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기, 캐나다 왕립해군은 42년 말이면 선단호위 전력의 48%를 제공하고 있었지만, 자기 배들을 어떻게 사용할지 발언권은 제약된 상태였다. 영국 왕립해군은 캐나다 해군을 여전히 '남들(=미군) 앞에서 투정부리는 꼴 못 보여주고 얌전히 있어야 할 남동생' 취급했고, 미해군은 같은 대륙에서 대서양함대의 전력차를 내세우며 꺼드럭댔다. 1943년 3월, 캐나다는 대서양선단 회담에서 목소리를 내어 캐나다 북서대서양 전구의 지휘권을 얻어올 수 있었지만, 이 연합대잠전의 기억은 오래도록 남았다.


'다음 전쟁'에서 캐나다 해군이 발언권을 내려면, (그때도 당연히 동맹일) 영국, 미국에 비해 특화되어 이끄는 영역이 있어야만 했다. 캐나다 해군은 그 답을 대잠전에서 찾았고, 선단의 각 함선을 레이더로 인식/잠수함 접촉을 소나로 인식한 후 이들을 종합해 자동으로 지속 추적할 체계를 구상했다. 이러한 체계 탑재함이라면 영미의 체계 비탑재함들과 함께 편성되어도 지휘함 역할을 자연스레 맡을 것이고, 캐나다 해군은 자기 함들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유지할 것이었다. 캐나다군은 이 체제를 디지털 자동추적결정체계(Digital Automated Tracking And Resolving System), 약어로 DATAR 시스템이라고 불렀다.

DATAR의 트랙볼. 현대 볼마우스의 시초격 물건이다.



비록 당장은 이 연산을 수행할 핵심부품, 디지털 컴퓨터가 없었지만, 캐나다군은 미군의 ENIAC, EDVAC에 눈독을 들였다. 48년, 영국 맨체스터대에서 EDVAC 컨셉을 기반으로 Mk1 컴퓨터를 개발했고, 캐나다 해군은 이에 주목하여 50년 Mk1 컴퓨터 3대를 구매해 DATAR 시제기 3대를 제작했다. 각 시스템은 소나, 레이더, 컴퓨터, 그리고 수동으로 소나와 레이더 스코프에 나온 표적을 입력할 트랙볼 입력장치로 구성되었다. 3개의 시스템은 UHF 데이터링크로 연결되었고, 각 개소가 80×80마일 영역에서 64개의 표적을 연산할 수 있었다.


시제형 DATAR 3대는 각각 온타리오호에 띄운 소해함 디그비, 그랜비, 그리고 호수변의 연구시설에 설치되었고, 1953년 진행한 데이터 링크 시험도 성공했다. 문제는 진공관을 사용하는 Mk1 컴퓨터의 덩치가. 작은 소해함 후미 절반을 꽉 채웠고, 과열 문제도 꽤 심각했단 것이다. 또한 캐나다 정부가 DATAR 연구예산을 삭감하며, 한때 전세계 1위의 자동화 선두주자였던 캐나다 왕립해군은 정체기를 걲게 되었다.


다음 시도는 미해군 전기연구소에서 벌어졌다. 대공황 때 수병으로 입대해 전자준위로 임관하고, 진주만 직후 USS 렉싱턴의 CXAM 레이더를 고치는 걸 시작으로 신형 잠수함용 레이더를 개발하는 등의 연달은 업적을 세워, 연구개발 지휘보직 수행을 위해 더 윗계급으로 특별임관한 어빈 맥날리 소령이 연구를 지휘했다.

맥날리 준위가 처음 두각을 보인 CXAM-1 대공수색레이더.



맥날리는 사람이 레이더 경로를 직접 작도하면 데이터 일부분만 표기하는 걸 보았고, 레이더 연구의 방향성을 데이터 처리를 자동화해 다량의 데이터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잡았다. 1단계는 접촉물의 위치, 방향, 속도 등 정보의 전기신호화, 2단계는 각 접촉물의 연속된 궤적의 시각화, 3단계는 방위와 속도를 통한 다음 예상경로의 시각화, 4단계는 이 모든 정보를 종합하여 본 화면 위에 다시 표시하는 식으로 구상되었다.


