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5년의 대패 이후 당나라는 고구려에 대해 정면대결을 피하고, 소모전을 통한 국력 고갈, 인접국 공략을 통한 고구려의 고립을 시도하여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육상에서의 고구려의 강력한 군사력을 회피한 평양 직공으로 결정타를 노린다. 하지만 650년대 고구려는 전장을 초원지대로 옮김으로써 소모전의 효과를 경감하였고, 여전히 백제 부흥군과 왜는 고구려 남쪽의 신라군을, 거란과 해, 철륵은 고구려 북쪽의 당나라군의 전력을 반감시켰다. 성과가 없진 않았으나 고구려도 나름대로 와해책을 내놓아 결정타는 타개한 것이다.

당나라가 이 전쟁에서 잃은 장수들은 650년대에 제국의 국방을 책임지던 인사들이었다. 임아상[76]은 서돌궐 평정으로 이름을 쌓아 병부상서의 지위에 오른 군부의 수장이었으며, 방효태,[77] 정명진[78] 역시 당나라의 국방을 맡아서 책임지던 장수들이었다. 당군의 피해를 종합하자면 6개 도행군 중 1개 도행군이 지휘부와 함께 몰살당하고, 2개의 도행군은 지휘부가 전쟁 중 사망하였으며, 도행군은 와해된 것이나 다름없었다.[79]

또한 원정과 연관된 반란까지 진압하고, 이러한 여파로 당 건국 이후 오랫동안 정국을 지배하던 무천진 관롱집단은 정치적 지배권을 상당수 상실했으며, 중소 지주층과 손을 잡은 측천무후와의 정치 투쟁에서 패배하여 실권을 상실하게 된다.[80] 이러한 당 내의 정치 투쟁이 진행되면서 아직 방어할 힘이 넉넉히 남아있는 것으로 확인된 고구려를 재침공할 엄두가 안나게 된 당은 한동안 고구려에 대한 소모전까지도 자제하는 모습을 보이며 백제 방면의 웅진 도독부에도 역시 철수를 명한다.[81]

대승을 거두었지만 고구려로서도 마냥 기뻐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내몽골 초원지대의 지배는 흔들리고 있었으며, 남방에서는 신라의 뒤통수를 막아줄 백제가 멸망했다. 이때는 부흥군과 왜가 신라를 막아줬지만 이듬해에는 백제와 왜가 나당 연합군에 작살나버리니 이후 신라의 공격에도 크게 반응하지 않고, 전쟁 확대를 피하며 당나라의 봉선 의식에 태자를 보내는 등 기존에 상상하기 힘들었던 수위의 친선 의사를 표한다.

신라의 돌파를 막지 못한 점, 제대로 추격하지 못한 점 등은 고구려도 오랜 전쟁으로 지쳤다는 징후로 볼 수 있다. 다만 당나라 역시 전력을 다한 공격이 사수 전투의 참패로 무산되면서 상당히 후환을 겪고 있게 된 상황이었던지라 상술한대로 봉선 의례에 고구려 태자 고복남의 참여를 허용하는 등 과거의 적대적 태도를 다소 누그러뜨리면서 안정을 추구했고, 잘하면 당분간 고구려-당의 평화가 찾아올 수도 있었다.[82][83]

하지만 직후 한 인물의 죽음으로 시작된 내분이 이 고구려의 마지막 기회를 무너뜨리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