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history.com/articles/d-days-deadly-dress-rehearsal


1944년 4월 28일 이른 아침, 연합군 함대가 영국 남부 해안으로 접근했습니다. 영국 코르벳함 한 척과 함께 소함대에는 미국 전차 상륙함(LST) 8척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각각의 함선에는 미 육군 제7군단의 병사들로 가득찼습니다.

단 5주만에, 이들은 나치가 점령한 서유럽을 탈환하려는 연합군의 비밀 계획인 오버로드 작전의 일환으로 프랑스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할 예정이었습니다. 


오버로드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하기 위한 연합군의 전략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 작전이 원활하게 수행되도록 하기 위해 군 장교들은 코드명 "타이거 훈련 (Exercise Tiger)"이라는 전면적인 리허설을 계획했습니다. 디데이에 프랑스 유타 해변을 공격하기 전에 미7군단의 병사들은 노르망디 해안과 매우 흡사한 영국 해안인 슬랩튼 샌즈에서 훈련을 하게 되었습니다.


타이거 훈련은 6일전 해당지역에 23,000명의 미군이 집결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미군들은 디데이에 계획된것처럼 바다 한가운데로 나간 후, 실제 상륙지역과 비슷하게 꾸며진 데본 해안에 일련의 모의 상륙을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슬랩턴 샌즈 (Slapton Sands)의 한적한 해변은 지뢰, 철조망, 콘크리트 장애물의 미로로 변했고 인근 민간인들은 마을에서 대피했습니다. 


군인들에게 실제 전투현장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 영국 해군은 미군이 모의 상륙하기 직전까지 해변에 실제 함포 사격을 가할 계획이었습니다.


연합군 최고 사령관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가 훈련 진행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첫번째 훈련은 예상치 못한 지연과 잘못된 의사소통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4월 27일, 서로간의 잘못된 통신으로 인해 영국 해군의 함포 사격이 진행되는 가운데 미국 히긴스 보트 몇 척이 해변에 상륙하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포격은 신속하게 취소되었지만 미군이 여러 명의 아군 사상자를 내기전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아이젠하워와 나머지 장교들은 4월 28일에 7군단의 공병과 예하 지원부대는 하루전 8척의 상륙함 호송대를 타고 해안에 접근했을 때 보다 질서있는 상륙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훈련에 적의 개입 위협은 없었지만 소함대가 데본의 라임 해안을 통과할때 이들은 9척의 독일 해군 쾌속정에 포착되었습니다.


연합군에게 "E-보트"로 알려진 이 작고 민첩한 쾌속정은 어뢰와 40mm 포로 무장돼 있었습니다. 연합군 함대가 해당 지역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그들은 즉시 이를 공격하기 위해 속도를 냈습니다.


독일 E-보트 공격이 시작된 것은 오전 1시 30분경이었습니다. 8대의 미국 LST가 해안을 향해 느릿느릿 다가오고 있을 때, 밤하늘에 터지는 총격과 예광탄의 섬광에 승무원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한 미국 상사는 “모든 것이 엉망이 됐다”고 기억했습니다. 소함대는 완전히 방심했고 영국군은 E-보트의 접근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었지만 알수없는 이유로 미군과 다른 무선 주파수로 작전을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상륙함의 주요 호위함인 영국 시미터 구축함은 이른 저녁에 피해를 입고 수리를 위해 항구로 돌아왔습니다. 총격이 시작되었을 때 그들의 유일한 보호 수단은 아잘레아 라고 불리는 200피트짜리 콜벳함뿐이었습니다.


새벽 2시가 지나자 독일 E보트 어뢰가 미국 상륙함 LST-507의 측면을 공격하면서 연합군은 공황 상태로 변했습니다. 

배에 탑승했던 군의관 진 엑스탐(Gene Eckstam) 중위는 “사방에서 금속과 먼지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끔찍한 소음”을 들었다고 설명했습니다. 폭발로 인해 LST에 불이 붙었고 수십 명의 병력이 사망하고 다른 병력은 배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통신병인 스티브 새들론(Steve Sadlon)은 "보조 항해사와 나는 LST 측면을 뛰어넘어 25피트 아래 얼어붙은 물 속으로 뛰어들었고, 배 주변 바다는 심하게 손상된 LST에서 나온 기름막으로 덮여 있었고, 표면에는 불이 붙었습니다.”라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습니다.


LST-507이 불타오르는 동안 또다른 상륙정인 LST-531은 

두 발의 어뢰를 연달아 맞아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승무원이 배 밖으로 몸을 던졌을때 네번째 어뢰가 LST-289를 향해 명중하여 선미가 파괴되었습니다.


LST-289는 손상에도 불구하고 가까스로 물에 떠 있었지만, LST-507과 LST-531은 모두 몇 분안에 침몰했습니다. 

난파된 상륙정의 생존자들은 구명정에 웅크리고 있거나 라임 해변의 차가운 바다에서 무기력하게 표류했습니다. 구명조끼 사용법에 대한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한 수많은 병사들이 부피가 큰 전투 장비의 무게에 짓눌려 익사했습니다.


연합군 함대는 공격중에 흩어지고 해안을 향해 질주했지만, 독일 E-보트가 후퇴하자 LST와 영국 구축함이 현장으로 돌아와 생존자를 구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까지 수백명의 군인이 익사하거나 저체온증에 빠졌습니다. 구조대원들은 바다에서 수많은 군인들의 사체가 둥둥 떠다니는 것을 본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베테랑 Wendell Hoppler는 나중에 Sun-Sentinel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시체를 갑판에 쌓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너무 바빠서 멈춰서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비인간적이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훈련으로 인해 749명의 미국 선원과 군인이 사망하고 수백명이 부상을 입었지만, 오버로드 작전이 여전히 임박한 상황에서 연합군은 독일군에게 정보가 흘러들어 갈수있다는 우려 때문에 일시적으로 이를 은폐했습니다. 그들은 공격에 대해 직접적으로 알고 있는 몇몇 장교들의 시신이 해안에서 수습될 때까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연기하는 것을 고려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생존 군인들은 외부에 이를 발설하면 군법회의에 회부될것이라고 협박받았습니다.


타이거 훈련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군의 가장 비극적인 훈련 이었지만 노르망디 상륙작전 성공에 큰 경험을 제공했습니다. 매복 공격이 있은 후, 연합군은 무선 통신 절차를 개편하고 군인들이 구명조끼 사용 방법을 완벽히 인지했는지 여부를 확인했습니다. 이 새로운 경험으로 무장한 미군은 이후 1944년 6월 6일(D-Day)에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했습니다. 


육군 7군단은 노르망디의 유타 해변을 상륙하면서 수백명의 사상자를 냈지만, 되돌아보면 일부 참전용사들은 타이거 훈련이 더욱 끔찍했다고 말할것입니다. 스티브 스태들런은 2009년 NBC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독일 E-보트 공격에 비하면 유타 해변 상륙은 공원을 산책하는 정도에 불과했다.”라고 말했습니다.


미군은 디데이 이후 몇 달 만에 타이거 훈련의 참상을 공개적으로 인정했지만, 연합군의 서유럽 침공 소식으로 인해 그 사실은 가려졌고, 오늘날까지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을 추모하는 몇 안되는 기념비 중 하나는 영국 슬랩튼 샌즈(Slapton Sands)에 있으며, 해안에서 인양된 셔먼 탱크가 근처 바다에서 전사한 749명의 군인을 기리는 기념비와 함께 자리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