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득이 기벌포에서 설인귀와 싸워 이기다 ( 676년 11월 )

겨울 11월에 사찬(沙湌) 시득(施得)註 001이 수군[船兵]을 거느리고註 002 설인귀(薛仁貴)註 003와 소부리주(所夫里州)註 004 기벌포(伎伐浦)註 005에서 싸웠는데 연이어 패배하였다. 다시 나아가 크고 작게 22번 싸워 이기고, 4천여 명을 목 베었다.註 006

註) 001
시득(施得): 시득은 문무왕 16년(676) 11월에 사찬으로서 기벌포전투(伎伐浦戰鬪)에서 설인귀(薛仁貴)가 지휘한 당나라 수군을 무찌른 신라의 장수이다. 7세기 중엽 이후 신라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사례를 살펴보면, 지휘자는 왕, 왕족, 진골 및 유력귀족 이외에는 확인이 어렵다. 다시 말해 진골귀족이 아닌 자가 독립부대를 지휘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음을 알 수 있다(이상훈, 2012, 『나당전쟁 연구』, 주류성, 98~99쪽). 그런데 특이하게 670년 3월에 오골성전투(烏骨城戰鬪)에 투입된 설오유(薛烏儒)와 676년 11월에 기벌포전투에 참가한 시득만 사찬으로 신라군을 지휘하고 있다. 두 장수의 능력이 매우 뛰어났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다만 시득의 경우 673년에 병선 100척을 거느렸던 철천(徹川) 휘하에 소속된 장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바로가기
註) 002
겨울 11월에 …… 수군[船兵]을 거느리고: 기벌포전투(伎伐浦戰鬪)에서 사찬 시득(施得)이 수군을 거느리고 설인귀(薛仁貴)와 싸웠다고 한다. 하지만 신라 수군의 규모는 사서 기록상 명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수군을 이끈 시득의 관등이 사찬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시득이 지휘한 병선 수는 100척 이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본서 권제42 열전제2 김유신전중(中)조에 태자 김법민(金法敏)이 유신(庾信), 진주(眞珠), 천존(天存) 등과 함께 대선 100척으로 소정방(蘇定方)과 만났다고 전하고, 본서 권제7 신라본기제7 문무왕 13년 9월조에 대아찬 철천(徹川) 등이 병선 100척을 인솔하였다고 되어있다. 사찬 관등이었던 시득이 단독으로 운용한 병선 수는 아마도 이보다 적을 것으로 짐작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신라 수군이 대동강, 임진강, 금강 하구에 3개의 수군기지를 보유하고, 각각 100척의 병선을 운영하였다고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장학근, 2001, 「신라의 정복지 지배방어전략 -대당전쟁을 중심으로-」, 『군사』 41, 200쪽). 주요 강어귀에 함대 기지를 보유했을 가능성은 높지만, 수전(水戰)이 발생한 장소와 수군 함대의 기지를 동일시하는 문제점도 있다. 관련 사료가 부족해 신라가 서해안에만 3개의 함대에 300척을 운용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바로가기
註) 003
설인귀(薛仁貴): 설인귀에 관해서는 본서 권제7 신라본기제7 문무왕 11년(671)조 참조. 기벌포전투(伎伐浦戰鬪)는 시득(施得)이 이끄는 신라군과 설인귀가 이끄는 당군이 맞붙은 전투이다. 그런데 『구당서』 권제83과 『신당서』 권제111의 열전 설인귀전에는 사뭇 다른 내용을 전하고 있다. 설인귀가 상원(上元) 연간(674~676)에 중국 남부의 상주(象州)에 유배되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설인귀는 670년 8월에 토번(吐蕃)과의 대비천전투(大非川戰鬪)에서 패배 후 제명되었다가, 나당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복귀하였다. 설인귀가 신라 전선에 투입된 시기로는 671년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설인귀가 계림도행군총관(雞林道行軍摠管)에 임명된 점과 설인귀가 임윤법사(琳潤法師)를 통해 문무왕에게 편지를 보낸 점 등으로 확인가능하다. 그런데 국외학계에서는 설인귀가 신라 전선에 참가하였지만, 상원 연간에 유배되었기 때문에 그 이전에만 전투에 참가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해 675년 9월에 발생한 천성전투(泉城戰鬪)와 676년 11월에 발생한 기벌포전투(伎伐浦戰鬪)는 모두 671년에 발생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池內宏, 1930; 黃約瑟, 1995; 劉矩, 2006). 이들은 기벌포전투에 설인귀가 참가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믿을 수 없다는 입장이다. 만약 그들의 주장대로 설인귀가 671년 전투에만 투입되었고 그 이후 어떠한 전투에도 투입되지 않았다고 본다면, 설인귀가 상원(上元) 연간(674~676)에 유배당한다는 것은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 당나라 조정이 671년 패전 직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다가 3년이 지난 시점에서 유배를 시켰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중국 사서에서는 대비천전투 패배 이후 제명되었다고 분명하게 기록하였지만, 기벌포전투 참가와 패배 사실은 두루뭉술하게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정황 설명 없이 상원 연간 유배되었다는 중국 사서의 기록을 그대로 따르면서 본서의 구체적인 기록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나당전쟁 기록에 관해서는 패했다고 전하는 중국 사서보다 승리한 한국측 사서의 기록이 더 정확할 수밖에 없다(Jamieson, 1969). 『구당서』 권제92 열전 위원충(魏元忠)전에는 설인귀가 해동(海東)에 투입되었으나 공(功)이 척촌(尺寸)만큼도 없다고 전한다. 이에 위원충은 의봉(儀鳳) 연간(676~679)에도 설인귀가 처벌되지 않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설인귀가 기벌포전투에서 패배한 후 상주로 유배되는 형에 처해졌지만, 실제 처벌되지 않았던 정황을 짐작할 수 있다(이상훈, 2012, 53~56쪽).
