역에 邊防 强化를 도모하면서 이 지역에 漢人의 임용을 배제해오던 청대의 전통과는 달리 유능한 漢人 고위 지방관을 선발ㆍ파견하는 뚜렷한 정책적 변화를 시도하였다. 내지와 번부를 분리하던 방식에서 번부에도 行省을 설치하여 내지의 통치체제를 확장하는 이러한 정책 전환은 만주에서의 吳大澂의 활약이 보여주듯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이를 통해 번부나 만주 지역의 漢化 또는 內地化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와 비슷한 무렵 청은 조선을 방어하기 위해서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조선이 각국과 조약을 맺고 통상관계를 시작하도록 유도하는 정책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여전히 以夷制夷의 관점에서 만국공법을 이용하여 서구국가를 활용하면서도,아울러 기존의 사대질서를 그대로 유지하는 방향이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체제 정비가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어 中興意識이 확산되는 한편 대외강경책을 주장하는 淸流派의 활동이 강화되어 國權主義的 外交가 출현하게 되는 光緖 初期의 상황이 반영되고 있었다.

청에서는 “외번이 모두 잘려나간다[外藩盡削]”는 위기의식이 깊어지자 조선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러한 전환을 이끈 것은 1879년 丁日昌의 上奏였다.그는 조선이 각국과 조약을 맺고 중국의 비밀스러운 군사적 원조로 충분히 圖存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비슷한 여러 의견이 제시되자 총리아문은 李鴻章을 통해 조선에 서양과의 조약 체결을 권고하게 하자고 奏請하였다.이에 따라 이홍장은 列國과의 立約通商 추진을 권고하는 서한을 전부터 연락을 취하던 조선의 李裕元에게 보내, “毒으로 독을 공격하고 敵으로 敵을 제압하는 방책을 써서,기회를 틈타 서양 각국과도 조약을 맺고 이를 통해 일본을 견제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제안하였다. 이때 총리아문도 직접 나서서 그것을 중재하겠다는 의사[‘從中排解’]를 보였는데, “대신 대책을 마련해 도와줄 것[借箸代籌]”이라는 이러한 정책 전환은 ‘속방자주론’이라는 것이 원래 不變의 原理가 아니며,上國은 상황 변화를 이유로 얼마든지 屬邦에 대한 기존 정책ㆍ입장을 바꿀 수 있는 주도권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해준다.

물론 당시 淸 朝野의 논의에 신중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초대 일본주재 공사로 동아시아 정세를 잘 파악하고 있던 何如璋이 1880년 4월 총리아문에 보낸 서한에서 조선을 직접 중국에 병합하여 內地化[郡縣化]하는 것이 上策이고, 大臣을 파견하여 내정ㆍ외교를 대신 주지하게 하는 것이 中策이며, 서양 각국과 조약을 맺게 하는 것이 下策이라고 제안하였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그는 조선의 國是가 一變하였음을 확인하자 총리아문에 「主持朝鮮外交議」를 올려 內地化의 방안을 배제하고, 大臣을 파견하여 내ㆍ외정을 대신 주지하는 방안도 상책이지만 곧바로 시행할 수는 없으니 서양과 조약을 맺게 하여 均勢를 유지하게 하는 방안을 채택해야 한다고 바꾸어 제안하였다.

주목할 것은 그가 “조선이 스스로 남과 조약을 맺게 놔두면 다른 나라들은 모두 自主로 간주하여 중국의 屬國이란 이름을 곧장 잃게 된다”고 우려하였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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