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가 항복했을 때 독일군은 100만 명이 넘는 이탈리아군을 포로로 잡아 강제수용소에 수감했다. 이탈리아군은 왜해되었다. 그라치아니는 이탈리아군을 재건하기 위해 나치 독일과 협정을 맺고 국가공화국군을 조직했다. 하지만 독일군은 이탈리아군은 쓸모없다며 불신했고 새로운 이탈리아군에게 4개 사단만을 승인했다. 독일군은 병력 모집에도 비협조로 일관했다. 이탈리아군 포로는 석방되는 대신 죄수 취급을 받으며 독일 본토에서 강제 노동을 해야 했다. 그중 일부는 파시즘에 충성을 맹세하여 풀려났지만 이탈리아군으로 복귀하는 것이 아니라 독일군 용병으로 편입되었다.


 게다가 독일군이 이탈리아에서 점령군 행세를 하며 행패를 부리자 이탈리아인들의 반감은 날로 커졌다. 그라치아니의 괴뢰군대에 제 발로 입대하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그는 죄수들에게 자유를 준다는 명목으로 석방하여 겨우 머릿수만 채웠지만 그런 군대가 쓸모가 있을리 없었다. 1944년 7월 첫번째 사단이 전선으로 향했지만 어차피 이탈리아 전선의 주인공은 독일군과 연합군이었다. 국가공화국군은 독일군의 괴뢰군대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일부 부대가 활약한 사례도 있었다. 1944년 12월 26일 그라치아니는 이탈리아 중북부 가르파냐나 전투(Battle of Garfagnana)에서 제3산마르코 사단,  제4몬데로사알피니 사단 6000여 명과 독일군 3000여 명으로 구성된 혼성부대를 지휘하여 수적으로 두 배에 달하는 미군 제92보병사단을 격파했다. 이탈리아군이 미군을 이긴 드문 사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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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솔리니가 벌여놓은 희대의 삽질이 워낙 인상적이기는 하지만 그걸 이탈리아 병사들이 쪼다인 탓으로 돌리 수는 없다. 이탈리아군도 용맹스럽게 잘 싸운 경우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동부 전선에서 이탈리아군은 열악한 병참과 불충분한 무기에도 불구하고 조반니 메세 장군의 지휘 아래 소련군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돈강으로 진격하던 중 남부 러시아의 이즈부셴스키(Izbushensky)에서는 제3사보이아 기병연대가 소련군 제812보병연대를 향해 기병 돌격하여 검과 수류탄만으로 소련군 보병들을 마구 짓밝고 도륙했다. 이탈리아군의 손실은 100여 명에 불과한 반면, 소련군은 450여 명의 사상자가 나오고 600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영국 역사학자 마틴 길버트는 마치 한 세기 전의 나폴레옹 전쟁을 연상하게 하는 이 전투를 가리켜 "전쟁 역사상 마지막으로 성공한 기병 돌격"이라고 평가했다. 독일 육군 참모총장 할더 장군을 비롯한 독일 장군들은 도움은 주지 않으면서 "이탈리아 사단은 유감스럽게도 너무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우리 후방에서 소극적인 엄호 이상의 역할은 맡을 수 없다"라면서 동맹군에게 경멸어린 시선을 감추지 않았지만 이탈리아군은 충분히 제 몫을 하고 있었다.


 1941년 겨울 독일군이 소련군의 매서운 반격으로 모스크바를 코앞에 두고 밀려날 때 이탈리아군은 최소한의 희생으로 소련군을 막아내어 무솔리니의 체면을 살려주었다. 재앙이 닥친 북쪽과 달리 남부 전선이 그럭저럭 버틴 이유에는 이탈리아군의 투혼을 빼놓을 수 없다. 1년 뒤 이탈리아군은 지옥 같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 최강을 자랑하는 제1근위전차군에게 공격을 받았다. 옆에서는 독일 제6군이 포위되고 헝가리군과 루마니아군이 줄줄이 무너졌다. 추축군대 전체가 괴멸하는 판국에 이탈리아군의 손실을 묻는 치아노 외무장관에게 한 독일 장군은 "그들의 손실은 전혀 없소. 죄다 달아나고 있으니까요"라고 오만하게 대꾸했다. 그러나 동맹군을 우습게 여기는 독일군의 오만한 태도와 달리 이탈리아군은 무기력하게 백기를 들지 않았다. 알프스산맥의 추위에 익숙했던 알피니 산악군단의 병사들은 조직적인 지연전을 펼치며 부대를 유지한 채 철수했따. 차량이 매우 부족했던 이탈리아군은 도보로 물러나야 했고 후퇴중에 큰 손실을 입기는 했지만 적어도 독일 제6군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지는 않았다. 1943년 1월 26일 모스크바 방송은 "러시아에서 파괴되지 않은 추국군 부대는 오직 알피니 군단밖에 없다"라며 이탈리아군의 용맹함을 솔직히 인정했다.


 히틀러와 독일 장군들은 동맹군들이 소련군을 제대로 막지 못했기 때문에 독일 제6군이 포위되었다며 분노를 토했다. 하지만 소련군에게 역습의 기회를 준 가장 큰 이유는 애초에 욕심만 앞세운 무리한 진격과 병참 무시, 과도한 목표였다. 또한 히틀러는 동맹군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할 뿐 소통은 게을리했고 소련군 기갑부대를 막기 위한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무시했다. 스탈린그라드의 재앙은 전적으로 히틀러와 소통 부재가 초래한 결과였다.



출처: 별들의 흑역사, 권성욱 저, 2023년, 고유당, 55~57, 193~195쪽




참고로 이때 털린 미군 사단장이 알몬드. 6년 뒤 6.25전쟁 때 북진하던 무렵 10군단장인가도 했던 사람.


이탈리아한테도 털리던 놈한테 북진을 맡겼으니, 왜 6.25전쟁 때 북진 실패했는지 이해가 될법도