〈참고문헌〉
이상훈, 2012, 『나당전쟁 연구』, 주류성
黃約瑟, 1995, 『薛仁貴』, 西北大學出版社
劉矩·姜維東, 2006, 『唐征高句麗史』, 吉林人民出版社
池內宏, 1930, 「高句麗滅亡後の遺民の叛亂及び唐と新羅との關係」, 『滿鮮地理歷史硏究』 12
Jamieson, 1969, 「나당 동맹의 와해: 한중 기사 취합의 비교」, 『역사학보』 44바로가기
註) 004
소부리주(所夫里州): 소부리주에 대해서는 본서 권제7 신라본기제7 문무왕 11년 7월 26일조 참조.바로가기
註) 005
기벌포(伎伐浦):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장암동에 있던 포구이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제2 태종춘추공조조에는 기벌포는 곧 장암(長嵓岩)이며, 또는 손량(孫梁), 지화포(只火浦), 백강(白江)이라고도 한다고 전하고, 본서 권제28 백제본기제6 의자왕(義慈王) 20년조에는 백강(白江)으로 기록되었다. 『신당서(新唐書)』 권제220 백제전, 『자치통감(資治通鑑)』 권제201 당기(唐紀) 현경(顯慶) 5년조, 『책부원구(冊府元龜)』 권제986 외신부(外臣部) 정토(征討) 현경 5년 8월조에도 이와 관련된 기사가 전한다.바로가기
註) 006
겨울 11월에 …… 4천여 명을 목 베었다: 매소성전투(買肖城戰鬪) 이후 별다른 움직임이 없던 당나라는 문무왕 16년(676) 11월에 백제 고지로 급작스럽게 공격을 진행했다. 이것이 바로 나당전쟁의 마지막 전장이 되었던 기벌포전투(伎伐浦戰鬪)이다. 신라 수군은 당시 최강대국의 선진 함대를 맞이해 22회에 걸친 집요한 공격으로 4,000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기벌포전투 이후 서해상에서 당군의 어떠한 군사활동도 감지되지 않는 점으로 보아 신라 수군이 서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이종학, 194~195쪽). 최초 접전에서 패배한 후 전술을 전환하여 유연하게 대처한 점은 신라 수군의 쾌거로 평가된다(이상훈, 2012, 253쪽). 그런데 675년 9월 매소성전투의 패배로 당군은 이미 철수를 시작한 시점이었다. 676년 11월에 왜 기벌포전투가 벌어졌는지 그 이유가 명확하지 않다. 이에 따라 기벌포전투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 기벌포전투의 성격은 당군의 대규모 상륙전(서인한, 1999, 150~152쪽)이나 잔존세력 구원전(이상훈, 2012, 251쪽) 등으로 상정해볼 수 있다. 한편 기벌포전투가 676년에 발생하지 않고 675년에 발생했다는 견해도 제시되어 있다(윤경진, 2017, 289쪽; 김병희, 2019, 83쪽). 문무왕 16년(676) 11월에 발생한 기벌포전투로 나당전쟁은 종결되었다(이호영, 1997, 248쪽). 나당전쟁의 결정적 전투는 매소성전투라고 할 수 있으며, 여기에서 당나라는 패배 내지는 실패하였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당나라의 대규모 원정군이 수년간 투입되었지만, 당나라는 영토나 인력 혹은 재물을 확보한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나당전쟁은 당시 최강대국 당과 동북의 변방국인 신라 사이에 벌어진 대규모 전면전이었다. 이 전쟁에서 당나라나 신라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승리하거나 패배하였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당시 신라가 당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아내며 당나라의 보급문제를 야기시켰던 것은 분명하다. 당나라는 원정군의 보급문제와 국내외의 여론 악화와 더불어, 토번(吐藩)의 서북변경 위협이라는 직접적인 요인으로 인해 한반도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이상훈, 2012, 320~322쪽). 결국 신라는 수년간에 걸친 장기전을 치루면서 한반도를 지켜내고 삼국통일을 완성하였다. 이러한 나당전쟁의 개전(開戰)과 종전(終戰)은 국제정세의 영향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 신라의 역량과 주도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참고문헌〉
이호영, 1997, 『신라삼국통합과 여·제패망원인연구』, 서경문화사
서인한, 1999, 『나당전쟁사』, 국방군사연구소
이상훈, 2012, 『나당전쟁 연구』, 주류성
이종학, 1984, 「신라삼국통일의 군사사학적 고찰」, 『군사』 8
윤경진, 2017, 「나당전쟁 종전기 전황의 새로운 이해」, 『군사』 104
김병희, 2019, 「기벌포전투와 나당전쟁의 종료」, 『신라사학보』 46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