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0년대 김홍일이 러시아에서 매진했던 것 중에 하나가 한인군단 건설임

1920년 구이저우에서 돌아온 김홍일은 한인연합독립군단을 조직하라는 노백린의 명을 받고 상해를 출발, 간도 백두산자락에서 만난 군비단을 이끌고 러시아령 시베리아로 들어갔음.

거기서 군비단은 현지 한인마을에서 인원을 보충받고 기타 한인부대와 합병을 거쳐 고려혁명의용군, 그리고 다시 대한의용군으로 개편되었음

3개 중대가 모인 1개 대대 사이즈에 50명 규모 사관학교도 설치했고, 김홍일은 여기서 3중대장겸 사관학교 교관 노릇을 함


이후 극동공화국 제6연대와 연합, (예속된 게 아님) 무기를 지급받고 일본군과 백군의 대공세에 맞서서 전면에서 지연작전을 수행함.

1중대장 임표는 고령이었고, 한운용의 2중대는 퇴각전에서 사실상 괴멸해 김홍일은 1, 3중대를 지휘하며 퇴각전을 지휘함.

하바로프스크 탈환전, 그리고 볼로차예프카 전투 및 스파스크로의 대공세 등 대한의용군은 적군의 선봉에서 일본 및 백군을 쳐부수는 데 큰 공을 세움.

고려인들은 이 전쟁을 "원동해방전쟁"이라 부름.

이후 대한의용군은 한인특립보병대대(이름은 대대지만 연대급)로 개편, 3개 보병중대와 1개 기관총중대, 1개 특무중대로 구성된 규모를 유지했음.

하지만 크게 두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당시 시베리아 한인무장부대에는 크게 두 계파가 있었음. 하나는 민족주의 계열 상해파고 나머지 하나는 공산주의 계열의 이르쿠츠크파임.

이들은 코민테른이 내린 일국일당 원칙을 계기로 사사건건 의견이 존나 갈렸고 이 갈등은 이전 시기의 자유시 참변에도 영향을 미쳤었음.

그런데 이때 한인특립보병대에 새로 부임한 정치장교 박모이세이가 이르쿠츠크파라는 의심을 받아서 상해파가 대거 이탈, 만주로 돌아갔음.

김홍일은 이 계파갈등에서 자유로운 입장이어서 남아 사령관직(연대장급)을 수행하며 한인특립보병대를 대규모 항일군단으로 조직하려 했음

하지만 소련 측에서 한인특립보병대의 사상을 문제삼으면서 거리를 두기 시작하면서 김홍일의 이 계획은 차질이 빚어졌고

거기다 니콜라옙스크 사건에서 일본인들을 학살한 주범인 박일리야의 섣부른 행동으로 건수를 잡은 소련 측이 무장을 해제시켜 버리자

김홍일은 말 그대로 개빡쳐서는 부대를 해체시킨 뒤 상부에 사직서를 내고 박일리야를 존나게 갈궈댄 후 만주로 돌아가 적기단에서 활동하다 국부군으로 갔음

이렇게 김홍일의 한인군단 계획은 나가리남.



저번에도 썼지만 김홍일은 이랬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1946년 김석범 중장이 한인부대를 이끌고 중국 내전에 참전하려 했을 때 말렸던 걸지도 모름.


출처
대륙의 분노
1920년대 전반기 김홍일의 항일무장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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