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4일
B5 문서고

"자, 그럼 이번 회의는 이걸로 끝내겠습니다. 다들 내가 한 말 명심하고, 다음번 회의때까지 계획안 준비해오세요."

이 말을 마지막으로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통령이 활짝 열고 나간 회의실 문이 천천히 닫히자 국가정보원장은 비로소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에서는 장관들과 군 장군들, 청와대 직원들이 서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그는 긴장이 풀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자신이 회의 동안 무슨 말을 했고 무슨 내용을 논의했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대통령과의 회의가 너무 부담스러웠다. 사실 회의뿐만이 아니라 대통령과 대면해야 하는 모든 행위가 다 싫었다. 그는 한동안 그대로 눈을 감고 의자에 앉아있었다.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회의실은 텅 비어 있었다. 회의실을 관리하는 직원 몇몇이 텅 빈 회의실을 정리하면서 아직 자리에 앉아있는 그에게 언제 나가냐는듯한 눈총을 주고 있었다. 그는 멋쩍게 수고하라는 인사를 건네고는 서둘러 회의자료를 챙겨 방을 나갔다. 회의실 앞 복도에서는 군인들이 모래주머니를 쌓아 만든 진지에서 경계를 서고 있었다. 모래주머니 위에 거치해 둔 기관총을 본 국가정보원장은 다시 마음이 착잡해졌다. 저들은 과연 이곳을 누구로부터 지키려고 여기 있는 것인가? 지금도 국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북한군인가, 아니면 여기 바깥에서 들끓고 있을 분노한 시위대인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옛날부터 알고 있던 그 대통령님과 방금 회의실을 나간 대통령이 같은 사람인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가 알고 있던 대통령님은 절대 그런 식으로 북한에 선제공격을 명령할 분이 아니었다. 그가 알고 있던 대통령님은 절대 참모들의 간곡한 조언을 무시하고 무리한 작전을 강요할 분이 아니었다. 그가 알던 대통령님은 분노한 시위대에게 발포를 지시할 분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알던 대통령님은 오늘과 같은 명령을 내릴 분이 아니었다.

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된걸까? 지금까지 수백 번은 반복해 왔던 생각이지만, 그는 다시 한번 지금까지의 일을 되새겼다. 모든 것은 다 그 날 시작했다. 남북 통합 열병식이 있던 그날.

10월 1일 아침, 국정원장은 눈을 감고 방금 읽은 보고서의 내용을 되새겼다. 책상 위에는 새로운 정보 보고서가 놓여져 있었다. 이번 통합 열병식 때 김정은을 포함한 북한측 고위인사들이 자리할 단상에는 대역들만 있을 거라는 정보였다. 예상했던 일이니 놀라울 것은 없었다. 저자들은 적국의 군인들 앞에서 진짜 자기 몸을 드러낼 자들이 아니었다. 그는 서서히 눈을 뜨고는 이 정보를 대통령님께 보고하지 않는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열병식 도중에 우리측 인사들과 북한측 인사들은 서로 접촉할 일이 없었다. 대통령님과 북한측 인사들 간의 공식 일정은 열병식이 끝나고 한참 뒤에 있었다. 국정원장이 보기에 이 정보는 대통령님께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정보였다. 이미 보고드려야 할 정보가 산더미같은데 이런 사소한 정보까지 일일이 보고드릴 이유는 없었다.

지금의 그가 아는 사실을 그 때의 그에게 전해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때의 그가 모르던 것은, 열병식 도중 북측 단상이 우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공군의 폭격을 받을 것이란 사실이었다. 만약 대통령이 그런 계획을 세우고 있을 줄 알았다면, 그는 이 정보를 다른 무엇보다도 앞서서 가장 먼저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그 계획을 취소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설득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가 알던 대통령님은 그런 얼토당토않는 계획을 세우실 분이 아니었다. 마치 그날 아침 대통령님이 갑자기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 같았다.

하지만 어쨌든간에 그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그는 아직도 우리 공군기의 폭격 직후 충격과 경악에 빠진 외신기자들 앞에서 20년 전에 만들었나 싶은 조악한 프로파간다 영상이 전광판을 통해 흘러나오던 모습이 똑똑히 기억났다. 우습게도 그 때 그는 영상의 배경음악이 너무 촌스럽다는 생각만 했다. 마치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눈으로는 분명 똑똑히 봤지만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듯했다.

국가정보원장은 갑자기 거센 충격을 느끼고 정신을 차렸다. 그는 미로같은 복도 한가운데에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를 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멀어지고 있었다. 국가정보원장은 어깨를 추스르고는 다시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그는 이런 취급에 이미 익숙해졌다. 대통령이 시위대에게 백린탄을 쏠 것을 지시했다는 소문이 퍼진 뒤로는 이곳 직원들조차 대놓고 대통령과 정부 관료들을 멸시하고 있었다. 아직 그들이 정부 고위직을 유지하고 목숨이 붙어있는건 순수하게 저 군인들이 가진 기관총 덕분이었다.

