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에서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나라 중 하나인 에리트레아는 전쟁 속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들은 더 큰 이웃인 에티오피아에서 떨어져 나오기 위해 30년간 싸웠고 1993년 그 목표를 이뤘습니다. 1998년 에리트레아는 사소한 국경 분쟁을 빌미로 해 에티오피아가 침공한 이후 또다른 전쟁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고 그 대가는 약 7만명의 목숨이었습니다. 10년 전에는 에리트레아는 작은 나라 지부티를 침공하였는데, 이는 국경이 몇몇 사막의 언덕의 위를 지나는지 옆에 지나는지에 대한 분쟁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폭력적인 역사를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 모든 곳에 있습니다. 고지대에 위치한 수도인 아스마라(Asmara)에는 독립 전쟁을 기리는 포스터와 기념벽이 있습니다. 도시의 가장자리에는 탱크들의 무덤이 위치해 있습니다. 홍해를 접한 항구 마사와(Massawa)에는 폭격을 받은 이탈리아 시기의 은행이 서 있습니다.

에리트레아는 에티오피아와 2000년 평화 협정을 체결했지만 에티오피아는 그것의 실행이 올해 7월 8일 분쟁거리가 되고 있던 거의 쓸모 없는 땅 조각 (역주: Badme)을 돌려주면서 실행하였습니다. 그 동안 에리트레아는 감옥국가로 남아있었습니다. “전쟁과 함께 모든 것이 멈추어 버렸습니다,” 마사와에서 자라 에티오피아로 이민한 중년의 남자 사무엘이 말했습니다. 1998년 전쟁이 터졌을 때 그는 7만 명의 동포들과 함께 고국 에리트레아로 보내졌습니다. 에리트레아에 거주하던 에티오피아 사람들도 반대편으로 보내졌습니다. 사무엘은 강제로 군에 입대하였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는 제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징집되어 군에 끌려가거나 비 군사적 노역 시스템에 보내진 수십만 명의 에리트레아인 중 한 명입니다. 이는 1995년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Isaias Afwerki) 대통령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으로 독립한 나라를 재건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시민들은 18개월 동안 일하고 그 후로는 자신들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2002년 정부는 이 기간을 무한으로 만들어버렸고, 이는 유엔에 의해 대량 노예화 (mass enslavement)로 일컬어졌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모두 전선으로 보내질 것임에도 불구하고, 몇몇은 군에서 복무합니다. “우리 모두 총을 다룰 줄 압니다,” 웃으며 28살의 회계사 Yared Ambaw가 수도에 위치한 바에서 말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빌딩이나 길 댐에서 강제 노동을 합니다. 운이 좋은 사람들은 정부 기관으로 보내집니다. 많은 교사, 저널리스트, 회계사들 그리고 심지어 호텔 직원들까지 징집되어 박봉을 받고 일합니다, 오직 아이가 딸린 결혼한 여성, 매우 아프거나 인맥이 좋은 사람들 만이 빠른 전역을 희망할 수 있습니다. 여성 징집인들은 관료들에게 주기적으로 강간당하거나 그들의 하인으로 일하도록 강요받습니다. 북한처럼 이들 또한 자국 국민들을 가둡니다. 징병 대상자들은 여권이나 출국 비자를 얻을 수 없습니다. 국경 경비원들은 월경자를 발견할 시 그들을 사살하도록 명령 받았으며 권력자들은 난민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로부터 돈과 성을 착취합니다.

