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신규 '유도탄 호위함'의 함장들 중 일부는 NTDS(해군전술자료처리체계) 개발팀에 쳐들어와 그들의 새로운 함에 탑재될 NTDS에 대한 불신을 표하곤 했다. 연구원들은 '전자뇌가 핵탄두 미사일을 멋대로 쏘면 어쩌냐', '컴퓨터가 까라는대로 까는게 말이 되냐' 등의 반론에는 새 디지털 체계는 단지 방공전의 도우미일 뿐이란 해명을 했다. 차마 말하지 못한건, 그 함장들이 NTDS 사용을 정말로 거부했다면 즉시 경질당하리란 사실이었다 - NTDS의 급한 개발과 투입은 다름아닌 해군 최고위 수뇌부의 결심이었으므로.


대전기에 기동부대 전투기 관제관이었던 해군부장관 존 코날리와 해군참모총장 알레이 버크는 해군함선국의 작은 부서에 지나지 않는 NTDS 프로젝트팀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며, 본래 13년이 걸렸을 연구를 2년만에 마치도록 채찍질했다. 이유는 수뇌부 대부분도 모르는 극비사항이었다. 해군본부는 1950년대 초, 함대방공전 시뮬레이션에서 미해군 수상함대가 신형 고속 제트공격기와 스탠드오프 미사일을 활용한 대규모 공습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결과가 나왔단 걸 소련측에게 철저히 숨기려 했으므로.


1954년의 미해군은 - 타국 해군 전부가 그랬듯이 - 수동으로 방공전 관제를 하고 있었다. 스코프에서 위치를 딴 아군기와 적기들의 위치와 방위, 속도는 조명이 달린 커다란 수직 상황판에 일일히 기름펜으로 작도됐고, 고도나 적아 정보도 같이 기입되었다. 그러면 상황판 반대편의 작전장교들과 대공포, 전투기 관제관들이 도판에 전술상황을 그려가며, 정보에 따라 구체적인 대공전 지시를 결정했다.

1944년 6월 3일 USS 과달카날의 CIC.

1944년 8월 5일 USS 호넷의 상황판.


당연히 수백 기의 항공기를 한 함정의 CIC가 죄다 감당하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고, 때문에 이 방공전 체계는 기동부대의 각 함정에게 담당 구역을 (원형 케이크의 가느다란 한 조각 형태로) 배정하며 시작되었다. 각 함정은 자기 할당구역 내의 대공포 및 요격기 자산을 통제하여 식별된 적 위협을 제거하고, 자신의 케이크 조각에서 인접한 타 함정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적기에 대해 해당 함정으로 통신하며 서로의 방공구역을 연계했다.


대전기엔 어찌저찌 이걸로도 충분했지만, 이미 (고속으로 꼬라박아서 종잡기 힘든) 카미카제와 (일단 제로센 카미카제보다 빠르기는 존나빠른) 유인유도폭탄 오카 상대로의 방공전투에서 이 인력노가다식 체계는 힘겹게 버텨내고 있었다. 당장 미해군의 오카 대응법은 그냥 이거 분리되기 전에 모기인 베티를 날려버리는 거였지, 고속탄을 레이더로 식별해서 예측경로 작도해가며 대공요격해내는 게 아녔다.


이미 대전기에도 레이더가 날것의 데이터는 많이 주는데, 그걸 가공해서 바로 적용할 정보로 만드는건 좀 힘들단 지적들이 있었다. 전시 총장 어니스트 킹 제독은 병기국에 레이더가 수집한 정보를 '딸깍'하면 자동으로 쫘악 시각적 디스플레이해서 직관적으로 이해하도록 하는 체계 개발을 45년 8월 주문했다.


하지만 말이 쉬운 일이지, 1948년 당시 미해군은 여전히 1945년의 수동 작도를 하고 있었다. 대전기 레이더의 큰 선구자 중 하나였던 영국 해군도 별다를 건 없었다. 문제는 항공기술도 전탐 못잖게 무섭게 발전해서, 1947년이면 척 예거가 음속을 돌파했고 제트 공격기들이 속속 개발되었단 것이었다. 48년 영국 해군은 여러 방위, 여러 고도에서 제트기가 함대를 공격하는 시나리오로 도상연습을 실시했다. 수동 방공체계로는 12건의 공습에 동시 대응이 가능했고, 20건이 넘어가면 방공체계가 무너져 내렸다.