초기에는 그래도 분위기가 비교적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북한 고위 관계자 및 군 장성들의 제거에는 실패했지만, 그래도 국군은 기습의 이점을 살려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비록 대통령의 충격적이고 끔찍한 개전 방식을 규탄해 전세계에서 한국을 비난하고 모든 지원을 끊었지만, 약간의 운만 따라준다면 본격적인 국제사회의 제재가 닥치기 전에 평양을 점령하고 통일을 기정사실로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대통령이 모든 것을 망쳤다.

국가정보원과 정보사령부 둘 다 하나같이 압록강 건너편에서 중국군의 특이한 움직임이 없다고 보고했지만, 대통령은 고집스럽게 신의주에 상륙작전을 할 것을 지시했다. 국정원장이 아무리 중국이 현상황에서 개입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해도, 합참의장이 아무리 신의주 상륙은 자살작전이나 다름없다고 간곡히 말씀드려도 대통령은 중국이 한반도 동해안을 차지하게 둘 수 없다는 소리만 앵무새처럼 반복할 뿐이었다. 국정원장은 심지어 대통령의 면상을 한 대 패고 싶다는 충동까지 느꼈다. 실제로 주먹이 나가지 않은 이유는 그가 자신의 폭력적 충동을 잘 다스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대통령이 자신에 반대하던 합참의장을 그 자리에서 바로 해임하는 것을 보고 충격에 빠져 폭력적인 충동 같은건 새하얗게 잊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신의주 상륙작전은 실시됬고, 국군 역사상 가장 참혹한 패배로 끝났다. 신의주 상륙작전을 준비하기 위해 평양을 향한 진격은 중단됬고, 그 틈을 타 북한은 평양 외곽에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다. 신의주에 상륙한 병력이 북중 국경과 북한군 사이에서 꼼짝없이 포위당하던 그 때, 유엔 안보리에서는 한국에 대한 굉범위한 제재가 포함된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국군은 뒤늦게 평양을 향한 공세를 재개했지만 북한의 방어를 뚫지 못하고 수많은 병력이 소모되었다.

신의주 상륙작전의 실패와 그에 이은 인명손실의 급증, 국제사회의 경제제재 여파가 한꺼번에 닥치면서 국민들의 분노는 한없이 들끓어올랐고, 그 분노의 끝은 대통령을 향했다. 시민들은 연일 광화문 광장 앞에서 시위를 벌였고, 경찰은 시위대를 진정시키는데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시위가 점차 격화되면서 폭력사태가 발생한 그 때, 대통령이 모든 명령계통을 무시하고 경찰 현장책임자에게 독단적으로 발포 명령을 내렸다. 수많은 시민들이 희생됬고, 군에서는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전선에서 병력을 빼서 서울로 불러들여야 했다.

바로 그 때 북한이 반격을 시작했다. 평양 남쪽의 방어선에 틀어박혀있던 북한군이 진지에서 나와 남쪽으로 쇄도하는것과 동시에 북한은 한국의 대도시와 군 시설을 표적으로 대규모로 핵공격을 가했다. 청와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광화문 광장에서 정부의 무력 진압에 맞서 농성하던 시위대는 그대로 핵의 불길에 흽쓸렸다. 서울에서만 수십만 국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진작에 시위대를 피해 이곳으로 피신해 있었다.

그 뒤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정부는 그야말로 간신히 정부라고 불러줄 수 있는 최소한의 기능만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여러 도시에서 시위대가 경찰서와 시청으로 쇄도한 이후 소식이 끊겼다는데, 어디어디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북한의 진격을 결국 저지했다는 보고를 신임 합참의장이 발표하던건 기억나지만, 어디쯤에서 막았다고 했는지는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단편적인 기억들을 아무리 조합해봐도 그게 정말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마치 현실이 아니라 형편없는 시나리오의 소설 내용인 듯 했다. 자신이 정말 그 시간을 살아온게 맞긴 한지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시간도 곧 끝날 것이다. 국가정보원장은 자신의 임시 집무실에 들어가 조심스럽게 문을 잠궜다. 지금까지 대통령의 미친 듯한 행동을 지켜보기만 했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을것이다. 그는 의자에 앉고는 책상 서랍을 서서히 열었다. 그가 알던 대통령님은 이제 없으며, 지금 그 자리에 있는건 어느 날 갑자기 바뀐 미치광이일 뿐이다. 그는 서랍 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열었다.

다음번 회의. 그 때가 되면 대통령은 자신이 지시한 그 미친 계획안에 대한 보고를 결코 듣지 못할 것이다.

국가정보원장은 상자 안에서 발터 PPK 권총을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