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혁명전쟁 이후 이란 카자르 왕조는 프랑스 공화국/프랑스 제국으로부터 장교단을 초빙하고 군대를 유럽식(프랑스식)으로 바꾸는데 박차를 가했고 그 성과를 소개함
오스만의 니잠보병처럼 이란 카자르 왕조에도 똑같이 니잠보병이 있었다 페르시아어라 발음이 약간 달라서
철자는 Nezam이라고 씀
이란 전열보병 연대의 병과
영국-이란 전쟁 당시 삽화
이란 기병대 복장을 봐도 알겠지만 완전한 유럽식 기병대를 갖추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이란 기병대 모자가 프랑스식 군모인데 저 모자는 똑같이 1860년대 일본 막부육군에서도 채용해서 쓰고다녔다
막부육군 기병대
모자가 같다
왜 디자인이 같냐면 영국-이란 전쟁은 1850년이고 막부육군이 프랑스식으로 장비 수입한게 1860년대라서
즉 이란은 최소 1803년부터 1850년대까지 19세기 절반가량 유럽식으로 군사훈련받은 지지기반을 나폴레옹 시대가 끝난 이후에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는 말임
영국-이란 전쟁에 투입된 영국육군은 보병 5,700명이었는데 이에 맞선 이란 니잠보병(유럽식으로 편성된 전열보병)은 6,000명, 기병대 2,000명이라 전략적으로 대등하게 싸울수있었다
비교적 더욱 "전통적인 군대"에 의지했고
일방적으로 양학당해서 추태만 보이고 끝났던 1841년 영국-중국(1차 아편전쟁)과는 다른 모습이었음
근데 저렇게들고 졌다는거임?
경보병도 있었음?
청나라는 돈도많은 놈들이 전열보병을 왜안받아들인거지 개념연구는 했던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청 황제와 청군 장수들은 자신들이 보유한 기존의 "전통적인 군대"를 과신했고 영국군이 위세만 믿고 그다지 강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음 관련 내용을 좀 인용하자면
이런 “천조(天朝)”의 분위기에서, 중국의 외부에 대한 인식은 거의 제로였다. 심지어 영길리(英吉利, 잉글랜드, 즉 영국)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다. 수천년동안의 경험은 그들에게 중국황제만이 영원한 천하의 공주(共主)이고, 마땅히 만방내조(萬邦來朝)를 받아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므로, 도광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들 “화외만이(化外蠻夷)”를 눈아래 두지 않았다. 설사 영국군이 침범한 것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소소한 무리’들은 금방 토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설사 전투에서 계속 패배하면서도 한번도 자아반성을 해본 적은 없었다.
결국 성하지맹(城下之盟)을 체결해야하는 상황에서도 그는 이해를 하지 못했다. “천조”는 강대한 무기와 우수한 전장문물을 지니고 있는데, 어찌 이들 “이성견양(夷性犬羊)”들에게 연패하는지.
그리하여, 그는 모든 책임을 부하들에게 떠넘긴다. 임칙서(林則徐), 기선(琦善), 우감(牛鑒), 혁산(奕山)등을 포함한 여러 전선의 고관들과 총사령관들은 모조리 문책을 당해야 했다.
당시 양강총독(兩江總督)인 이성원(李星沅)이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능향(愣香, 程庭桂)의 글에, 황제를 접견할 때, 영이(英夷, 영국오랑캐)의 일을 얘기했는데 ‘용인불명(用人不明)했다고 깊이 스스로 회한하며, 주먹을 쥐고 가슴을 쳤다(握拳槌心)” 비록 후회하면서 가슴을 주먹으로 쳤지만, 그는 그저 자신이 “사람을 잘못 썼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영국인의 침범에, 당시의 조야 상하는 모두 토벌하자고 주장했다. 이는 “천조”통치자의 “역이”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이다. 나중에 ‘한간(漢奸” “매국노”로 치부되는 기선도 마찬가지였다.
