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4년 7월 아직 소련군이 핀란드 공화국으로 본격적으로 진입하기 전 핀란드 출신 폴야르니키 파르티잔들과 볼셰비키 파르티잔들은 지속적으로 핀란드 내부를 공격하며 소요사태를 일으켰다.
(1943년 혹은 1944년 폴야르니키 파르티잔들.)
핀란드 라피 세이타얘르비 호수 근처에 있는 마을 세이타얘르비는 주요 전선에서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다. 마을을 지키는 것은 늙고 지친 6명의 노병 뿐이었다.
1944년 7월 4일 마을의 어린아이들이 인근 언덕에서 가축들에게 풀을 먹일 때 러시아어를 들었다고 말했지만, 마을 어른들은 장난으로 여기고 무시했다.
1944년 7월 5일 마을의 어린아이들이 숲에서 처음보는 발자국을 발견했다고 마을 어른들에게 말했지만, 역시나 장난으로 여기고 무시했다.
이런 징후를 무시한 대가는 생각보다 컸다.
1944년 7월 7일 새벽 2시에서 3시사이 유난히 개 짖는 소리가 크자, 2명의 노병이 순찰을 나갔고, 그들은 파르티잔들에게 살해당했다.
이들을 죽이기전에 심문한 파르티잔은 마을의 경비가 별로 없음을 깨닫고 3시경 습격을 개시한다.
약 189명의 파르티잔 습격에 4명 밖에 없는 노병들은 최선을 다해 저항했지만, 시모 파리카라는 병사는 사망했고, 알토비르타, 아라얘르비, 아우노 풀스카 세명의 노병이 부상을 입고 포로로 잡혔다.
총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자 마을 사람들은 대부분 숨었고, 극 소수만이 도망쳤다.
유창한 핀란드어를 구사하는 폴야르니키 파르티잔들은 마을 사람들을 안심시키며 말했다. 일부러 여성 파르티잔을 앞세워 말하며 신뢰를 주려했다.
"모두 모이세요! 항복하면 누구도 다치지 않습니다!"
올릴라 가족은 때마침 집이 아닌, 마구간 근처에서 자고있었기에 파르티잔이 습격하자 빠르게 도망칠 수 있었고, 근처 다른 마을인 배리외로 달려가 파르티잔의 습격을 알릴 수 있게되었다.
파르티잔들은 마을 사람들을 집결 시킨 후 동쪽을 향해 이동했다. 너무 부상이 심했던 노병 1명과 가기를 거부했던 주부 1명을 본보기로 처형한 후 행진을 시작했다.
(검색해보면 시신 사진이 있지만, 이곳에는 올리지 않겠다.)
파본마 지역으로 이동한 후 이곳에서 소녀와 여성들을 처형했다. 약 10명 정도였다. 여자들은 이때 강간 후 살해당했다고 추정되지만, 후에 부검을 맏았던 스웨덴 의사가 시신의 부패가 너무 심해서 알 수 없다고 말했기에 강간 혐의는 알 수 없다.
올릴라 가족이 배리외로가서 파르티잔의 습격을 알리자 사운 분견대가 트럭을 타고 급하게 현장으로 출동했다.
(중위 올라비 엘리스 알라쿨피 후에 미국으로 이민가서 미국 육군 중령으로 전역한다. 1950년 한국전쟁에도 참전하였다.)
그들을 이끄는 지휘관은 올라비 엘리스 알라쿨피 중위였다. 그는 핀란드 공화국 크로스컨트리 국가대표 출신으로 1939년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금메달을 딸 정도로 유능한 스포츠인이자 만네르하임 십자훈장을 수여받은 유능한 군인이었다.
마을 근처에서 내린 사운 분견대는 마을을 향해 미친듯이 뛰어갔다. 마을이 비어진 걸 확인한 후 소련군의 발자국을 따라 추격을 시작했다. 당시 참가했던 19살의 무전병 파보 사비아로는 모두들 힘들어지하지 않고 오직 복수심에 불타 추격을했다고 회상했다.
파본마 지역에 도착하자 살해당해 방치된 시신 10구를 발견한다. 살해당한 시신 중 8살짜리 여자아이 미르바 아라얘르비가 살아있음을 확인하자 마을 사람들과 친분이있던 마티 오이노넨 중위가 그녀를 깨우며 말했다. "미르바! 나야! 오이노넨 아저씨! 나 기억하지!"
(야전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는 미르바와 그녀를 돌보는 군인들.)
그들은 미르바를 병원으로 보냈다. 총검으로 2회 찔린 후 기절했지만, 다행히도 파르티잔들이 죽은 줄 알고 두고간 것이었다.
가장 어린 희생자는 생후 약 7개월의 소녀 리트바였다.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를 살리려고 어떻게든 감쌌지만, 둘 다 사망한 것이었다.
사운 분견대는 미친듯이 소련군을 추격하기 시작했고, 그들이 국경을 건너 소련으로 들어가기 전에 격파하려했다.
(강을 도하하는 파르티잔 사진. 연도미상.)
야밤에도 행군을 계속하여 약 30Km의 산악행군 끝에 파르티잔들을 포착했다. 치열한 전투로 파르티잔 약 34명을 사살했지만, 대부분의 파르티잔들은 케미요키 강을 건너 소련으로 퇴각했다.
공식적으로 민간인 약 14명과 군인 약 2명이 사망했으며, 일부는 소련으로 끌려가고, 일부는 살해당해 암매장당했다고 추정한다.
이 사건은 후에 유엔이 생기고나서 유엔 전쟁범죄 위원회에 소련의 전쟁범죄로 고발하려고 했으나 냉전상황으로 인하여 소련의 눈치를 봐야하는 핀란드 정부의 미적지근한 대처, 소련의 방해로 인하여 실패한다.
(세이타얘르비 위령비.)
1979년 7월 15일 세이타얘르비 인근에 핀란드의 조각가이자 대학교수 엔시오 세패넨이 위령비를 만들었다.
(2024년 7월 세이타얘르비 위령비에서 열린 80주기 위령행사, 핀란드군 약 200명이 참가하였다.)
이걸 왜끌고간거지
저렇게 끌고가서 시베리아 노역하는경우가 있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