 해외 기업과 정부의 조인트 벤처로 인해 만들어진 두 개의 거대한 광산을 제외하고는 이 나라에 대한 해외 투자는 전무합니다. 정부는 이것이 무기 금수조치로 인해 투자자들이 겁먹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그들의 정책 탓입니다. 그곳에는 사적인 영역이 거의 없으며 공사는 에리트레아의 집권당(역주: 민주정의인민전선)이 운영하는 회사에 의해서만 진행되며 이는 징집된 사람들에 의해 운영됩니다. 수도 아스마라는 난잡하게 흩어진 문을 닫은 가게들과 텅 빈 공장들로 들어차 있는데 이는 몇 십년 전 에리트레아가 아프리카에서 가장 산업화된 곳이었을 때의 흔적입니다. 그곳에는 ATM도 무선 인터넷도 없습니다. 장례식은 공지판을 통해 알려지며 유족들은 공중전화 부스를 드나들며 전화할 필요가 없습니다(휴대전화는 특히 아스마라 밖에서는 매우 드뭅니다.) 주식이 되는 곡물인 Teff는 에티오피아의 4배 가격에 달합니다.

 수입은 부족한 달러를 통제하기 위해 규제되어 있습니다. 아스마라에 있는 가게들의 선반은 매우 간소합니다. 오래된 텔레비전과 같은 전자제품은 수백 달러를 호가하는데 그 이유는 판매자가 만을 건너 돌아가기 위한 비행기 값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본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해안을 가진 마사와는 관광객으로 가득 차 있을 것 같지만 호텔과 아파트 단지들은 건설 자재의 부족으로 인해 건설이 끝나지 않아 텅 비어 있습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와의 평화는 희망을 가져왔습니다. 정부는 국가적 서비스를 시행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것 같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새로운 징집병들은 18개월 동안만 복무할 것이라고 합니다. 프로그램을 끝마친 몇몇은 올해 집으로 보내졌습니다.

한편으로 정부는 양심수를 포함한 100명 정도의 죄수를 풀어줬습니다(또다시 아무런 공식 발표 없이 말입니다.) 에리트레아는 단 네 개의 종파만을 허용하고 있습니다: 정교회, 루터파, 가톨릭, 수니파 이슬람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오순절주의 개신교 설교자가 아스마라의 바쁜 거리에서 자신의 신앙에 대해 외치는 것이 목격되었습니다. 에티오피아 음악 또한 금지되어 있었지만 이 또한 또다시 공공장소에서 연주되고 있습니다.

 고위 공직자들은 외국 외교관들에게 지금 큰 변화가 필요함을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개방은 (공직자들은 “개혁”이라고 부르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매우 힘들 것입니다. 정부는 이제 일부는 60대에 접어든 그들의 징집인들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들을 풀어주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들이 얼마나 있는지 그리고 이들에게 출국 비자를 줄지 보장할 수 없습니다. ”원칙[개혁]은 점진적이어야 합니다.” 집권당의 공직자 Mehreteab Medhanie가 말했습니다.

에리트레아 독립 이후 유일한 대통령인 이사이아스 대통령은 자신의 권력 장악력을 약화시키지 않고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박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7월 30일 전직 게릴라 대장(역주: 아마 이사이아스 대통령)은 소말리아와의 관계를 복원했습니다. 이는 그가 1997년 쓰여졌다가 전쟁의 발발로 인해 연기된 헌법의 적용과 같은 그가 계획하는 정치적 개혁에 대한 작은 신호로 보입니다. 에리트레아는 2002년부터 단 한번도 국회의원 선거와 대선을 치른 적이 없습니다. 이사이아스 대통령 혼자만이 나라를 다스리고 그 주의에는 늙어가는 독립 투쟁의 베테랑들의 파벌만이 자리합니다. 아스마라의 나무가 줄지어 선 거리의 카페에서 40살 먹은 징집인이 자신의 휴대전화 안 대통령의 사진을 가리키며 말합니다. “이 사람 보이죠?” 그가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독재자입니다.”

에리트레아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몇 십년 간의 분쟁에서 가족을 잃었습니다. “모든 곳에서 전쟁의 무게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정보부 장관인 Yemane Gebremeskel이 말했습니다.몇 십년간 정부는 분쟁과 에티오피아에 의한 위협을 자신들의 억압적 정책을 합리화하는데 이용해 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전쟁은 끝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