미해군도 1950년에 소련 공군을 가상적으로 함대 도상연습을 실시했다. 미리 제출된 공습계획과 실제 탐지해 대응한 결과와의 대조는 충격적이었다. 일단 공습기 중 25%는 아예 함대의 그 어떤 함정의 CIC에도 기록되지 않아 완전히 놓쳤다. 그리고 탐지, 추적되던 나머지 75% 중에서도 약 75%만에게 대공포나 요격기 등 방공자산이 할당되어 관제되었다. 설령 방공자산이 할당된 표적들이면 격추율 100%란 터무니없는 가정을 하더라도, 이미 공습기들 중 절반은 단 한 발의 조준공격도 받지 않고 유유히 함대를 유린한다는 막장 결과였다.


당연하게도, 이 도상연습은 즉시 최고 기밀로 지정되었다.


해군은 함대방공 딜레마에 두가지 경로로 접근했다. 먼저, 기존 대공포보다 사거리와 정확도가 우월한 신형 함대공 미사일의 개발. 그리고 수동 레이더 경로작도와 전투관제를 대신할 자동화 대공전투 보조체계의 마련. 전자는 가시적인 성과가 착착 보였으나, 후자는 새롭게 떠오른 디지털 기술의 접목 전까진 쉽사리 달성하지 못한 과제였다.


대전기 미해군의 주력 대공포는 5인치 38구경장 함포, 3인치 50구경장 함포, 20mm와 40mm 기관포 등이었다. 소구경 대공포의 유효사거리는 2마일이었고 3인치와 5인치 포의 경우 6마일 남짓했다. 숙련된 5인치 포 1문은 3초에 1발을 쏘아대며 일본 해군 사이에 '아메리카 해군이 5인치 기관포를 보유한다'는 소문을 돌게 했다.


1944년 중반, 미군은 스탠드오프 미사일 병기를 한창 실험하고 있었다. 병기국은 존스홉킨스 응용물리학연구소에 기존 대공포의 사거리를 훨씬 상회하는 대공병기 개발을 주문했고, 연구소는 공기흡입식 램제트 엔진을 장착한 초음속 대공미사일의 개념을 제시했다. 60마일 사거리의 미사일은 아날로그 사통컴퓨터와 연동된 사통레이더로 유도되고, 표적 근처에서 근접신관으로 기폭될 터였다.


45년 1월, 미사일의 핵심 부품인 램제트 엔진이 '범블비' 프로젝트로 개발되기 시작해 10월에 완성되었다. 비록 일본이 9월 2일 무조건 항복을 하며 당장 급한 불은 꺼졌지만, 초음속 공격기의 위협은 여전히 대응해야 했기에 해군은 연구개발의 속도를 계속 늦추지 않을 것을 주문했다. 연구소에서 해군과 계약된 개발부가 '섹션 T'였기에 계약하 개발된 함대공 미사일들은 T자 돌림 이름을 썼고, 첫 램제트 유도탄의 이름은 TALOS가 되었다.

1960년 6월 3일, 유도탄 순양함으로 개장된 USS 리틀 록의 탈로스 미사일.


램제트 미사일의 단가는 무척 비쌌기에, 응용물리학연구소는 STV-3이라 명명된 2단 고체로켓 비행체로 탈로스의 비행특성과 레이더 빔유도를 시험했다. '빔 라이더' 유도시험은 성공적이었고, 연구소는 해군에게 STV-3에 탄두를 달면 20마일의 중거리 함대공 유도탄을 뽑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 이는 마침 해본에서 빨리 결과를 뽑아내라고 압박받고 있던 병기국의 구미에 당겼고, 레이더 빔에 사냥개처럼 바짝 달라붙는 이 미사일은 TERRIER라 이름지어졌다.

USS 보스턴의 탈로스 포대와 Mk25 Mod7 미사일 유도 레이더.


탈로스 미사일은 30피트 길이에 탄창과 발사기, 유도장비까지 큰 공간을 차지해 경순양함 이상의 체급부터 장비할 수 있었다. 보다 축소된 테리어도 여전히 경순급 체급을 요했고, 1953년 해본은 구축함 체급에도 장비할 수 있는 소형 대공유도탄 개발을 주문했다. 응용물리학연구소는 테리어의 2단 로켓을 단일화하고 5인치 포와 탄약고에 집어넣을 수 있도록 발사대를 소형화한 신형 미사일체계를 제안했고, 10마일 사거리의 TARTAR 미사일은 1955년 10월 양산 계약에 성공했다.

유도탄 구축함이 장비한 소형 타타르 미사일.


