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 많은 사람 중에 하필이면 이라크의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1990년대 초반, 중동 평화를 향한 도정에 시동을 거는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는 사실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1980년대 후반, 8년에 걸친 이란-이라크 전쟁이 별 소득도 없이 끝난 뒤에 유가가 사상 최저로 곤두박질치자, 수출 소득에 큰 타격을 입은 이라크 경제는 파산 지경에 이르렀다. 후세인은 이라크 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거대하게 불어난 군대를 유지할 자금을 확보하고자 필사적이었다. 결국 그는 1990년 8월 2일, 석유로 부를 축적한 작은 이웃나라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쿠웨이트를 점령해 석유 자원을 확보하고 유가를 올리면 이라크 경제가 되살아나리라고 계산한 것이다.

하지만 후세인은 국제 정세를 간과했따. 후세인의 군대가 쿠웨이트로 진격한 바로 그날, 유엔은 그의 침공을 저지하고자 움직였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즉시 결의안 660호를 의결해 침공을 비난하며 이라크군의 무조건 철수를 요구했따. 또한 이라크에 대한 경제제재 제안을 비롯한 일련의 결의안이 줄줄이 의결되었다.

갈수록 더해가는 압박에 후세인은 비록 냉소적이기는 해도 대단히 독창적인 발상으로 대응했다. 그는 이스라엘에게 점령지에서 즉각 무조건적으로 철수할 것을 요구하는, '이 지역 전반에 걸친 모든 점령 문제'에 대한 포괄적인 해결책이라는 것을 제안하면서, 이것이 '현 쿠웨이트 상황의 해결 방안을 규정하는 공식'이 될 것이라고 했다.

물론 후세인은 이스라엘이 철수를 거부할 것이며, 이 문제로 아랍 국가들이 분열해 쿠웨이트로부터 철수하라는 압력이 약해질 것으로 예상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점령지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이라크의 지도자를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서안 지구에 있는 아지아 난민촌의 작은 집에서 가족 열한 명과 함께 살고 있던 대학생 모기 아사드(당시 20세)는 이렇게 말했다.

"사담 후세인은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그는 영웅이에요. 사담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도와줄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에게 나가라고 말할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에 반대하는 국제 세력의 선봉에 선 사람은 미국 대통령 조지 부시였다. 부시는 쿠웨이트 문제를 이스라엘군의 점령지 철수와 연계해서 진흙탕으로 만들고 있는 후세인을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렇지만 비록 유엔의 이름을 앞세웠다 해도 실질적으로 미국이 이끄는 반 이라크 전선에 아랍국가들을 끌어들이려는 부시의 노력은 심각한 난관에 부딪혔다. 예를 들어 많은 이들이 아랍 민족주의의 수문장으로 여기는 시리아는, 이라크의 경우와 이스라엘의 경우를 연계하는 문제를 미국이 무시하는 한, 반이라크 동맹군에 참여하기를 꺼렸다.

후일 인터뷰에서 시리아 외무장관 파루크 알샤라는 알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이 미국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술회했다.

"이중 잣대는 안 됩니다. 가령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걸프 사태에 관해 내린 결정을 우리 모두가 지지한다면, 아랍과 이스라엘의 분쟁에 대해서도 같은 결정이 내려져야 합니다."

부시 대통령은 시리아의 동맹군 참여가 절실한 나머지, 간접적으로나마 이스라엘과 이라크의 유사점을 인정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기에 이르렀다. 1990년 10월 2일 유엔 총회에서 연설하면서 부시는 이라크군이 쿠웨이트에서 철수하는 것이야말로 '아랍과 이스라엘을 갈라놓고 있는 갈등을 이 지역의 모든 국가와 인민이 함께 새로하는' 길을 닦는 일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부시는 1990년 11월 23일 제네바에서 하페즈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과 직접 면담하면서, '일단 사담을 처리하고 쿠웨이트를 해방하는 데 성공한다면, 미국은 [아랍-이스라엘의] 평화 추진 과정에 착수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부시의 약속은 알아사드의 마음을 움직였다. 알아사드를 비롯한 아랍 지도자들은 미국이 이끄는 반후세인 전선에 참여함은 물론 군대까지 파견하기로 했다.

1991년 1월 16일 유엔 연합군은 후세인의 이라크군을 공습했고, 2월 24일에는 지상군 공세를 개시했다. 약 100시간에 걸친 전투 후에 이라크군은 패퇴했으며, 후세인은 쿠웨이트에서 철수하는 데 동의했다.

한편 걸프 전이 터지던 날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점령지에 주재하던 외신 기자들이 대거 이라크 쪽으로 빠져나가자, 이스라엘군은 그 틈을 타서 점령지 전역에 통행금지령을 내리고,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이스라엘군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서 정보를 캐내 마지막 결정타를 날리려는 의도로 수백 명을 체포, 구금하고, 수감자들을 자주 잔혹한 방법으로 신문했다. 헤브론 구금센터의 한 내부 제보자는 이렇게 폭로했다.

"공포 그 자체였다. 그들은 곤봉이 부러질 정도로 수감자들을 구타하고, 생식기고 가격했다. 수감자를 묶어 차디찬 바닥에 눕히고는 축구를 하기도 해싿. 말 그대로 수감자를 공처럼 발로 차면서 굴렸다. 그러고는 발전기와 여전 전화기를 이용해 그에게 충격을 가한 뒤, 밖에 세워놓고 몇 시간 동안 빗속에서 추위에 떨게 만들었다. 그들은 마치 수감자들을 짓이겨 고깃덩어리로 만들려는 것 같았다."

7주 동안 지속된 통행금지로 점령지의 경제는 거덜 나다시피했다. 특히 가자지구가 입은 손실은 최소한 8400만 달러에 이른다. 1991년 2월까지 생산된 감귤류 14만톤(그것도 전해의 17만 5000톤에서 대폭 하락한 양이지만) 중에서 고작 1만 5000톤만이 수출되었다.

또한 군정 당국은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이 구직을 위해 이스라엘로 입국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 때문에 몇 천 가구에 이르는 팔레스타인 가정이 경제적으로 파탄 위기에 몰렸다. 1991년 2월 말 가자지구의 육류 판매고는 80%, 채소 판매고는 70% 떨어졌다. 그래도 아직 최악의 상황이 닥친 것은 아니었다.

점령지 팔레스타인인들이 공공연하게 후세인을 지지하는 데다 튀니스에 있는 팔레스타인 지도자 아라파트-항상 민중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마저 후세인을 찬양하자,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당국은 자국에서 일하는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에게 앙갚음을 했다.

여기서 우리가 상기해야 할 것은 많은 팔레스타인인, 특히 서안 사람들이 점령지에서는 좀처럼 얻기 힘든 일자리를 찾아 사우디아라비아나 쿠웨이트로 건너갔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번 돈을 점령지의 가족에게 보냈다. 이들의 송금은 언제나 점령지의 경제에 가장 큰 버팀목이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라크 독재자를 지지하자 실망한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당국은 팔레스타인 노동자들을 내쫓았고, 이들 대부분은 점령지로 돌아가서 실업자가 되는 길 말고는 달리 갈 곳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자 점령지의 경제는 치명타를 입었다.

출처: 6일전쟁 50년의 점령, 아론 브레크먼 저, 정회성 번역, 니케북스, 2016년, 311~3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