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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안열은 본래 심양(瀋陽) 사람으로, 원나라 말기에 병란(兵亂)을 피해 공민왕을 따라서 본국으로 오자 원주(原州 : 지금의 강원도 원주시)를 본향(本鄕)으로 삼게 했다. 안우(安祐)를 따라 홍건적을 격퇴한 공으로 이등공신으로 책봉되었으며 그 후 거듭 승진해 판소부감사(判少府監事)가 되었다. 또 안우 등과 함께 개경을 수복한 공으로 일등공신이 되고 곧 예의 판서(禮儀判書)벼슬을 받았으며 추성보조공신(推誠輔祚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다. 이어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승진하고 다시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옮겼다. 재추들이 교외에 모여 잔치를 열었을 때 변안열이 임견미·염흥방 등과 함께 박희(拍戱)1)로 승부를 다투기도 했다.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있으면서 최영과 함께 제주를 정벌하고 귀환하자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가 되었다가 평리(評理)로 옮겼다.
우왕 초에 추충양절선위익찬공신(推忠亮節宣威翊贊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으며 양광·전라도 도지휘사(楊廣全羅道都指揮使) 겸 조전원수(助戰元帥)로 나갔다. 왜적이 부령(扶寧)에 침구해 행안산(幸安山)에 올라가자 변안열이 나세(羅世)·조사민(趙思敏)·유실(柳實)과 함께 군사를 독려해 공격함으로써 적을 대파하였으며 적의 수급을 많이 베었다. 승전의 소식이 올라가자 우왕이 은 1정(錠)과 안마(鞍馬)와 의복을 하사했으며, 개선하자 도당에서 천수사(天水寺)2)까지 나가 나희(儺戱)3)판을 벌여 영접했다. 이후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승진했다.
왜선 5백 척이 진포(鎭浦) 어귀로 들어와 굵은 동아줄로 배를 서로 묶어놓고 군사를 나누어 수비하다가 마침내 해안에 상륙해 각 고을로 분산 침략하면서 분탕질을 저질렀다. 나세(羅世)·심덕부(沈德符) 등이 진포에 이르러 화포를 쏘아 적선을 불태우니 수비하던 적병이 거의 불에 타 죽거나 익사했다. 수세에 몰린 적이 발악을 부리느라 포로로 잡았던 남녀를 다 죽여 시체가 산같이 쌓였고 지나는 곳마다 피바다를 이루었다. 적군은 330여 명만 살아 도망쳤으며 배를 지키던 적 중에서 죽음을 면한 자는 옥주(沃州 : 지금의 충북 옥천)로 달아나 이미 상륙했던 자들과 합세해 이산(利山 : 지금의 충북 옥천군 이원면)과 영동현(永同縣 : 지금의 충북 영동군)을 불태우고 영동감무(永同監務)를 죽였다. 또 황간(黃澗 : 지금의 충북 영동군 황간면)·어모(禦侮 : 지금의 경북 금릉군 어모면) 두 현(縣)도 불태우고 다시 중모(中牟)·화령(化寧)·공성(功城)·청리(請利) 등 여러 현(縣)으로 쳐들어와 상주(尙州)를 불태운 다음 이레나 머물면서 술판을 벌였다. 전라도 원수(元帥) 지용기(池湧奇)의 휘하에 있던 배검(裵儉)이 적정을 정탐하겠다고 자원하자 원수들이 허락하였다. 적진에 이른 배검을 적이 죽이려고 하자 그는,
“천하에 사자(使者)를 죽이는 나라는 없다. 우리나라의 장수들은 정예를 무수히 거느리고 있으니 싸우면 기필코 이기게 마련이나 너희들을 모조리 섬멸한 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너희들은 한 고을을 차지하고 눌러앉아 사는 것이 좋을 것이다.”
라고 설득했다. 적은,
“그것은 속임수다. 너희 나라에서 정말 우리를 살리려고 한다면 왜 우리의 배를 빼앗았는가? 우리도 충분히 작전이 서 있다.”
