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중요한 문제는 미국이 유럽과 태평양, 어느 쪽에 우선 순위를 둘 것인가 하느 것이었다. 이것은 추축국의 운명만이 아니라 미국을 제외한 다른 연합국의 운명 또한 좌우할 문제였다. 모두 강력한 적을 상대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고 미국의 지원을 절실히 원했다. 처칠과 장제스는 진주만 기습 직후부터 미국을 상대로 치열한 외교전을 벌였다. 그러나 이 싸움의 승자는 처칠이었고 패배한 장제스는 전쟁의 주역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처음에 불리한 쪽은 처칠이었다. 진주만을 기습한 나라는 독일이 아니라 일본이었다. 루스벨트가 선전포고한 상대 역시 독일이 아니라 일본이었다. 일본이 독일과 동맹을 맺었지만 이 동맹은 어디까지나 '공수(共守) 동맹'일 뿐 선제공격은 해당되지 않았다. 또한, 대다수 미국인들에게 독일과 일본은 별개의 대류에 존재하는 별개의 국가였다. 이든 외무장관은 흥분한 처칠을 향해 이 사실을 지적하면서 "미국과 영국이 동맹국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과의 전쟁에 한해서일 뿐입니다"라고 냉정하게 말했다.
물론 로스벨트는 처음부터 처칠의 편이었다. 그는 12월 9일 의회에서 "우리가 일본을 상대로 싸워서 이긴다 한들 그 나머지 세계가 히틀러와 무솔리니에 의해 지배당하게 된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고 연설하면서 일본과 독일이 한편이라는 사실과 일본보다 독일과의 전쟁이 더 중요함을 강조하였다. 하지만 그는 처칠이 미국을 방문하고 싶다고 요청하자 "진주만을 유럽 전쟁에 개입하기 위한 명분으로 활용하려는 것이 아닌가"라는 여론의 오해를 살 수 있다며 난색을 표명하였다. 루스벨트 자신은 아시아보다 유럽을 더 중시했지만 독일이 미국을 먼저 공격하지 않는 이상 일본에 대한 즉각적인 보복을 주장하는 국민들을 설득할 방법이 없었다.
처칠은 장제스에게 "우리는 언제나 친구였다. 이제 우리는 공동의 적과 마주보고 있다"고 하면서도 루스벨트에게는 유럽이 전쟁의 중심이며 유럽을 가장 우선시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나는 대통령에게 미국의 여론은 전쟁에서 중국의 공헌도를 과대평가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물론 나는 중국인들을 존경하고 사랑했으며 거듭되는 그들의 실정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비현실적인 가치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내가 수용하리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처칠과 루스벨트의 고민을 손쉽게 해결해준 사람은 다름 아닌 히틀러였다. 12월 11일 히틀러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를 강행하였다. 그는 미국이 영국과 소련을 원조하고 있는 이상 어차피 미국의 참전은 시간문제이므로 선전포고 따위는 요식행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히틀러가 내린 최악의 결정 중 하나였다. 덕분에 루스벨트는 유럽 전선에 개입할 명분을 얻었다. 물론 미국의 여론은 일본에 대한 복수가 우선이라는 쪽이었지만 루스벨트, 마셜, 아이젠하워는 연합군의 첫 번째 공격 목표가 독일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였다. 4월 1일 루스벨트는 '레인보우 플랜-5'를 승인하였다. 1939년에 수립된 '레인보우 플랜(Rainbow Plan)'은 유사시를 대비한 미국의 전쟁 수행 계획이었다. 여기에는 다양한 시나리오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플랜-5'는 대서양과 태평양에서 양면 전쟁을 수행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를 가정한 것이었다. 이 경우 미국은 태평양에 대해서는 현상유지에 주력하면서, 영국과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먼저 독일과 이탈리아를 패배시킨 다음, 마지막으로 일본을 공격한다는 내용이었다.
반면, 루거우차오 사건 이래 서구 열강과 손을 잡는 날만 손꼽아 기다려온 장제스는 연합국 진영이 추축국 중에서 가장 허약한 일본부터 타도하여 추축 진영의 한 축을 무너뜨린 다음 독일을 공격할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만약 미국과 소련, 영국이 일본 본토를 공습하고 본토와 대륙의 교통을 차단한 다음 중국군이 총반격을 개시한다면 일본은 일 년도 못 버티고 항복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루스벨트의 결정으로 한순간에 무너졌다. 장제스는 12월 8일 파니우시킨 소련대사에게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를 재차 요청했지만 이 또한 거부당했다. 12월 12일 스탈린은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에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하며 일부 병력을 극동으로 파견할 수 없는 입장이다. 향후 일보놔의 전쟁에 대한 준비를 하겠지만 이를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다시는 이런 요청을 하지 말라고 냉담하게 말했다. 당장 독일과 치열한 전쟁을 하고 있는 영국과 소련으로서는 일본과의 전쟁은 중요하지 않았다. 장제스는 동맹국을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냉혹하고 앞으로도 중국이 혼자 싸워야 한다는 사실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개인적으로 중국에 우호적이었던 루스벨트는 앞으로 세계 질서를 주도할 4대 강국에 중국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처칠과 스탈린은 그의 이런 생각을 비웃으며 중국에 대한 노골적인 멸시감을 드러냈다. 루스벨트가 중국을 돕기 위해 일본이 점령한 버마를 공격하자고 제안하자 처칠은 버마는 촉박한 문제가 아닐 뿐더러 "중국이 강대국이라면 자력으로 그것을 입증해야 할 것"이라며 노골적으로 비꼬았다. 스탈린 역시 독일을 항복시킨 다음 소련이 서쪽에서 일본을 공격하면 극동 문제는 자연히 해결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영국은 북아프리카에서 롬멜이 이끄는 소수의 추축군에게 정신없이 난타당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과연 그들이 중극을 약하다고 비웃을 자격이 있었던가? 루스벨트도 시간이 지나면서 중국에 대한 관심이 점점 멀어졌다. 결국 연합국 지도자들에게 중국은 한낱 약소국이자 주변 세력에 불과하였다. 장제스는 카이로 회담에는 초청받았지만 훨씬 중요한 테헤란 회담과 얄타 회담에서는 철저하게 배제당했다. 두 회의에서 연합국의 세 지도자들은 중국을 빼놓은 채 앞으로의 전쟁 방침과 전쟁이 끝난 뒤의 구상을 자기들끼리 논의하였다.
한편, 이러한 서구 열강의 태도에 동조하는 세력은 중국 내부에도 있었다. 바로 중국 공산당이었다. 팔로군 기관지인 『해방일보』는 1941년 12월 18일자 사설에서 "세계 전황의 중심은 유럽과 대서양에 있기 때문에 독일만 타도하면 일본은 자연히 해결된다"고 주장하였다. 논리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는 독일이 항복할 때까지 중국인이 앞으로 더 많은 피를 흘리는 데 동의한다는 얘기였다. 루거우차오 사건 이전부터 줄기차게 항일을 외쳐온 그들의 이런 주장은 이율배반적이었다. 실상 중국 공산당의 목적은 일본과의 전쟁이 아니라 그 뒤에 필연적으로 시작될 장제스와의 내전에 대비하는 데 있었다. 공산당으로서는 장제스와 맞설 만큼 충분히 힘을 비축할 때까지 전쟁은 지속되어야 했다. 전쟁이 늦게 끝날수록, 그리고 국민정부군과 일본군이 서로 더 많은 피를 흘릴수록 자신들에게 유리했다.
출처: 중일전쟁, 미지북스, 2015년, 권성욱 저, 567~5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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