이들 미사일들은 새로 개발되는 전투체계에서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이었지만, 어찌보면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았다. 2층 건물만한 구조물에서 정밀 유압구동으로 조정되는 사격통제 레이더는 좁은 유도빔을 지속적으로 조사하며, 함 운동과 표적 운동을 감안해 지속적으로 조준을 보정했다. '락온' 이후에는 아날로그 사통컴퓨터가 표적의 위치를 계속 연산하여 미사일을 예정 요격위치로 유도했다.


적 위협 중 우선순위 결정은 빠르게 이뤄져야 했고, 이를 위해선 무기관제체계(WDS)가 고안되었다. 레이더 데이터 자동처리의 선구자격이었던 이 체계는 8개까지의 표적 속도와 예상위치를 레이더 스코프에 띄웠고, 이를 보는 무기관이 고위험 표적을 지정하면 그 표적의 정보가 미사일 사통컴퓨터에 입력되는 방식이었다.


포술시험함으로 재지정된 대전기 전함 AG-128 미시시피가 함대공 미사일체계를 최초로 시험했다. 1952년 8월 설치된 시험형 테리어 미사일은 53년 1월 시험 실사에 성공했다. 중순 USS 보스턴이 뒤이어 최초로 '실전' 테리어 미사일 포대를 함미 8인치 자리에 55년에 장비하며 첫 유도탄 순양함이 되었고, 자매함 캔버라도 56년에 두번째 유도탄 순양함이 되었다. 59년 경순양함 갈베스턴이 탈로스 미사일을 장비하며 더 비싼 램제트 유도탄도 배치되었고, 이후로도 50년대 말 대전기 순양함 여럿이 탈로스, 테리어, 타타르 운용함들이 되었다.

USS 미시시피의 테리어 시험발사.


슬슬 개장할 대전기 순양함들이 동나자, 미해군은 신규설계 함대방공함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탈로스는 물론이고 테리어 체계도 6천톤 이상의, 기존 구축함을 넘는 체급을 필요로 했다. 이에 미군은 테리어를 운용하는 구축함보다 큰데 순양함보다 작은 새 함급을 방공함으로 구상했고, 이걸 '유도탄 호위함'이라고 부르며 헐넘버엔 선도구축함의 Destroyer Leader, 유도병기의 Guided를 써서 DLG라 불렀다. 테리어를 주무장으로 5인치 함포와 대잠병기, 최신 소나 등을 갖춘 새 유도탄 호위함 쿤츠급은 55년 주문되었고, 60년 7월 15일 첫 DLG인 USS 쿤츠가 취역했다.

새 유도탄 호위함급의 초도함 USS 쿤츠. 테리어 미사일을 장비했다.


이 유도탄 호위함들은 갈수록 체급이 커져가다, 마지막 버지니아급 유도탄 호위함에 이르면 그냥 경순급 배수량이 되었다. (그래서 미해군도 소련해군보다 우리가 순양함이 적다던 'Cruiser gap' 언플 논란 때 신규건함 대신 그냥 쿨하게 얘들을 순양함으로 택갈이해서 '자 이제 순양함 늘었지?'로 해결했다.)


한편, 이들 3T 함대공미사일은 여전히 기름펜으로 직접 상황판에 작도하는 CIC에서 지휘받고 있었다. 오퍼레이터들은 반대편에서 관제관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거울대칭으로 쓰는 법부터 익숙해져야 했고, 기동판으로 빠르게 함 위치를 수기 표시하며 표적과 상대거리와 방위를 계산해내는 것이 CIC 당직을 서는 신임 소위의 주요 소양이었다.


50년대 초에도 레이더에서 뽑아내는 로우 데이터가 아닌 그 가공처리가 핵심이란 건 인지되어 있었다. 소련 공군의 대규모 초음속 공습에 대한 함대방공 문제해결은 시급했고, 미해군은 레이더 데이터처리 자동화의 해결책만 나온다면 자본은 어떤 규모든 투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문제는 '어떻게?'였다.


50년대에 이를 진행한 프로젝트 중 중요한 건 3가지 정도가 있었는데, 모두 막 부상하는 디지털 기술을 응용하려 했다. 이중 하나는 거의 성공할 뻔했는데, 개발주체는 미해군이 아니었다. 대전기에 대서양전투 연합군 대잠전력의 절반 가까이를 공헌하고도 선단 지휘를 종종 형님 해군들에게 넘겨 뿔나있던 - 그래서 차기 연합대잠전 상황에선 지휘통제를 우리에게 맡겨야만 할 이유를 만들려 하던 - 캐나다 왕립해군이 그 주인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