하며 배검에게 술을 대접하고 드디어 철기(鐵騎)로 호송해주었다. 왜적이 2, 3세 된 여아를 데려다가 머리를 깎고 배를 갈라 깨끗이 씻은 다음 쌀과 술을 같이 차려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좌우로 벌여 서서 풍악을 울리며 큰 절을 올렸다. 제사가 끝나자 쌀을 움켜서 나누어 먹고 술 석 잔을 마신 다음 아이를 불태웠는데 창(槍)자루가 갑자기 부러졌다. 점치는 자가, “우리들이 이곳에 머물면 반드시 패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곧 군사를 이끌고 선주(善州 : 지금의 경북 선산군)로 달려가 고을을 불태웠으며 경산부(京山府)에도 침구했다. 이리하여 3도(道)의 바닷가 고을들이 모두 텅 비어버렸으니 왜적의 침구가 있은 이래 이 같은 일은 처음이었다.
우왕이 우리 태조를 양광·전라·경상도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임명하고 변안열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보좌하게 하였으며 왕복명·우인열·도길부·박임종(朴林宗)·홍인계(洪仁桂)·임성미(林成味) 및 태조의 서형(庶兄) 이원계(李元桂)를 원수(元帥)로 삼아 모두 태조(太祖)의 지휘를 받게 했으며 각자에게 말 두 필씩을 하사하였다. 출정군이 장단(長湍)에 이르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는데 점치는 자가 싸움에 이길 조짐이라고 예언했다. 사근내역(沙斤乃驛)에 주둔하고 있는 왜적을 원수 배극렴(裵克廉)·김명휘(金命輝)·지용기(池湧奇)·오언(吳彦)·정지(鄭地)·박수경(朴修敬)·배언(裴彦)·도흥(都興)·하을지(河乙沚)가 공격하였으나 패전하여 박수경과 배언이 전사하고 전사한 사졸도 5백 명이 넘었다.
왜적이 함양(咸陽 : 지금의 경남 함양군)을 도륙한 후 남원산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퇴각하면서 운봉현(雲峯縣 : 지금의 전북 남원시 운봉)을 불태운 후 인월역(印月驛)에 진을 치고서, 광주(光州 : 지금의 광주광역시)의 금성(金城)에서 말을 든든히 먹인 후 북쪽으로 진격할 것이라고 떠벌이니 온 나라가 크게 떨었다. 태조가 길에 널린 시신을 보고 슬퍼 잠을 이루지 못했으며 변안열과 함께 남원에 당도하자 배극렴 등이 도중에 영접하면서 다들 기뻐했다. 태조가 하루 동안 말을 쉬게 한 다음 이튿날 새벽에 싸우려 하자 장수들이, 적이 험한 곳에서 웅거하고 있으니 나오는 것을 기다려 싸워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그러나 태조는 분연히,
“군사를 일으켜 적을 공격할 때는 오히려 적이 나타나지 않을까 걱정해야 하는 법이거늘 이제 적을 마주쳤는데도 공격하지 않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며 장수들을 전투 대형으로 배치했다. 이튿날 아침에 적을 격파할 것을 맹세한 후 동쪽으로 운봉(雲峯)을 넘어서 적진과 수십 리 떨어진 황산(荒山) 서북까지 진군해 정산봉(鼎山峯)에 올랐다. 태조가 길 오른쪽에 나있는 험한 오솔길을 보더니,
“적이 필시 이리로 나와 우리 후방을 습격할 것이니 내가 이리로 가야겠다.”
고 말했다. 장수들은 모두 평탄한 길을 따라 전진하다가 멀리서 적의 등등한 기세를 보고 싸우지도 않고 퇴각하였다. 해가 이미 기울었는데 태조가 험한 길에 접어들자 적의 정예 기병이 과연 튀어나왔다. 태조가 대우전(大羽箭) 20발을 쏘고 계속하여 유엽전(柳葉箭)4) 50여 발을 쏘았는데 모조리 적의 면상을 맞춰 죄다 거꾸러뜨렸다. 적과 세 번 맞부딪쳐 힘껏 싸워 섬멸했는데 그 땅이 진흙탕이라 피차간에 모두 빠져서 서로 엎어지고 자빠졌지만 나와 보니 죽은 자는 모두 적이었고 아군은 한 사람도 부상하지 않았다.
