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은 늘 '미국이 항복 조건을 완화해줬다면 전쟁은 몇 달 일찍 끝났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1960년 맥아더는 전임 대통령 허버트 후버에게 보낸 비망록에서 이렇게 말했다. "현명하고도 정치인다운 충고를 따랐다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학살극을 예방했을 것이고, 폭격으로 인한 그 많은 파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조건을 일본인들이 흔쾌히 수용했을 것이라는 데 대해 나는 일말의 의심도 없습니다. 여기서 '충고'란 1945년 5월 30일 후버가 트루먼에게 메모를 보내 항복 조건 변경을 촉구한 것을 말한다. 


 사실 맥아더의 이런 입장은 평생 변하지 않았다. 1946년 5월 중순 맥아더와 장시간 대화를 나눈 후버 전 대통령은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나는 맥아더한테 1945년 5월 중순 트루먼에게 보낸 나의 메모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일본과 평화를 공유할 수 있고, 그래야 우리의 주요 목표도 달성된다'는 내용이었다. 맥아더는 맞는 말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했다면 원자탄 투하, 소련군의 만주 진격 같은 손실을 모두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출처: 아무도 말하지 않은 미국 현대사 1, 올리버 스톤 외 1명 저, 이광일 옮김, 들녘, 2015년, 305쪽



*후버가 트루먼에게 보낸 일본의 항복 조건 수용 요청서


후버 전 대통령은 5월 28일 트루먼 대통령과 면담하고 대일 종전조건을 완화한다는 연합국 공동선언을


내면서, 일본 정부 형태의 불 파괴와 조선과 대만의 일본 잔류를 건의하였는데, 이는 상기 일본 측의 주장과 거의 같은 것이었다. 후버 전 대통령이 왜 그러한 활동을 하였는지에 관한 배경은 알려진 바 없으나, 그의 전기에 의하면, 그의 친우인 케네디(Joseph Kennedy)를 만났는데, 그도 자기와 유사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트루먼 대통령의 권유로, 후버 전 대통령은 다음날(5월 29일) 스팀슨 장관(후버 정권 시절 국무장관)을


만나 한 각서를 전달하였는데 그는 이를 6월 1일자로 참모들에게 하달하면서 논평하도록 지시하였다. 그 각서의 요지는 일본을 철저하게 패퇴시켜 종전을 단축시키면, 러시아를 견제할 세력을 극동에서 제거함으로써 러시아만을 그 지역에 유일한 패권세력으로 만들어 주게 되므로, 조선과 대만을 일본에게 계속 부여하는 것을 포함한 완화된 대일 종전 안을 제시하였다. 이상의 논지는 전기 아나미 고레치카 육상의 주장과 꼭 같은 내용인 것에 유의하게 된다.


지시를 받고 전략정책단(Lincoln 단장)은 6월 4일자 메모에서, 미국의 대일 조치와 관계없이 소련은 극동에서 우월해질 것이며, 카이로 공약과 얄타협약 때문에 미국은 한반도와 대만을 일본에게 양여하는 그러한 안에 호응할 수 없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마샬 총장은 상기 의견을 대체로 동의한다는 메모를 스팀슨 장관에게 제출하였다. 그 후 JCS는 6월 8일 조선과 쿠릴열도를 일본이 계속 영유한다는 전제 하의 종전제안을 예상하면서 일본에게 즉시 항복을 촉구하는 방안을 승인하여 SWNCC에게 이첩(移牒)하였다.


미국 스팀슨 전쟁 상은 트루먼 대통령을 통하여 전달받은 후버 전 대통령의 종전 안 (제2안)


조선과 대만을 일본에게 계속 영유시키는 제안을 6월 1일 다시 참모들에게 하달하면서, 일본의 항복방안에 대한 논평을 내도록 청하였다. 그에 대하여 링컨 전략정책단장은 6월 14일자 각서에서 "카이로 공약과 중소의 군사적 이유 때문에 조선과 대만의 일본 측에 의한 게속 영유는 수락될 수 없을 것"이라는 소견을 다시 상신하였다. 마샬 참모총장은 위의 의견에 전촉적인 동의를 표명하면서, 스팀슨 장관에게 제출하였다. 이 소견은 후술하는 바와 같이 스팀슨 장관이 그대로 채택하여 포츠담회담까지 가지고 간 것이다. 이러한 제안이 그 후 미국 관변 측에서 더 이상 재론된 흔적은 없었다.



출처: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의 「和平工作」과 연합국의 대응, 한국정치학회보 제35집 제3호 2001.12 261 - 278 (19page)




일본의 조건부 항복으로 조선 유지 찬성, 한반도 40도선 분할안 반대하고 38선 한 것도 맥아더, 진짜 파면 팔 수록 뭔가 인천 원툴 느낌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