대대로 국가의 은혜를 입은 만주 정황기(正黃旗) 출신으로 도광제가 아편금지결정을 내린 후 그는 이를 적극지지하는 대신중 한명이었다. 정해가 함락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직예총독이었던 기선은 황제로부터 “더욱 신경써서 엄히 방비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그리하여 천진에서 구체적인 방어조치에 들어간다.
그러나, 이 영국인들에게 보내는 문서에서 득의양양하여 스스로를 “본대신작각부당(本大臣爵閣部堂)”이라고 칭하며 영국인을 “이성견양”이라고 멸시하던 청나라의 최고관리인 그는 직접 영국군대의 “선견포리(船堅砲利, 배는 튼튼하고 대포는 날카롭다)”를 직접 목격한 후 슬쩍 마음을 바꾸게 된다.
심지어 황제에 올린 상소에서 상세하게 영국군의 전함과 윤선의 모양을 묘사하면서 극력 그리고 대담하게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기는 어렵다고 암시하기도 했다.
그리하여, 기선은 심혈을 기울여 영국측과 화의하려 한다. ‘천조’의 용어로는 영이(英夷)를 취무(就撫)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심혈을 기울여 정전합의를 달성하고, 영국군이 물러나 북방의 위기를 해소시켰음에도 기선은 5개월후, 마음대로 영토를 할양했다는 이유로 족쇄에 채워져 북경으로 압송되고 만다.
기선의 “의지불견(意志不堅)”의 전철이 있으므로 대신들은 황상의 뜻에 영합하기 위하여, 더욱 급진적이 되어 매번 상소를 올릴 때마다 목소리를 더욱 높인다. 당연히 이러한 ‘천조’의 위엄에 빠져서 전선의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은 확실히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전쟁터에 나가보면 그들은 비로소 발견하게 된다. 상황은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 천양지차라는 것을. 황제가 바라는 것처럼 “위로는 국가의 체면을 욕되게 하지 않고, 아래로는 변방의 전투는 일어나지 않게 하는” 일은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영이’의 압박하에 국가체면을 욕되지 않게 하려면 반드시 변방에서 전투를 벌여야 하고, 영국군의 사상유례없는 엄청난 포화를 견뎌야 하지만, 결국 변방에서의 전투결과는 국가의 체면을 욕되게 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전선의 장수들은 그들이 자랑스러워하던 육전에서도 영국군에게 완전히 압도당한다는 것을 보게 된다.
그리하여, 기선이후, 흠차대신 이리포(伊里布)이건, 과용후(果勇侯) 양용(楊勇)이건, 아니면 정역장군(靖逆將軍) 혁산(奕山)등이건 이들은 모두 한때 의분강개하여 ‘오랑캐토벌’을 외쳤고, 속속 기선이 업무를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고 탄핵했었지만, 하나하나 기선의 갔던 길을 따르게 된다.
이는 아이러니한 일막을 낳게 만든다: 황제의 앞에서는 첩보가 산더미처럼 쌓이는데, 전선에서는 참패가 이어지고 있다. 첩보가 많으면 많을수록, 황제의 기대는 더욱 커지고, 재촉은 더욱 심해진다.
이때의 대신들은 감히 사실대로 영국군이 너무 강대하여 이길 수 없다고 보고하지 못했다. 그렇게 말했다가는 기선처럼 ‘청의(淸議)’에 의해 한간 매국노로 몰릴 판이었다. 그래서 감히 패배했다고 말을 하지도 못한다. 만일 그렇게 말했다가는 중죄를 면키 어렵다.
그리하여 영국군과 황제의 사이에 끼어 위를 속이고 아래를 속이는 일을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거짓말이 커질수록, 분식은 더욱 과장된다.
일단 여기까지인데 궁금증 해결에 도움이 되길 바람
보불전쟁때 전열보병으로 싸웠지 않나?
@ㅇㅇ 보불이란데 청불
1868년 내전직전까지 쓰고 메이지유신 이후 바꼈다나 머래나~ - dc App
저때가 그 개노답 카자르 왕조가 그나마 서구화 개혁 시늉이라도 시도했던 시절인가? - dc Ap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