적이 산에 웅거하고 굳게 지키자 태조가 사졸을 지휘하여 요해처(要害處)에 나누어 진을 치게 한 후 휘하의 이대중(李大中) 등 10여 인으로 하여금 싸움을 걸게 하였다. 태조가 공격해 올라갔으나 적이 사력을 다해 치고 나오니 아군은 쫓겨 내려왔다. 태조가 장졸(將卒)들을 돌아보며, “말고삐를 단단히 잡고 말이 쓰러지지 않게 하라.”고 지시한 후 다시 나팔을 불게 하여 군사를 정돈하고 개미처럼 기어올라 적진으로 돌격하였다. 이때 적장 하나가 창을 들고 바로 태조 뒤로 달려와 사태가 매우 위급했다. 편장(偏將) 이두란(李豆蘭)이 말을 달려와, “장군, 뒤를 보시오! 장군, 뒤를 보시오!” 하고 외쳤으나 태조가 미처 보지 못하므로 이두란이 그를 활로 쏘아 죽였다.
말이 화살에 맞아 거꾸러지자 태조는 즉시 바꿔 탔으며 또 맞아서 거꾸러지면 다시 바꿔 탔다. 날아온 화살이 왼편 다리를 맞혔으나, 태조는 화살을 뽑아버리고 더욱 기세를 올려 전투를 몰아갔기 때문에 군사들은 태조가 부상당한 것도 알지 못하였다. 적이 태조를 여러 겹으로 포위하자 태조는 기병 몇 명과 함께 포위를 뚫고 나왔으며, 적이 또 태조의 앞으로 돌격해오자 태조가 그 자리에서 8명을 죽이니 적이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태조가 하늘의 해를 가리켜 맹세한 후 좌우의 부하들에게, “겁나는 자는 물러가라. 나는 적과 싸우다 죽으련다!” 하고 격려하니 감격한 장수들이 용기백배해서 다들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적은 요지부동이었다. 갓 십오륙 세 되는 적장 하나가 용모가 수려하고 비할 데 없이 용맹스러웠는데, 백마를 타고 창을 휘두르면서 돌진해오니 그가 가는 곳마다 아군은 감당을 못하고 쓰러졌다. 아군은 그를 아지발도[阿只拔都]라 부르며 다투어 피했는데 태조가 그 자의 무용을 보고 아깝게 여겨 이두란에게 생포하라고 명령했으나 이두란이, “그 놈을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많은 사람에게 피해를 입힐 것입니다.”라고 반대했다. 적장이 견고한 갑옷을 두르고 또 구리 투구를 쓰고 있어 화살이 들어갈 틈이 없는 것을 본 태조가, “내가 투구 증자5)를 쏠 터이니 투구가 떨어지거든 네가 즉시 쏘아라.” 하고 약속했다. 말을 달리며 화살을 쏘아 바로 증자를 맞히자 끈이 끊어져서 투구가 기울었다. 그 장수가 급히 바로 잡는 순간 태조가 다시 화살을 쏘아 또 증자를 명중시키니 투구가 떨어졌고 그 틈을 타 이두란이 즉시 사살해버렸다.
