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의 1차 침입 당시 무신정권의 수괴 최우[22]가 고려 국왕 고종에게 압력을 가해 '귀주성 '과 '자주성'이 항복하도록 한 사건은 당시 무신정권이 군사적으로 몽골과 맞서려는 의지가 없었음을 증명하는 사례다.
몽골의 1차 침입 당시 박서, 김경손 장군이 지휘하는 귀주성 군민들과 최춘명(崔椿命)이 이끄는 자주성 군민들은 무자비한 몽골군의 파상공세로부터 성을 장기간 사수해냄으로서 몽골군의 남하를 겨우 저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최우는 구원 병력을 보내 이들을 돕기는 커.녕 벌써부터 몽골과 물밑 협상을 진행하며 간을 재고 있었다.
최우는 서경의 반란을 진압한 다음 서경 주민 전원을 강제로 섬으로 이주시켜 고려 제 2의 도시 서경이 사람 한명 없는 폐허로 전락하고 만다. 특히 서경은 고려 제 2의 도시이자 방어선 역할도 수행하는 도시였는데 최우는 단지 자신의 권력에 해가 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하루 아침에 황무지로 만든 것이다. 이때문에 북계와 서해도의 핵심 방어선 역할을 수행하던 서경이 최우에게 당해 하루아침에 몰락했고 향후 북계와 서해도 지역은 몽골군이 쳐들어올때마다 속소무책으로 털리게 된다.
여몽전쟁 30년 동안 최씨 정권은 강화도에 들어가 몽골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수호하기 위한 일말의 군사적 노력도 기울이지 않았다. 오늘날 한국의 군사분계선에 해당하는 북계 방어선을 스스로 포기하여 국토와 국민을 무방비 상태로 외침에 노출시켰으며 중간 중간에 몽골 침공이 없는 휴식기가 이어졌음에도 육지로 나와 방어선을 구축하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았다. 심지어 적군이 쳐들어왔을 때 방어군조차 제대로 파견하지 않았다. 여몽전쟁 30년 동안 확인되는 총 56회의 전투[37] 중 야별초(夜別抄)[38]가 몽골군을 상대로 기록한 교전 횟수는 고작 5차례로서 3차 침입때와 9차 침입때 각각 3차례와 2차례의 교전 횟수를 기록하여 거의 활약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비단 야별초의 교전 횟수 뿐만 아니라 몽골군을 상대로 교전한 야별초의 병력 규모다. 무신정권은 두 차례의 교전에서 고작 160~200명의 야별초 대원만을 내보냈을 뿐이다. 나머지 세 차례의 교전도 야별초가 현지 주민들을 규합하여 척후병 또는 본대와 뒤처진 소규모 몽골군을 방어하는 형태의 일회성 작전으로 전개되어 그 규모가 미미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교전들은 모두 정부의 명령을 하달받은 지휘관이 군대를 이끌고 나가 후방 지원을 받으며 몽골군 주력을 섬멸하는 조직적 군사 작전이 아니라 지휘관 개인 또는 부대원들의 자발적 의지와 판단에 의한 일회성 군사 시위였다.
"장군 송길유(宋吉儒)를 보내어 청주(淸州)의 백성을 섬으로 옮기게 하였다. 길유는 백성들이 재물을 아껴 옮기기를 싫어할까 염려하여 공사(公私)의 재물을 모두 불태워 버렸다. 이 일보다 먼저 최항이 사신을 여러 도에 보내어 주민들을 모두 몰아서 섬 안으로 들어가는데, 명령을 좇지 않는 자는 집과 전곡을 불태워서 굶어 죽은 자가 열에 여덟ㆍ아홉은 되었다."
ㄹㅇ WWE를 하신 거잖아ㅋㅋ
무신정권이 도덕적으로 옳았다는 건 아닌데 최선의 목표가 협상을 통한 몽골군 철수였음. 고려는 몽골과 전쟁을 할 마음이 없이 상국으로 모시려는데 몽골이 사신 살해를 고려의 소행으로 오해해서 괜히 쳐들어왔다는 것이 고려의 일관된 입장임. 이를 위해선 고려의 정규군이 몽골군과 전쟁을 한다는 인상을 주면 안되는 거임. 이미 1차전쟁으로 중앙군인 3군이 와해된 상황이라 야별초가 사실상 정규군이었으니 백성들을 산성이나 섬으로 몰아넣고 야별초를 방호별감으로 임명해서 이들을 이끌게 하는 거임. 그래서 방호별감의 지휘하에 백성들이 전투를 벌이는 동시에 어떻게든 침략군과 협상을 벌여서 시간을 벌고 돌아가게 하고자 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