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영국 해군은 인버고든 항명(Invergordon Munity)이라는 일종의 반란 사건을 경험함.

대공황에 직면한 영국은 공공 지출의 축소를 위해서 임금 삭감을 단행하기로 함. 장교단은 임금 10퍼센트 까였고 수병들은 최대 25퍼센트 까이게 됨.

수병들은 대부분 working class 출신에 노동당 지지세가 높았던 까닭에 이런 변화에 당연히 꼭지가 돌았고 이에 대한 비토 정서가 고조됐음.

1931년 9월 11일 해상 훈련을 마친 후드, 워스파이트 등이 입항하고 입항한 함들의 수병들 사이에 임금 삭감 소식이 퍼지면서 파업을 결의하는 목소리가 점점 높아짐. 각 함의 함장들이나 함대 사령관의 귀에도 이들의 불온한 움직임이 하나 둘 보고되기 시작했음.

9월 15일이 되자 리펄스를 제외한 함들의 수병들은 출항 명령을 거부하고 태업하기 시작했음. 이들은 항명을 제지하는 군사경찰들을 조롱하고 심지어는 항명을 제어해야 할 해병대와 일부 위관급 장교들도 항명에 가담하기도 했음.

영국 해군 입장에선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이었던 점은 제정 러시아나 독일 제2제국이 경험한 수병 반란과 달리 체제 전복을 지향하지 않고 단지 임금 삭감 문제를 조정할 것을 요구하고 있단 점이었음.

그렇기에 이 항명 사건은 일련의 협상 과정을 거쳐 다소 원만하게 수습할 수 있었고(25프로 삭감 -> 10프로 삭감) 이후 대부분 원대에 복귀해 예정된 해상 기동훈련을 위해 출항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 사건은 영국 시티 오브 런던에 큰 파문을 일으켰고 그 여파로 금본위제로서 스털링 파운드의 위상이 흔들리는 데 일조하게 됨.

1차대전 - 대공황의 여파로 국고가 앵꼬난 영국은 2차대전을 코앞에 두고 FDR의 햇살론을 받기 전까지 매혈해가며 자기 앞마당 겨우 지킬 수 있는 수준까지 바닥을 치게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