이를 본 적의 기세가 꺾이자 태조가 돌진하여 힘껏 싸우니 적의 정예군이 모두 쓰러졌고 적의 통곡 소리는 마치 만 마리의 소떼가 우는 것 같았다. 적이 말을 버려둔 채 산으로 올라가자 아군 부대들이 이긴 기세를 타고 마구 뒤쫓아 올라가니 북소리와 함성이 땅을 마구 흔들어 사방이 무너지는 듯 했다. 마침내 적을 대파하니 그 피로 시냇물이 온통 붉어져 예닐곱 날이나 빛이 변치 않으므로 사람들이 마시지를 못하고 모두 그릇에 담아 오래 가라앉힌 뒤에야 마실 수 있었다. 노획한 말이 1,600여 필이며 병장기는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지인(知印) 김국(金鞠)을 보내 승전보를 올리자 우왕이 기뻐하여 밀직사(密直使) 인원보(印元寶)를 보내 궁중의 술을 하사하고 위로했으며 김국에게는 낭장(郞將) 벼슬과 말 한 필을 하사하였다.
처음에는 적이 우리보다 열 배나 많았는데 그 중 70여 명만이 지리산으로 달아났다. 태조가, “천하에 적을 섬멸시키는 나라는 없다.” 하며 끝까지 추격하지 않고 물러나 크게 군악(軍樂)을 울리고 나례희를 열어주니 군사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으며 적의 수급(首級)은 산같이 쌓였다. 장수들이 싸우지 않은 죄를 추궁당할까 겁을 낸 나머지 머리를 땅에 찧어 피가 낭자한 채 살려주기를 빌었다. 태조는, “조정의 처분에 달려 있다.”고 하며, “적 가운데 용맹한 자는 거의 다 죽었다.”고 말한 후 웃으면서 장수들에게, “적을 칠 때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고 타이르니 장수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당시 포로가 되었던 자가 적진에서 돌아와,
“아지발도가 이장군의 진용이 잘 짜여진 것을 보더니 자기 부하들더러, "이번 군대의 군세를 보니 과거의 장수들과는 비교가 안 된다. 오늘 전투는 너희들이 각각 조심하라.”고 당부하더이다. 애초 아지발도는 섬에 있을 때 출정하지 않으려 했으나 그 무용에 탄복한 왜적들이 굳이 청하여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적의 우두머리들도 그를 보러 올 때에는 반드시 달려와 꿇어 엎드렸으며 부대의 지휘도 모두 그가 맡았습니다.”
라고 알렸다. 이번 행군에서 부대가 사용하는 장막의 기둥을 모두 대나무로 바꾸자 태조가,
“대는 나무보다 가벼워서 멀리 운반하기에 편하기는 하나 그 또한 민가에서 심은 것이며 또 우리가 옛날부터 사용하던 장비가 아니다. 옛 장비만 잃지 않고 가져가면 족하다.”
고 타이르니 군사들이 탄복하며 모두 버렸다. 태조가 이르는 곳마다 백성의 물건을 추호도 범하지 않음이 모두 이와 같았다.
동녕(東寧)전투에서 태조가 적장 처명(處明)을 생포했으나 처형하지 않았는데, 처명이 그 은혜에 감복하여 매양 화살 맞은 흔적만 보면 그때마다 목이 메어 눈물을 흘렸으며 항상 좌우에서 시종했다. 이번 싸움에도 처명이 선봉에 서서 힘껏 싸워 공을 세우니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였다.
태조가 군사를 정돈하여 귀환하자 최영이 백관을 거느리고 오색 장막을 설치해 온갖 놀이판을 벌이게 한 후 열을 지어 천수사(天水寺)의 문 앞에서 영접했다. 태조가 바라보고 말에서 내려 달려가서 두 번 절하니 최영도 역시 두 번 절하고 앞으로 나와 태조의 손을 잡고 눈물을 뿌리면서, “공이 아니면 누가 이같이 할 수 있겠소?”라고 치하했다. 태조가 머리를 숙이고,
“삼가 현명하신 공의 지휘를 받아 요행히 승첩(勝捷)을 거둔 것이지 제가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적의 기세가 이미 꺾였으나 혹시 다시 발호하는 일이 있다면 제가 마땅히 책임을 지겠습니다.”
고 사례했다. 최영이,
“공이여! 공이여! 이번 전투로 나라가 되살아났으니 공이 아니었던들 나라가 장차 어디에 의지하겠소?”
