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때 방패군은 중앙군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면서 시위와 숙위, 순작과 같은 기본 임무 외에도 다양한 임무에 동원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세종대 중반부터는 금군인 내금 위 13) 와 별시위 14) 등의 병종이 강화되면서 차츰 역군(役軍)으로 동원되는 일이 잦아졌다.
세종 1년(1419)에 경기도 선군(船軍)의 장정과 도성에 있는 방패를 영솔하여, 수강궁 누문 공사에 출역하도록 하고 있는데,15) 이때부터 역사에 투입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 다. 이어서 세종 1년(1419), 보충군과 당령 선군 등과 함께 천보산(天寶山)에서 재목을 벌채하는 임무가 부여되고,16) 세종 2년(1420)에는 풍양 이궁에서 못을 파고 못 가운데 수각을 지어 낙성하는 역사에 동원되는 등 17) 등 역군으로서 모습이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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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패군에 대한 역사 투입에 대한 비판과 이를 원위치로 돌리려는 노력은 단종 즉위년 에도 있었다. 당시 영선을 관장하는 도청(都廳)의 전권을 맡은 이명민이 방패와 섭육십 등을 마음대로 부리고 조정하여 궁내부의 공사뿐만 아니라 황보인, 정분, 김종서의 별실 까지 도청의 자재를 이용하여 짓고 인력을 동원하는 폐단이 있었다. 정인지가 병조판서 가 되면서 도청에 예속된 방패와 섭육십을 금군으로 임무를 수행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 하였지만, 황보인을 등에 업은 민신 등의 모략으로 이러한 조치는 흐지부지되었다.
-조선 전기 팽배와 대졸에 관한 연구


그 와중에 황보인 수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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