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이 엔도 사부로와 만난 1956년 9월 4일, 판한넨은 이미 감옥에 있었다. 판한넨이 입막음 목적으로 체포, 투옥된 것은 1955년 4월이다. 그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마오쩌둥은 과거지사를 언급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엔도 사부로와 동행한 전직 군인 방중단의 한 사람인 전 육군 중장 호라케 카즈마는 마오쩌둥을 비롯한 정부요인들이 어쨌든 '과거는 잊고 장래에 대해 말하지 않겠는가'라는 것만 강조하고 있었던 것이 인상 깊었다고 수기에 서술하고 있다. 


 이는 마오쩌둥이 타계할 때까지 '난징대학살'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 심리가 작동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마오쩌둥은 어쨌든 장제스가 이끈 국민당군이 제1선에서 싸운 사실 같은 '과거 이야기'를 언급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고, 방중하는 인사가 계속해서 '과거를 사죄한다'고 하는 것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마오쩌둥이 듣고 싶었던 것은 '사죄' 따위가 아니었다. 1961년 1월 24일, 사회당 의원 구로다 히사오와의 대담에서도 마오쩌둥은 다음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난고 사부로씨와 만났을 때 만나자마자 갑자기 "일본은 중국을 침략했습니다. 사죄하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당신네들은 그런 견해를 가지면 안 됩니다. 일본의 군벌이 중국의 대부분을 점령한 것이야말로 중국 인민을 교육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중국 인민은 각오를 품고 단결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됐다면 나는 지금도 산 위(옌안의 동굴)에 있어서, 베이징에서 경극을 관람한다든지 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겁니다. 만약 '감사'라는 단어를 사용한다면 나는 차라리 일본의 군벌에 감사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1964년 7월 10일, 일본 사회당의 사사키 코조와 구로다 히사오 등 사회당계의 방중 대표단과 만났을 때의 대화가『마오쩌둥사상 만세(하)』에 실려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마오쩌둥 자신은 주로 '진공' 혹은 '점령'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일본어 번역에서는 '침략'으로 통일해서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일본 측이 사용한 '침략' 이란 개념에 속죄의식이 있어, 마오쩌둥은 '침侵'이란 글자를 극구 피하고 있다. 사사키 등도 지속적으로 사죄를 말하는 바람에 마오쩌둥은 마침내 중화소비에트구로부터 옌안가지 도주하는 장정 시절의 일을 언급한다. 



 우리에게 남은 병력이 얼마나 됐겠습니까? 30만에서 2만 5000으로 줄어 버렸습니다. 우리가왜 일본 황군에 감사하지 않으면 안되는지 명확하지 않습니까? 황군의 진공으로 우리가 황군과 싸울 수 있었고, 그 덕분에 운 좋게도 다시 장제스와 합작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2만 5000의 군대는 8년간 싸우면서 120만 대군이 되어 인구 1억 명의 근거지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데도 (황군에) 감사하지 않아도 좋다고 생각합니까?


이 정도로까지 실토해 버린 것이다. 더 이상 말하지 말라. '더 듣기 민망하니 말하지 말라'는 마오쩌둥의 심정이 눈에 떠오르는 긋하다. 마오쩌둥은 어느 의미에서는 정직한 사람이었지 싶다.


 장제스와의 2차합작을 일중전쟁이 본격화한 결과라고, 필자가 구애되어 왔던 시간축의 역전을 무엇 때문이라 할 것도 없이 인정했을 뿐 아니라, 일중전쟁이 있었기 때문이야말로 중공군이 강대하게 됐다는 것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시 마오쩌둥은 '사죄'만 입에 달고 있는 친중적 일본인 따위에 진절머리가 나고 있었을 것이다. 


출처: 모택동 인민의 배신자, 엔도 호마레 저, 박상후 옮김, 타임라인, 2019년, 221~22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