하니 태조가 당치 않는 말이라고 겸손해 했다. 우왕이 태조와 변안열에게 각각 금 50냥(兩)씩을 주고 왕복명 이하 장수들에게는 각각 은 50냥씩을 하사하니 다들, “장수는 적을 죽임이 직분이니 저희들이 어찌 감히 받으오리까?” 하며 사양했다. 태조의 위엄과 명성이 더욱 두드러지니 왜적이 우리나라 사람을 사로잡으면 반드시, 이만호(李萬戶)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물은 후 감히 태조의 부대에는 접근치 못하고 반드시 틈을 엿보아 침구하곤 했다.
변안열이 임견미·이인임과 함께 정방(政房)6)을 맡게 되자 서로의 욕심을 채우려고 공장(工匠)이나 재력이 있는 자를 반드시 먼저 벼슬에 올렸다. 왜적이 단양군(丹陽郡)에 침구하니 변안열이 한방언(韓邦彦) 등과 함께 격파하여 80여 급(級)을 베고 말 2백여 필을 노획하였다. 또 한방언 등과 합세해 왜적을 안동(安東)에서 격파해 30여 급(級)을 베고 말 60 필을 노획하자 그를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으로 봉하고 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올렸으며, 공양왕(恭讓王) 초에는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었다.
김저(金佇)의 옥사7)가 일어났을 때 김저가, 변안열·이림(李琳)·우현보(禹玄寶)·우인열(禹仁烈)·왕안덕·우홍수(禹洪壽)와 내응해 우왕을 맞이하려 공모했다고 진술했다. 이에 낭사(郞舍) 윤소종·이첨(李詹)·오사충 등이,
“변안열은 신우를 맞아다가 다시 왕으로 세움으로써 왕씨(王氏)의 제사(祭祀)를 영원히 끊고자 하였음은 김저의 진술로 명백히 드러났으며 나라 사람들도 다 아는 바입니다. 바라옵건대 헌사에 회부해 적합한 형벌을 내리고 가산을 적몰하소서.”
라고 상소했다. 왕이 사면령이 내리기 전에 있었던 일이라는 이유로 파직만 시켰는데, 다음 날 또 상소하자 삭직(削職)만 시키고 한양(漢陽)에 유배보내도록 조치했다.
애초 우왕이 강릉(江陵)으로 추방되었을 때 어느 사람을 보고, 자신을 그르친 자는 변안열이라고 탄식한 적이 있었다. 김저를 문초했으나 불복하므로 칼로 발바닥을 몇 치 가량 째고 단근질을 하자 묻는 대로 모두 자복해 드디어 옥사(獄詞)가 성립되었으며 변안열도 그 죄에 연루되었다. 이에 윤소종 등이 다시,
“홍영통(洪永通)·우현보(禹玄寶)·왕안덕(王安德)·우인열(禹仁烈)·정희계(鄭熙啓) 등이 변안열의 역모에 참여한 것이 드러났으니 왕씨(王氏)의 신하와는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입니다. 바라옵건대 변안열·홍영통·우현보·우인열·왕안덕 등을 극형(極刑)에 처(處)하소서.”
라고 건의했으나 회답을 주지 않았다. 이에 윤소종 등이 다시 건의했다.
“홍영통(洪永通)은 이인임·임견미·염흥방에게 빌붙어 함께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그 흉악한 무리들이 다 처형되었으나 홍영통8)만은 우왕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목을 보전하고 있습니다. 우현보는 수상까지 지냈으면서도 수탈로 쌓은 재물을 잃을까 두려한 나머지 간사한 아첨을 일삼음으로써 우리의 미풍양속을 훼손했습니다. 왕안덕은 장수로 이름을 걸어놓고도 매양 전투에서 패배하였으며, 남포(藍浦)의 전투에서는 전 부대가 궤멸되어 나라의 위신을 크게 손상시켰으니 군법을 적용해 마땅히 참수해야 합니다. 우인열은 이속(吏屬) 출신으로 권세가의 연줄을 타고 정부(政府)에까지 자리를 차지했으나 백성에게 공덕을 끼쳤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 정희계는 염흥방과 인척을 맺어 불의한 짓을 자행했으나 신우의 처인 최천검(崔天儉)의 딸 덕분에 요행히 무진년 때도 처형을 면하였습니다. 이 다섯 명은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므로 그 자리에서 기필코 처형되어야 합니다. 하물며 변안열의 음모에 끼어 신우를 다시 추대코자 하였으니 이들은 모두 천지(天地) 간에 용납 받지 못할 죄인으로써 전하께서 사사로이 용서할 수 없습니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대의로써 결단하여 해당 관청에 회부한 다음 국문하여 치죄하게 하소서.”