맥날리의 팀은 8-10개의 표적을 추적하고, 하나의 광점을 조이스틱으로 추적해서 좌표를 딸 수 있는 장치를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연산능력에 한계가 있었고, 덩치와 신뢰성도 이슈였다. 맥날리는 새로 부상한 디지털 기술을 접목해 레이더 정보를 전술화면에 자동으로 표시하는 기기의 개념을 설계했고, 이를 Coordinated Display Equipment, CDE라고 불렀다.


1951년, 맥날리는 CDE의 함상 시험을 함선국에 제의했다. 함선국은 거대한 체계 장착의 안정성에 우려를 표하며, 표적과 요격기 단 2기만 통제하도록 축소하여 대공요격관제를 담당하는 반자동 대공요격통제체계를 CDE 기반으로 제의했다. 그러나 생산계약을 맺은 텔레레지스터사는 상용 디지털 기술로 이 단순화된 장비마저 만드는데에 실패했다. 당시 걸음마 단계인 디지털 기술의 한계에 대한 좋은 교훈이었다.


한편, 앞선 도상연습으로 미해군만큼이나 다급히 자동화체계 구축을 시도하던 영국 왕립해군은 아날로그 방식을 밀었고, 엘리엇 브라더즈사와 계약해 Comprehensive Display System, CDS를 개발했다. 어찌보면 미해군 CDE의 아날로그 버전이었던 CDS는 96개의 추적 경로를 실시간 레이더 화면 위에 투영할 수 있었다. 영국 해군은 1957년 항공모함 HMS 빅토리어스에서 CDS의 해상시험을 시작했고, 기존의 수동 추적에 비해 큰 발전이라 평가한 후 카운티급 유도탄 구축함 4척과 항공모함 HMS 허미즈에 총 5대를 추가 설치했다.


미해군은 영국 CDS에 큰 관심을 보였고, 기기 하나를 구매하여 해군연구소 체사피크만 지부에서 분석하도록 했다. 지부 수석연구원 알버트 그로스베너는 CDS는 제대로 작동하는 쓸만한 체계라고 평가하면서도, 기계부품의 복잡성이 너무 많으며, 미해군이 제시한 ROC인 200개 경로 추적을 달성하려면 부피가 너무 커질 것이란 단서를 달았다. 함선국은 1953년 해군연구소에 CDS를 완전히 전자화한 EDS, Electronic Data System의 개발을 의뢰했다.

육상에 설치된 EDS의 시제모델.


CDS의 작동원리를 거의 유용해 개발한 EDS는 육상 시험에서 우수한 성과를 보였고, 1955년 모토롤라사가 20대 생산을 계약, 구축함 윌리스 A. 리를 시작으로 262구축분대의 구축함 4척, 그리고 유도탄 순양함들에 설치되었다. 262분대의 경우 1959년에 각 함이 400마일 떨어진 채로 자동적으로 표적정보 교환을 실시하는 시험에 성공했다.


EDS는 분명 한발짝 앞으로 나아간 진보였지만, NTDS의 본격적인 도입 전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1950년 초 미해군은 아직 아날로그 컴퓨터가 메인스트림이었고, 디지털화 시험은 CDE에서 한차례 실패한 적 있었다. 개선된 디지털 컴퓨터를 간절히 원하던 레이더 개발부서가 모르던 것은, 함선국 본청 건물 안, 같은 층 같은 복도에 세들어 살던 팀들 중에 바로 그들이 원하던 고성능 디지털 컴퓨터 개발부서가 존재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팀은 같은 해군 동료들을 포함해 아무에게도 자신들의 프로젝트 내용을 발설하지 말라는 최고 기밀 제약이 걸려 있었다 - 신형 디지털 컴퓨터의 목적은, 다름아닌 차세대 암호해독기였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