왕이 허락하지 않자 간관이 대궐문에 엎드려 허락을 기다리면서 한낮이 되도록 물러가지 않았다. 이에 왕이 심덕부(沈德符)와 우리 태조를 불러 의논하고 교지를 내렸다.
“변안열은 이미 관직을 삭탈하여 유배보냈고 홍영통·우현보·정희계 등은 김저의 공술에 의해 그 사건과 무관함이 입증되었다. 왕안덕은 회군할 당시 왕씨를 회복하는 의논에 협력한 바 있으며, 변인렬은 과거 설장수(偰長壽)와 함께 명나라에 가서 우왕의 폭정을 보고한 일로 미루어 김저의 음모에는 반드시 참여치 않았을 것이니 파직만 시킨다.”
또 왕이 밀직부사(密直副使) 유용생(柳龍生)을 홍영통 등에게 몰래 보내, “내가 있으니 경들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안심시켰다. 이날 여우가 수창궁(壽昌宮)9) 서문(西門)에서 나와 효사관(孝思觀) 서쪽 언덕으로 달려 들어가자 낭사(郞舍)가 다시 상소했다.
“여우는 음류(陰類)로서 굴에 사는 동물이니 소인이 권세에 의탁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전(傳)에서도 소인을 제거하기 어려움을 ‘성벽에 굴을 뚫고 사는 여우는 물을 대어 잡을 수도 없다.’고 말했으니 성벽은 권세가를 비유한 것이며 여우는 소인을 비유한 것입니다. 지금 신 등이 궐문에 엎드려 소인을 제거할 것을 청하고 있는데 요망한 여우가 나타났으니 이는 소인이 다 제거되지 못한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하늘이 책망하여 보내는 경고임이 분명합니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여우같이 의심을 품고 있는 자는 남을 참해(讒害)하는 구설(口說)10)을 가지고 온다.’ 하였으니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먼저 하늘이 보낸 경고를 두려워하시고 다음으로 조종의 왕업을 생각하시어 변안열 등 여섯 명의 죄를 바로 잡음으로써 조종에 사과하신다면 하늘의 견책도 그칠 것입니다.”
왕이 청허(聽許)하지 않았다. 대사헌(大司憲) 성석린(成石璘)이 또 상소하여 변안열의 처형을 간언했다. 마침 강도가 나타나 성문 밖에서 사람을 위협해 재물을 탈취하니 윤소종 등이 왕의 면전에서 이렇게 건의했다.
“당나라 헌종(憲宗) 때에 오원제(吳元濟)가 채주(蔡州)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승상(丞相) 무원형(武元衡)과 중승(中丞) 배도(裴度)가 토벌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때 이사도(李師道)11)가 절도사로 있으면서 오원제와 내응해 자객을 보내 무원형을 암살한 후 배도의 머리에 상처를 입혔습니다. 신하들이 오원제에게 특사를 내려 절도사들을 무마시키자고 주장했으나 헌종이 듣지 않고 배도를 승상으로 삼아 끝내 오원제를 평정하고 천하를 평안케 하였습니다. 지금 왜적이 개경 가까이 있고 또 한양(漢陽)에도 있는 터에 강도가 발생한 것은 사실상 이 무리들 때문이니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을 마친 후 물러 나와,
“저희들이 등이 전에 변안열의 대역죄에 대해 다섯 차례나 상소하여 치죄할 것을 청하였으나 전하께서 관용을 베풀어 다만 한양(漢陽) 별업(別業)에 안치하게 하니 나라 사람들이 실망하였습니다. 바라옵건대 그 죄에 적합한 형벌을 내려 난적(亂賊)을 징계하소서.”
라고 상소했다. 왕이 그 소(疏)를 헌사에 내리며, “유배지에 가서 국문할 필요 없이 그냥 처형하라.”고 지시했다. 헌사에서 밤에 녹사(錄事) 손원식(孫元湜)을 시켜 한양부윤(漢陽府尹) 김백흥(金伯興)에게 공문을 보내 변안열을 처형하게 하였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까닭도 묻지 않고 대신을 갑자기 극형에 처할 수는 없다고 하자, 왕은 좌사의(左司議) 오사충과 집의(執義) 남재(南在)를 보내 국문하게 하였다. 오사충 등이 벽제역(碧蹄驛 : 지금의 경기도 고양군 벽제읍 고양리)에 이르러 손원식을 만났는데 이미 변안열을 처형하고 귀경하는 길이었다.
변안열이 처형될 즈음에, “우왕을 맞아오려고 했던 사람이 어찌 나뿐이랴?”라고 탄식하며 무어라 말을 하려 했으나 김백흥이 묻지 않고 형리에게 명하여 밖에 데리고 나가 참수하게 하였다. 이에 윤소종 등이 건의했다.
“자고로 난신적자(亂臣賊子)가 한패와 작당하지 않고서는 감히 악한 짓을 한 예가 없습니다. 듣건대, 역신 변안열이 처형될 즈음에 스스로 ‘저는 죽어도 마땅하나 함께 모의한 자가 많은데 왜 저만 죽는 것입니까?’라고 말했으나 한양부윤 김백흥이 더 이상 묻지 않고 처형했다고 합니다. 변안열의 심복으로 부장(部將)인 통산군(通山君) 이을진(李乙珍)이 필시 그 역모에 가담했을 것이니 반드시 국문해야 합니다. 또 김백흥이 역적과 한패가 되어 사실을 덮어버린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에 김백흥을 파직시키고, 사평제공(司平提控) 박위생(朴爲生)과 사헌규정(司憲糾正) 신효창(申孝昌)을 청주(淸州)로 보내 이을진을 국문하게 했다. 혹독한 고문이 가해지자 그는 공술에서 이림(李琳) 및 아들 이귀생(李貴生), 정주목사(定州牧使) 이경도(李庚道), 정지(鄭地)·원상(元庠)의 이름을 대었다. 원상은 변안열의 처족이므로 대간에 명하여 순군과 합동으로 국문하게 하자 그는 다만 사전개혁(私田改革)을 원망한 나머지 우왕을 맞아 옹립함으로써 그 일을 저지하려고 했을 뿐이라고 진술했다.
이에 오사충과 장령(掌令) 권담(權湛)을 안주(安州)로 보내 이경도를 국문하게 하고 남재(南在)와 좌헌납(左獻納) 함부림(咸傅霖)은 전주(全州)에서 이림을, 계림(鷄林)에서 정지 및 이귀생을 국문하게 하였다. 또 대간에 명하여 순군과 합동으로 김백흥과 원상을 국문케 하였다. 김백흥이 옥중에서 죽자 왕은 옥관이 혹형(酷刑)을 가해 죽은 것으로 의심하고서, “죄를 처자에게까지는 주지 않는 법이니 변안열의 처족은 면죄시키라.”고 지시하고 원상을 석방시키게 했다.
얼마 후 위화도회군 때 세운 변안열의 공적을 기록하도록 지시했는데, 그 뒤 윤이·이초의 공술에 그의 이름이 나왔으므로 공신 칭호를 삭제하고 가산을 적몰하였다. 아들은 변현(邊顯)·변이(邊頤)·변예(邊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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